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자로 살아가기

시편 131편 묵상

by 고명환2024-03-25

1 

미국의 한 주립대학에서 가르치던 젊은 한국인 체육 교수가 점심을 먹던 자리에서 각진 자세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저는 한국 체육계에 한 획을 긋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위인전의 끝을 장식할 만한 문어적 수사를 써서 밝힌 포부였다. 사람이 운집한 공식 석상에서 들을 법한 선언과도 같은 말을 몇이 둘러앉은 조촐한 식사 자리에서 듣게 되니 머릿속이 다소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말이 의미하듯 그 젊은 교수는 성공하여 큰 자가 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두 나라를 오가며 인맥을 만들기에 부지런히 움직였고 자신의 이름을 여러 방면으로 알리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젊은 교수처럼 큰 자가 되어 보겠다는 사람을 탓할 마음은 없다. 그렇다고 칭찬할 마음은 더욱 없다. 다만, 왜 큰 자가 되고 싶어 하는지는 알고 싶다. 그 동기와 목적을 알고 싶은 것이다. 사람을 지배하고 싶어서,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어서, 아니면 이름을 남기고 싶어서. 여기에 더해, 누구를 위해 큰 자가 되려고 하는지도 묻고 싶다. 자신인가, 아니면 그 누구인가.


사람을 줄곧 영향권 아래 두어 왔던 세상은 언제나 그랬듯 이 시대에도 큰 자가 되어야 한다고 설파한다. 곧,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많은 것을 가지거나, 유명해지라고 부추긴다. 그래야, 후회 없는 만족한 인생이라고 속삭인다. 사람들이 알아주고 대우해 준다고 강조한다. 


큰 자로 살라는 세상의 가르침은 일찍이 교회의 울타리도 수월하게 뚫고 진입했다. 사람의 욕망을 숙주 삼아 성경적 가치인 양 버젓이 행세하고 있다.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라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각 분야의 으뜸이 되어야 한다고. 교회 안에도 큰 자가 있으니 큰 자로 쓰임 받기를 사모하라고. 장로, 권사가 되어 권위를 가지라고. 교회를 부흥시켜 큰 목회를 하라고, 아니면 자신을 확대해서 큰 교회의 담임이 되라고. 


그런데, 교회의 머리시요 심판 날의 재판장이신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의 문화와 제도가 인정하는 큰 자가 되는 것에 관심이 없으시다. 그분의 나라에서 인정받는 큰 자와 다를 뿐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과 상반된다. 주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큰 자가 되려면 작은 자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앞서간 진실한 성도들 역시 큰 자가 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주님께서 받으실 만한 그릇이 되고자 힘썼을 뿐이다. 오히려, 큰 자가 되어 세상의 영화와 사람의 영광을 얻는 길을 경계했다. 


다윗은 큰일을 이룬 사람이었지만, 스스로 위대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런 겸손한 마음을 시편 131편은 잘 보여준다.


시편 131


다윗의 시,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1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2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

3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새번역)

1절에서 다윗은 교만한 마음, 오만한 길, 그리고 큰 것을 이루려는 욕망을 버렸다고 고백한다. 모두 마음의 평안을 빼앗는 신앙의 독소들이다. 경험에 의하면, 사람의 영혼을 쉬지 못하게 하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다.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기고,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하며, 눈을 높은 곳에 두고 자기를 중심에 두고 살 때 영혼은 피곤하다. 즉 교만한 마음과 오만한 기준으로 살면, 영혼은 안식하지 못하고 평안은 모두 빼앗기게 된다. 더불어, 커다란 것을 계획하고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영혼은 쉴 새가 없고 피폐해져 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위해 가지는 이기적인 마음과 행동이 오히려 자신을 해치고 망가뜨리는 꼴이 되는 것이다. 


다윗은 아마도 1절에서 언급한 마음과 태도로 인해 영혼의 전쟁터를 분명히 경험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가져다준 것은 명성이나 부였지 영혼의 안식과 평화는 아님을 깨달았을 것이다. 더더욱, 안정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것이다. 오로지, 평화와 안정은 주님 안에서만 영혼이 자리잡을 때 주어지는 것이며, 높아진 마음이나 분에 넘치는 야망과 함께 그분이 계시는 평강의 영역에 들어갈 수 없음을 잘 알게 되었을 것이다.  


