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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교회는 중독자에게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
by Kent Dunnington2019-02-15

중독자들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가 있었다. 중독자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그들이 중독자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중독자’ 개념, ‘중독’과 ‘중독 물질’에 해당하는 개념은 현대의 산물이다. 중독자라는 명사를 처음 사용한 기록은 19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현재 통용되는 중독이라는 개념은 분명하게 미국적 상황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개념이 미국의 금주 운동의 상황에서 사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편, 예전에는 중독자들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면, 오늘날에는 모든 이들이 중독자인 것처럼 보인다. 20세기 초에 중독의 개념이 형성된 이후, 이는 대중의 의식 속에서 동화되고 점점 더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흐름을 따라 중독의 목록들은 점점 더 늘어났고, 이제 현대인들은 ‘중독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독은 우리 삶의 방식이다” 그리고 “주요 중독(major addict)은 우리 시대의 무서운 질병이다”와 같은 말은 중독이 사회 전반에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지를 방증한다. 중독의 보편화라는 개념은 특히 서구에서는 거의 모든 일상에서 사용되고 있다.


작금의 한국 사회 역시 중독이라는 렌즈를 통해 자신의 행동을 살펴보려는 경향이 점점 커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가지에 중독되어 있을 가능성에 대해 걱정한다. 예전에는 달콤한 음식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여기던 것을 이제는 초콜릿 중독으로 보게 되었고, 또 사무실에서 오래 일하는 것을 이제는 일 중독이라고 보게 되었으며, 정욕이라고 여기던 것을 현대에는 성 중독이라고 보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중독이 이 사회에 만연해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무엇이 이유일까? 우리 시대와 문화가 중독 그 자체를 마치 매력적인 선택으로 보게 하고, 우리의 행동과 경험을 자연스럽게 중독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하고 묘사하도록 만드는 이유는 정확하게 무엇일까? 사실 나는 중독이 현대성에 대한 구체화된 문화적 비평의 일종이며, 중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일종의 현대 시대의 선지자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교회는 무의식적이지만 선지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가 그들의 말을 경청하면, 교회의 고유한 문화가 어떻게 중독을 만들어 내는 일에 일조했는지, 교회가 이에 대한 대안 문화를 제공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대안 문화에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점검해 보게 될 것이다.    

 

중독이라는 매혹적인 우상


중독은 모든 죄와 마찬가지로 우상의 한 형태이다. 다시 말해 중독은 그 대상이 곧 신이라는 거짓 약속을 아주 잘 이행하기 때문에, 독특하게 매력적이며 사로잡는 힘이 강력하다. 


모든 죄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번영과 성취를 자신의 능력으로 달성하고 스스로 확립하게 하는 시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특히 중독은 우리의 시도가 거의 성공에 근접하게 하는 반역이기 때문에, 매우 강력하고 유혹적이며 매력적인 반역죄이다. 또한 너무나 극적이고, 총체적이며, 끊기 힘들만큼 집요하게 사람을 유혹하므로 중독은 막강한 우상 숭배로 쉽게 넘어간다. 따라서 중독자는 실제로 고통을 피하고 싶거나 기분 전환을 하기 원할 때,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 평범한 오락에서는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은 어떠한가? 대부분의 성도들은 중독이라는 우상을 위협적으로 느끼고는 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단지 중독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인식해서만은 아니다. 중독의 막강한 힘에 비해, 과연 복음이 그것을 이겨낼 만큼 매력적인지에 대해 스스로 의문이 들기 때문에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알코올 중독자가 교회에 나타나거나 목회자가 지난 10년 동안 포르노에 중독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크리스천들이 절망하는 이유 역시 이러한 상황들이 복음의 힘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복음은 정말로 이 모든 것들을 이겨낼 만큼 충분히 강력한가?


하지만 이러한 위협감과 의구심의 뿌리는 복음의 힘 자체가 약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복음의 능력을 스스로 의심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중독자와는 달리, 크리스천인 우리는 하나님께 마음을 온통 다 빼앗기고자 하는 열망도 부족하고, 거룩한 삶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도 적은 경우가 많이 있다. 또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일에서 황홀함을 찾고자 하는 욕구 역시 중독의 수준에 다다르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중독자들을 구해낼 만큼 능력이 있는지를 의심하는 그 마음의 뿌리이다.

 

평안한 교회를 위협하는 중독자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처럼, 오늘날의 중독자들은 하나님을 향한 크리스천의 갈망이 미약하고 보잘 것 없으며 심지어 평범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스스로의 신앙과 중독자들이 본인들의 우상에 완전하게 빠져있는 모습을 비교하면서,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불성실하고 불충분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중독자라는 존재 자체에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 더불어, 스스로의 미지근한 신앙을 바라보며 우리는 크리스천로서 자신의 삶이 중독자에게 진정한 대안을 제공할 만큼 충분히 매혹적이고 아름답지 않다는 것도 깨닫는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의 깊이를 조금 더 확장시킨다면, 우리가 진정 중독자들처럼 하나님께 빠지기를 과연 원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떠올릴 수 있다. 우리 중의 다수는 품위 있고 점잖은 신앙 생활을 원한다. 그런데 중독자들의 갈망이 우리의 신앙 생활을 반성하게 만들면 만들수록, 그 품위 있는 신앙 생활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교회가 중독자들을 품고 자유케 되도록 돕는 행위에 대하여 반감을 갖는 상태에 이르른다. 혹시 중독의 문제를 말할 때, 기질적으로 중독되기 쉬운 사람이거나 혹은 절제력이 약해서 발생하는 일이므로 교회가 그들을 긍휼히 여길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치부해 버리지는 않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의 마음 속에도 크리스천으로서 중독자에 대한 위와 같은 종류의 반감이 새겨져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한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과연 교회가 중독자의 삶에 설득력 있는 신앙적 대안을 제공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우리는 깊이 고민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교회가 중독보다 더 매혹적이고 강한 힘으로 하나님께 완전히 빠지는 삶을 구현해 낼 수 있는가를 고심해 보아야 한다. 


복음의 좋은 소식은 예수님이 건강한 사람들이 아니라 병자들을 위해 오셨다는 사실이다. 그분은 눈먼 자에게 보게함을, 포로된 자에게 놓임을,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그리고 중독자에게 새 삶을 주러 오셨다. 이러한 메시지와 사명을 구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The Addict as Modern Prophet

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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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Kent Dunnington

켄트 더닝턴은 일리노이주 Greenville College에서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대표 저서로 'Addiction and Virtue: Beyond the Models of Disease and Choice'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