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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문화

카이퍼 통신 3: 직장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by 김은득2019-04-11

To 한국의 기독 직장인들에게 


여러분, 제 이름은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입니다. 한국의 크리스천 직장인들에게 어떻게 여러분의 일터에서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이 드러나도록 할지 권면의 편지를 쓰게 되어 기쁩니다. 종종 제가 “열 개의 머리와 백 개의 손을 가진” 괴물같이 묘사되곤 하는데, 제가 경험한 직업들을 열거하면, 여러분들조차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목사, 저널리스트 (2만여 아티클의 기고자이며, 일간 신문과 주간 신문의 편집자), 베스트셀러 작가, 대학교수이자 대학 설립자, 교육 및 사회 운동가, 국회의원, 국무총리에 이르기까지 (저의 시대엔 직업이 아니었으나, 분명 여러분의 시대에는 직업이 되었을 것까지 예상한다면) 왠만한 직업은 다 경험해 보았고, 각각의 직업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요즘 한국에선 평생 직장의 개념이 깨졌다고 들었는데,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저야말로 이직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경험들을 토대로 여러분을 위한 구체적이며, 실천적인 지침을 제시하는 것을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합니다. 그것보다는 저의 이상주의적(idealistic) 성향에 따라 우선 원칙적으로 크리스천 직장인 여러분들과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아마도 여러분 각자가 ‘세상에 거하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개념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더 심화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대개의 크리스천들이, 심지어 기독 직장인들조차, 교회 일에는 매우 헌신 될지라도, 세상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지한 경우가 많고, 그런 무지가 저에 대한 혹은 제가 한 말에 대한 무수한 오해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삶의 모든 영역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야 한다는 제 말이 그렇습니다. 이 말 자체가 상당히 신정주의적(theocratic) 색채를 띄는 것도 사실이지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전근대적 인식도 오해의 한 부분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하나님 주권을 강조할 때 청중은 경건주의적 칼빈주의자들(화란에서) 혹은 근본주의적 칼빈주의자들(미국에서)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뜻을 그 곳에 실현하는 것보다, 세상을 멀리하면서 교회든 신학교든 자신들만의 게토에서 안주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기독직장인 여러분, 저는 결코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경향성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세상 자체는 하나님이 창조하셨기에 선합니다. 한때 한국에서 신앙이 좋으면 세상에서의 직업을 가지는 것보다 목회자가 될 것을 부추기는 경향성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세상에서 직업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는 가장 좋은 교두보를 가지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저는 교회에서 소명을 추구하는 것은 성스럽고, 세상에서 꿈을 이루는 것은 속되다는 그런 이원론을 격파하는 의미로써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사실 저는 제 삶에서 정치에 참여한 이후, 더 이상의 목사직을 수행하지 않았으며, 또한 제가 경험한 여러 직업 가운데, 제 스스로 저널리스트로서의 직업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겨 온 것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또한 성스러운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으로의 중세적 구분은 성스러운 영역을 상부에, 세속적인 영역은 하부에 위치시키는 잘못된 위계질서를 부여합니다. 종교개혁가들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직업이 성스럽다는 의식을 통해 이런 잘못된 도식을 깨뜨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철학적으로 계몽운동 이후, 정치적으로 프랑스 혁명 이후 발생했습니다. 교회 혹은 종교라는 영역을 제외한 모든 삶의 영역 가운데, 하나님은 제거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교회의 장벽을 넘어서, 하나님을 삶의 영역의 준거인 것처럼, 말하고 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설령 하나님을 기준으로 자신의 견해를 표출하기라도 하면, ‘구시대의,’ ‘전근대적인,’ ‘미신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과 더불어, 프랑스 혁명의 시대정신은 모든 삶의 영역을 현대적이 되라고 부추겼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자유와 관용 및 다양성의 증진을 촉진시키는 부분이 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인간의 정체성에 엄청난 부분을 차지하는데, 소위 근대성 혹은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무신론적 인간은 공적 영역에 마음껏 참여하고, 반대로 유신론적 인간은 신앙을 가지고 공적인 삶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을 억압하였습니다. 이것이 정녕 프랑스 혁명이 약속하는 자유와 관용 및 다양성의 증진입니까? 왜 신앙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전근대적인 혹은 미신에 빠진 사람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합니까? 여기에 더 큰 문제는 자칭 기독교인들이 세상이 자신들을 무시하니, 소위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세상과의 관계를 잘못 해석/적용한 것입니다. 즉 세속화되어져 가는 세상과 격리됨을 통해, 우리들만의 신앙과 경건을 추구하는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대학이라는 공적 세계를 떠나 그들만의 신학교(seminary)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대학교, 심지어 기독교인들이 세운 대학교마저, 온통 무신론자들의 전당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상을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그 세상을 계속해서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칭의를 강조하여 교회 영역에 머무는 루터란이나 세상을 필요악으로 보기 때문에 세상과 거리를 두는 재침례교도와 달리, 역사적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칼빈주의자는 교회의 영역을 너머, 세상의 영역에까지 나아갈 수 있는 신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신앙을 고백하는 칼빈주의자들이 교회와 세상, 은혜와 자연, 신앙과 이성의 반립적 도식으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한국은 드물게도 칼빈주의 신학이 우세한 나라 중 하나라고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 청년들을 신앙으로 잘 키워서, 공적 영역에 참여함을 통해 세상을 변혁시키는 활동들을 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의 우물 안 개구리처럼 가둬놓는 일이 빈번하다고 하니,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심지어 너무 교회에만 매몰되어 있는 거룩한 백수가 많다고 듣기도 했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도록 돕기 위해 제 자신이 구성한 기독교 세계관이 80년대 사회참여를 위해 유행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또 최근에 한국 교회의 공공성 회복이라는 화두와 더불어 다시금 유행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창조, 타락, 그리고 구속으로 요약된 기독교 세계관은 사실 기독 직장인들에게 너무나 필수적이어서, 약간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적으로 창조 영역 자체의 선함을 강조함으로써, 자연과 은혜를 이원론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버리도록 도울 뿐만 아니라, 은혜가 자연을 회복하는 것을 통해 세상에 참여하면서, 세상을 변혁시키도록 돕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할 때, 특히 한국 직장인들의 경우, 대개 그 영역 자체를 변혁시키는 것이 그저 신우회를 조직하는 것으로, 예배 모임을 만드는 것으로, 성경공부 모임을 만드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직업에 무능하면서도, 충분히 회사 내에서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인정받을 수가 있게 됩니다. 직장에서 예배와 성경 공부에 열심을 내는 것을 너머 직장에서 자신의 업무에 충실하고 탁월함을 발휘하는 것이 더 하나님의 뜻에 걸맞습니다. 직장은 일을 제공함으로서 인간이 이 세상에서의 존재 의의를 갖도록 도우며, 인간 자체의 번성을 위해서도 중요한 처소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학문의 세계는 진리를 추구함으로서, 예술의 세계는 아름다움을 추구함으로써 인간 번영을 추구합니다. 