자기에게서 떠나 주님의 영역으로 간 다윗에게 찾아온 것은 영혼의 평화와 안정이었다. 젖 뗀 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듯이 고요하고 평안했다(2절). 젖뗀 아이에게 여전히 어머니의 품은 필요하다. 어머니의 품은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한 곳이 아니라, 가장 안전하고 포근한 안식처이다. 다윗에게 주님의 품이야말로 진정으로 안전한 쉼의 장소였다. 그 어떤 것이 줄 수 없는 영혼의 안식과 완전한 안전을 보장해 주는 안식처인 것이다. 


이 시는 여러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중 하나로 불리며 사랑받았을 것이다. 주님이 계신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무리에게 참으로 적절한 찬양이 아닐 수 없다. 영광의 하나님을 뵈러 올라가는 순례자들이 정리하지 않은 부정한 마음과 세상의 욕망을 그대로 안고 다가갈 수는 없다. 교만한 마음과 오만한 길로 집약되는 주님께서 대적하는 마음은 물론, 욕심과 후회 원망 분노 등의 격정을 모두 비워내야 한다. 다윗의 본 시는 순례길에 오른 성도들이 읊조리고 노래하며 올라갈 때 충분히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고 주님을 향한 뜨거운 갈망을 불러일으켰으리라 짐작한다. 


3

열왕기하 4장에 한 부유한 여인이 등장한다. 수넴에 살고 있던 그 여인은 엘리사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아보고 성심껏 섬기기 시작했다. 엘리사가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음식을 대접했고 거처를 마련해서 머물러 편히 쉴 수 있도록 특별한 편의를 제공했다. 어느 날, 엘리사는수넴 여인의 남다른 정성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으로 그녀가 원하는 것이 있는지 물었다. 왕이나 군사령관 같은 권력자도 그의 말이라면 들어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며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을 구하라고 했다. 그때, 그 여인은 의미심장한 대답을 한다. 

“나는 내 백성 중에 거주하나이다”(열왕기하 4:13개정개역). (새번역은 “저는 저의 백성과 한데 어울려 잘 지내고 있습니다”로 풀어서 번역했다.) 


여인의 대답은 하나님의 백성의 한 사람으로 아쉬울 것 없이 만족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구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물론, 수넴 여인은 부유한 환경에서 남편과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삶에 허전한 구석 없이 완벽하게 채워졌기 때문에 엘리사의 호의를 에둘러 사양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어쩌면 가장 큰 것을 갖지 못한 불행한 여인이었을 수도 있다. 아들을 낳지 못해 대를 이어줄 수 없는 약점을 가진 여자였다. 당시의 관점에서 수넴 여인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저주받은(복 받지 못한) 여자라는 사회적 편견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그늘 아래 보통의 여자 같으면 될 수 있는 대로 사람의 눈을 피해 고립된 삶으로 자신을 몰아가기 쉽다. 하지만, 대답에서 보여주듯 그녀는 동족과 어울리며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다. 오히려, 엘리사가 여인에게 아들이 없는 것을 알아내고는 딱하게 여겨 아들을 낳게 해 준다. (수넴 여인은 열왕기하 8장에 다시 등장하며, 성경은 이름을 특정하지 않은 한 여인과 관련한 이야기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수넴 여인은 마음을 높여 백성을 분리하고 멀리하며 충분히 특권 의식 속에 살 만한 위치에 있었다. 왕의 마음까지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엘리사라는 큰 인물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유력한 여인이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마음은 백성 중에 있었다. 백성의 한 사람으로 평범하게 사는 삶을 소중하게 생각했고 또 그것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수넴 여인의 낮고 겸손한 눈 높이가 더 가질 수 있고 더 높아질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줄 엘리사의 호의도 정중하게 거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실로, 평범한 여인 같으나 비범한 인물이었고, 작은 자인 것 같으나 큰 자였다. 


복음서는 드문 경우이지만 제자들 사이에 빚어진 다툼을 기록했다. 다툼의 원인은 자기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자냐 하는 논쟁이었다. 그들이 다툰 이슈는 서열이 필요하냐 아니냐가 아니었다. ‘누가 더 크냐’였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열두 제자들 간에 그래도 서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아마 그들은 부름을 받은 순서나, 배운 정도, 혹은 가문, 아니면 다른 어떤 기준을 대면서 각자의 상위를 주장했을 것 같다.


