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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건강한 교회는 애통의 언어를 말한다
by Mark Vroegop2019-05-20

몹시 추운 2월의 어느 날, 나는 새로 판 무덤 아래로 자그마한 내 딸의 관을 내렸다. 며칠 전 아내는 사산된 아기를 출산했다. 아내는 약 9개월 동안 그 아기를 뱃속에서 키우고 있었고, 출산일이 임박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태중에 있던 아기의 심장이 멈추었다. 


친척과 친지들이 우리 가족 주위로 모여 섰다. 무덤 아래로 작은 관을 조심스레 내려놓은 후, 나는 아내와 아들 셋을 불러 모았다. 우리는 무덤을 뒤로 한 채 걷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 마음은 형언할 수 없는 슬픔으로 찢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긴 여정의 시작일 뿐이었다. 


이후로 우리는 모순된 정서와 계속되는 질문들과 반복되는 실망 속에서 한참을 헤맸다. 여러 번의 유산을 겪어야 했으며, 손상된 난자가 거짓으로 임신 양성 반응을 보이는 등의 일들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몇 년 후, 오랜 노력 끝에 마침내 새 생명을 잉태하여 건강한 딸을 출산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의 굴레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매일 같이 투쟁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 고통의 여정 속에서 크리스천들이 뭔가 놓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놓치고 있는 요소


아내와 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믿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분의 영광과 우리를 위해 일하실 것을 알았다. 그분의 주권을 귀중히 여겼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매일 같이 힘들었다. 매우 힘들었다. 깊은 슬픔은 다스려지지 않았다. 어둠의 터널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고통과 질문과 두려움에 대해 하나님께 이야기했다. 


그러나 가끔씩 내가 실제로 씨름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나누면, 몇몇은 그것을 불편해 하거나 거기에 대해 이상한 대답을 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긍정적인 말들로 분위기를 바꾸려고도 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겪는 고통과 우리 가정의 사적인 내용들 사이의 관계성을 찾으려 들며 실수를 범하곤 했다. 내가 깊이 씨름하거나 의심하는 부분에 대해 정직하게 말할 때면 사람들은 보통 그 화제로부터 빨리 벗어나기를 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깊은 슬픔에 빠져 있는 우리와 동행하는 법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나는 모든 이들이 좋은 의도로 그랬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을 비난하거나 분개할 생각이 전혀 없다. 다만 그들은 우리가 말하는 애통의 언어를 이해하거나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깊은 슬픔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던 것은 애통하는 일에 대한 익숙함이었다. 인생의 투쟁을 통해 하나님께 진실하고 정직하게 나아가 이야기하는 부분 말이다. 


사실 애통은 우리에게도 새로운 언어였다. 신학교에서 오랜 시간 훈련받은 목회자였음에도, 나는 우리 가족이 겪은 고통의 시간들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몰랐다. 시편 삼분의 일 이상이 애통하는 내용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나는 애통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고 내 고통은 나와 애통 사이의 빈 공간을 상실과 슬픔으로 메웠다. 


마음을 되돌리기


무언가를 상실했을 때, 내 마음은 진실로 애통해 하기 시작했다. 나는 인생의 고통이란 여전히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이해해 주기 원했다. 혹 그 고통이 꼭 나쁘다고 할 순 없더라도 말이다. 그러다 나는 깊은 슬픔에 관한 책 대부분이 슬픔의 심리적 과정을 설명하는 데 그치거나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했단 사실을 방어하려 든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애통에 관한 내용이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다. 장례식과 주일 예배에서 애통을 가볍게 취급해도 될 만한 문제처럼 다루는 것 같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축하와 승리의 노래들은 자주 불렸지만 애통에 대한 노래는 불리지 않았다. 


나는 애통한 심정을 토로할 수 있는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극단적인 삶의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주권적 돌보심을 신뢰하며 견디는 성도를 위한 노래 말이다. 


애통의 은혜


여러 해에 걸쳐 애통에 관해 이야기하며 설교하자 사람들이 흥미로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비통해 하는 사람들이 상담을 받겠다며 나를 찾아왔다. 그들에게 왜 나를 찾아왔냐고 물었다. 그러자 “주일에 설교하신 말씀을 듣고 목사님은 진짜 애통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같은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애통을 선물로 보기 시작했다. 