저는 이런 면에서 모든 삶의 영역을 관장했던 중세 교회로부터 국가나 학문, 예술 세계가 분화과정을 거쳐 독립된 영역으로 세워진 것을 늘 지지해 왔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각각의 영역을 좌지우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 때 심으신 각 영역의 원칙과 규범대로 운영되는 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이렇게 각 사회 영역을 분화시키는 현대성 혹은 합리성은 충분히 성경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교회가 각 영역을 주관하는 것처럼, 전근대적으로 그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려 한다면, 다원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공적인 삶의 영역에 참여할 때, 우리의 신앙을 벗어 던지라는 합리성은 문제가 많을지라도, 현대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서 각 영역에 걸맞는 원칙과 규범에 충실하라는 합리성은 우리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사회에 걸맞는 “세상에 거하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에 참여해 세상을 바꾸어야 할 젊은이들을 교회 내 거룩한 백수로 세상을 멀리하게 하거나, 혹은 그나마 세상에 참여할 때조차도 회사에서 성경공부를 자주 하는 것만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한국의 기독 직장인들 여러분, 세상에 거하는 이상,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합시다. 바로 여러분의 직장이 바로 세상을 섬기는 귀한 장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 때 정하신 세상의 각 영역 원리를 존중합시다. 죄악으로 타락한 부분을 걸러내고, 하나님이 원래 뜻하신 창조 목적에 걸맞게 여러분의 직장을 회복하도록 열심을 냅시다. 다만 그 회복이 성경공부나 신우회 만이 아닌, 여러분 직장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도록 탁월한 직장인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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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은득

김은득 목사(PhD., Calvin Theological Seminary)는 신칼빈주의, 특히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의 공공신학을 한국적 문맥에 맞게 상황화하길 원하는 신학자로서 현재 미국 애리조나 투산에서 드림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