“제자들 사이에서는, 자기들 가운데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다. 예수께서 그들 마음 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이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다”(누가복음 9:46-48).


먼저, 제자들이 왜 서로 간의 서열 문제로 다투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찾기 위해서는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 제자들이 살았던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는 한 사람의 사회적 위치나 계급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거대한 제국의 일원이었던 유대 사람들 역시 그리스-로마의 문화와 사회 질서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함께 모이거나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서로가 가지는 사회적인 위치를 묻고 거기에 맞는 예우를 해 주어야 했다. 당연히,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우선 사회적인 위치를 물어보아야 했다. 이에 따라 상대방이 나보다 나은 위치나 계급에 있는 사람에게는 경의를 표하고 낮은 자세를 보여야 했다. 바로 제자들의 다툼은 이런 문화 사회적인 배경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왜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초기에는 관심이 없었던 이슈를 부각시키고 논쟁을 벌였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간단한 대답은 예수님께서 그들 사이의 서열을 정해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오늘날 같으면 열두 명이 효과적으로 조직되고 움직이기 위해 적어도 팀장 정도는 세웠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웬일인지 그들 사이에 서열을 정해 주시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어떤 시점에 이르기 전까지는 제자들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예수님의 인기가 치솟고 그들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무언가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자 제자들의 계산은 저마다 복잡해지기 시작했고 서열 문제는 그들 안에 크게 떠올랐다. 서열에 의해 미래에 차지할 지분이 각각 달라질 거라는 공통의 계산이 충돌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장차 세상의 권세를 정복하고, 기대하는 강력한 왕국이 세워지면 그들이 얻게 될 지위와 영예에는 분명 차등이 있을 것이다. 이때 더 큰 자리와 권세를 꿰차겠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동기가 작용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누가 더 높은 위치에 앉게 되느냐’는 단순한 논쟁 같아 보이나 그 안에는 영예와 권세와 대접을 좋아하는 이기적인 마음들이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제자들의 속된 마음을 간파하신 예수님은 기존의 관행과 질서를 뒤집는 방법으로 대처하신다.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 곁에 세우셨다. 예수님이 직접 어린아이를 데려와 그분 가까이에 세운 일은 그 시대의 관행으로서는 이례적인 행동이었다. 보통은 어린아이를 직접 지적하여 이리 오라 명령하면 될 일이었다. 어린아이는 신분 피라미드 구조에서 가장 아래층에 속하는 부류 중 하나였고, 종처럼 대우해도 크게 문제 될 것 없는 사회였다. 가정에서조차 소유물로 취급했고 심지어는 팔기까지 했으니 예수님께서 손수 데려다 곁에 세우신 행동은 매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사건의 또 다른 저자인 마가는 그 어린아이를 껴안아 주셨다고 기록한다(마가복음 9:36). (어린아이를 어떻게 대우하셨는지 직접 본 제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에 어린아이들을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꾸짖다가 주님의 책망을 듣게 되는 잘못을 범한다(마태복음 19:13-15).) 


어린아이를 곁에 세우신 뒤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다.” 이 말씀은 어린아이를 귀하게 여기라는 뜻이 아니다. (물론, 어린이 주일 설교 본문의 주제로 적합하지 않다.) 어린아이처럼 세상에서 작은 자여서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사람들을 주님을 영접하듯이 받아들이고 친절하게 대접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는 엄격한 신분 사회에 던지는 혁명적인 말씀이었다. 우월한 위치의 사람이 자기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을 영접하는 일은 없었다. 최소 나와 지위가 같거나 높을 경우에만 영접할 대상이었다. 어린아이들이나 천한 신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손님이 오면 때론 손님의 발을 씻어 주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헌데, 주님은 작은 자가 되어 그들을 환영하여 영접하라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그 일은 나를 보내신 분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결론적으로, 주님은 논쟁을 종식하는 역설로 말씀을 마무리하신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다.” 