고통 속에서 이겨낼 수 없다는 식으로 절망에 빠지거나 모든 것이 괜찮다는 식으로 외면하며 침묵하지 말라. 그 대신 하나님께 나아가 몸부림치며 간신히 버티고 있는 애통의 문제에 대해 정직하게 이야기하라. 그러면 주어진 상황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히 세울 수 있다. 애통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이끄는 고통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애통의 언어에 대해 알게 되고 이 거룩한 상실감을 위해 허락된 예배를 중심으로 기도 생활을 재정비했을 때, 거기에는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은혜가 있다. 애통의 여정에서 우리는 아래 네 단계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1. 기도하라


고통이 당신에게서 해결하기 힘든 질문을 떠올리게 하거나 씨름하게 한다면, 애통은 그 모든 감정과 어려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야기하게 만든다. 설령 기도의 내용이 영 어색한데다 엉망이라 할지라도 애통하는 자세는 하나님 앞에서 위선적으로 반응하거나 아예 침묵해 버리는 것보다 훨씬 낫다.  


2. 불평을 토로하라


애통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온갖 질문과 두려움과 불만을 직설적으로 이야기하게 된다. 성경에서 퉁명스럽게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시 77:9)”라고 반문하던 것을 기억해 보라. 이런 질문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서 솔직해질 때 구슬픈 탄식의 노래 안에 은혜가 임한다. 

 

3. 대담하게 물으라


약속하신 대로 행해달라고 부르짖을 때 우리 마음 한쪽에서 불평이 일어날 때가 있다. 때로 고통은 실망하게끔 만들지만, 애통은 담대히 일어나 다시 소망하게끔 만든다. 애통할 때 우리는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찾으며 도움을 구한다. 


4. 신뢰를 선택하라


이 땅의 모든 애통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확증으로 끝이 난다. 상처 받은 이들은 직감적이고 정직한 기도를 통해 고통을 이겨 낼 새로운 통로를 발견한다. 애통은 슬픔의 막다른 골목이 아닌 믿음을 새롭게 하는 도관과 같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편 13편은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시 13:1)”라고 부르짖으며 하나님이 왜 멀리 계신 것 같은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시작과 달리 다윗은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5)라는 소망 가득한 선언으로 끝맺는다. 


이것이 바로 애통이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는 곳이다.


믿음 충만한 애통


삶은 슬픔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영감을 받은 깊은 슬픔에 관한 표현들에 익숙해져야 한다. 예수님도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라고 애통하는 시편을 인용하며, 아버지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쏟아부었다.  


내가 겪은 고통의 여정과 목회 여정들 역시 애통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함을 알려 주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서고, 불평을 토로하며, 담대하게 묻고 신뢰할 때, 하나님은 은혜 가운데 슬픈 애통의 노래를 허락하신다. 이를 깊은 슬픔에 대한 단계적인 공식처럼 이해하지 말라. 기도하며 쏟아 내는 애통의 언어는 어두운 구름이 우리를 둘러 쌀 때조차 하나님을 향해 계속 부르짖도록 만든다.  


애통은 눈물과 슬픔, 그 이상의 것이다. 애통은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신 구세주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분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실]”(계 21:4) 날에 소리 높여 한 갈망을 표현하게끔 만든다. 그리스도인들은 선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그 분의 구속 계획(창조, 타락, 구속, 회복)이 무언지를 알고 있다. 


영광스러운 계획이 완성될 날을 고대하며, 오늘도 우리는 이 땅에서 애통한다. 그렇기에 우리의 기도, 찬양, 성경 공부, 상담에서 애통이 빠져서는 안 된다. 소그룹 모임과 회복을 위한 모임에서, 또는 국가적 위기로 인해 개최된 기도회 등에서 우리는 마음껏 애통하며 은혜를 구해야 한다. 


우리 영혼은 애통에 대한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언어를 회복하는 일을 통해 부패하고 죄악된 이 땅의 여정 속에서 안정감을 누릴 수 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Strong Churches Speak the Language of Lament

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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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Mark Vroegop

마크 보레곱은 Grand Rapids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석사학위(MDiv)를 받았고, 인디아나주 인디아나폴리스에 위치한 College Park Church에서 선임 목사로 섬기고 있다. Cedarville University의 신탁 관리자이며 미국 TGC의 이사이다. 대표 저서로 15 Things Seminary Couldn’t Teach Me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