이 말씀은 두 가지의 뜻이 내포된 것으로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겠다. 같은 문제를 다룬 마가의 복음서를 따라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작은 자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마태가 기록한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자’라는 말씀에 따라 이중적 의미를 갖는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 있다.


주님 나라의 가치와 원리를 가르쳐 주는 동시에 그것을 땅에서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즉, 하늘 나라의 큰 자들은 세상에서 작은 자로 사는 사람들이고(마태복음 18:4), 아울러 작은 자가 되어 자신을 낮추고 모든 사람을 영접하고 섬기는 사람들이다(마가복음 9:35). 그러므로, 유한한 세상의 가치와 제도 아래에서 권세와 영화를 얻겠다고 큰 자가 되려 하기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인정받을 남을 섬기는 작은 자로 살아야 함을 교훈하신 것이다. 


사실,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그 원리대로 사셨다. 그리고, 스스로 섬기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마가복음 10:45).


말씀처럼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고 자신을 낮추어 작은 자로 섬기며 사셨다. 어린아이, 종, 여인들과 동등한 사회적 위치에서 그들을 영접하고 친근하게 대하셨다. 스승이 제자보다 낮을 수 없는데도 제자들보다 자신을 낮추어 그들의 발을 씻어 주기도 하셨다. 고난의 시간이 임박해 올 때, 제자들 사이에는 누가 큰 자냐는 논쟁이 재점화되었다. 이때도 주님은 그들을 꾸짖는 대신 타이르듯이 말씀하신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하고, 또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누가복음 22:26).


이어서 말씀하신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누가복음 22:27).


주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섬기는 사람”으로 제자들 가운데 계셨던 것이다. 다만,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분은 나사렛의 평범한 목수로 사시다 메시아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신 이후, 일관되게 작은 자들을 섬기는 작은 사람으로 사셨다. 


4

제자들의 예가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말씀한 작은 자로 겸손하게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주변에 적극적으로 작은 자를 영접하고 대접하며 섬기는 삶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지 않은 것 또한 현실이다. 우리가 지닌 육신(flesh)의 속성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나 큰 자가 되어 영접받고 대우받기를 원한다. 사람이 가진 본능과 의지로 체질화하고 실천할 수 있는 쉬운 덕목 정도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처럼 실패를 거듭하다 아예 포기하는 가르침인지도 모르겠다. 


여행 중 미국 남부의 한 한인교회를 방문했다. 선교관이란 이름의 조그만 숙박 시설을 갖추고 있어 하룻밤 신세를 질 요량으로 찾게 되었다. 저녁 시간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젊은 부목사가 반갑게 맞아 주며 소소한 안내를 해 주었다. 잠시 거실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중 그 부목사는 내게 어느 나라에서 일하는 선교사인지 물어 왔다. 선교관에 묵게 되니 당연히 선교사인줄 알았나 보다. 이에 나는 선교사가 아니라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부목사는 기대가 무너졌는지 갑자기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겸손하고 공손한 태도에서 고압적이고 가르치려는 태도로 변해 갔다. 이후 성의 없는 몇 마디 하고는 형식적인 인사와 함께 사라졌다. 그 부목사에겐 선교사는 최선을 다해 섬겨야 할 큰 사람이고 나 같이 공부하는 신학생은 별 볼 일 없는 작은 자라 그리 환대할 존재가 아니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나이로 따지면 내가 그 부목사보다 십년은 족히 넘을 텐데…’ 

푸대접을 넘어 훈계를 받았으니 한동안 그때를 기억하면 울화가 치밀었고, 지금도 그 앙금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나는 작은 자로 살아가는 데 실패하고 있나 보다. 작은 자로서 받아야 할 어쩌면 당연한 대우를 받고도 그 정도보다는 큰 자라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어 그런가 보다. 그 젊은 목사 역시 작은 자가 되어 섬기는 일에 실패했다. 자신은 작은 자보다는 큰 자라고 여겼을 터이고 이로 인해 작은 자가 되어 영접하고 섬기는 일에 실패했던 것이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잊는 길 밖에 작은 자로 살 방법은 없다. 우리의 타고난 자아를 가지고는 작은 자가 될 수도 작은 자로 살 수도 없다. 흉내를 낼 수 있지만 그도 오래 가지 못한다. 수양과 훈련이 도움이 될 수 있겠으나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으로 실패를 피하지 못한다. 삼 년 동안 스승을 따라 다니며 그분을 배웠던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에서도 누가 큰 자냐는 갈등으로 마음이 분열되어 있었다(마태복음  20:20-28). 여전히, 권세를 즐기고 대접받을 수 있는 세상의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육신의 자아를 처리하지 못한 채 헛된 기대를 안고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었다. 


작은 자로 살기 위해서는 시편의 다윗이 육신의 소욕을 모두 뒤로하고 주님께 오듯이, 자기를 버리고 예수님께 와서 그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자신을 비우고 종의 모습을 취하여 사람으로 오셔서 평생을 그렇게 사셨던 분, 섬기던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셨으나 그들을 위해 끝까지 기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그분의 통치를 받기 전까지는 작은 자로 살아가기란 요원할 뿐이다. 


5

우리 중에 작은 자로 살겠다고 세상의 권세와 지위를 일부러 피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큰 자, 작은 자는 세상에서 일컫는 지위의 고하 혹은 성취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다. 사람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 높은 지위에 있어도 작은 자로 살 수 있고, 낮은 자리에 있어도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큰 자로 살 수 있다. 


나는 세상에서 힘없고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도 능력 없는 자라고 스스로 비하하며 주님을 섬기는 일에 물러나지 않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언자로 부름받지는 않았지만 예언자를 알아주고 섬기면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는다고, 의인을 알아보고 의인으로 맞아들이면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뿐인가? 주님의 제자라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면 이를 잊지 않으시고 상을 주시겠다고 하셨다(마태복음 10:42). 작은 일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닌 것이다. 주님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기적을 일으켰던 대 예언자 엘리야나 그를 정성으로 섬겼던 사르밧 여인이 한 일을 동일하게 큰일로 여겨 주시고, 기적의 예언자 엘리사가 행한 일이나 그를 알아주고 섬겼던 수넴 여인이 한 일을 다 귀하게 보시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는 말씀을 따라 작은 자로 살아가는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주님 나라의 사람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우리는 최고 권력의 자리에서 겸손하게 일하다 거기에서 내려온 뒤에는 작업복으로 손수 망치를 들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집 짓는 일에 참여하고, 주일이면 주일학교 교사로 평범한 사람들을 섬겼던 하나님 나라의 큰 자를 익히 들어 안다. 어느 다른 한편에는, 자신을 잊고 사람이 닿기 힘든 오지나 음지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작은 자로 일하는 드러나지 않은 무명의 주님 나라 일꾼들은 얼마나 많은가. 


세상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삶을 도덕적 표준으로 삼으라 하고, 보편적인 종교는 넉넉하면 적선을 실천하라는 수준의 가르침에 그친다. 헌데,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고 작은 자가 되어 다른 사람을 높이고 섬기며 살라고 가르치셨다. 세상에 살지만 하늘의 도덕률로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상의 상식과 관행을 뒤로하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라고 하셨다. 


이렇게 사는 것은 단지 높은 수준의 도덕을 실천하는 것을 지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교훈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곳곳에 많아질 때 주님의 나라는 점점 확장되고 그곳에 천국의 삶이 구현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직접 행하신 분을 믿고 따른다. “나를 본 받으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사도의 본에 감동하며 마음을 다진다. 주님과 사도들은 가르침대로 자신을 낮추고 작은 자가 되어 희생하고 섬기며 살았다. 진실하게 주님을 믿고 따랐던 앞서간 분들 역시 그 길을 그대로 밟았다. 


이제는 우리에게 바통이 넘겨져 왔다. 주님과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이 본으로 가르쳐 왔던 천국 시민의 도덕률을 우리가 실천해야 할 때이다. 낮은 자가 되어 다른 사람을 높이고 섬기는 작은 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과 사람이 알아주고 말고에 상관없이 자신을 잊고 묵묵히 그 길을 가야 한다. 그러면, 그날에, 자신은 몰랐지만 작은 섬김 하나라도 기억해 주시는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분이 반드시 고마워하시고 칭찬하실 것이다(마태복음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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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고명환

고든콘웰 신학교를 졸업(M.Div)하고, 미국에서 한인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유학생, 다문화가정 학생들을 위한 한국어 강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