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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무심천변 아픈 역사는 비(碑)가 되어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청주제일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2023-07-18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

‘충청도’가 충주와 청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지명이라는 것은 다들 알고 있다. 이는 과거 충청도의 중심은 오늘의 충청북도가 중심이었다는 의미이고, 충청남도에는 견줄 만한 유력한 도시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조선시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충청북도가 충청권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이 선교지를 선정할 때도 중요하게 여긴 곳이 아닐 수 없다. 충청북도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먼저 감리교 선교사 스웨어러가 청주지역에 복음을 전했지만, 교회를 설립하게 된 것은 장로교 선교사 밀러가 이곳에 선교거점을 만들면서이다. 그러면 충청북도는 어떤 선교 루트를 따라서 복음이 전달되었을까? 충청북도는 경상도로 가는 지름길이며 가장 중요한 길목이었다. 따라서 부산, 대구, 안동, 문경을 거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충청북도가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은 자연스럽게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들의 발걸음이 잦았다. 그리고 그들의 수고는 헛되지 않았다.


또 하나의 루트이면서 청주 읍내보다도 먼저 복음이 전해진 곳은 현재 흥덕구 신대동이다. 청주에서 서쪽에 자리한 신대동은 복음이 죽산(현재는 안성시 일죽)을 거쳐서 청주로 유입된 경우이다. 이 루트를 통해서 복음이 청주에 가장 먼저 전해졌고, 이 루트를 통해서 설립된 충청북도 최초의 교회는 신대교회이다. 이 교회는 지금도 청주 시내와는 거리가 있는 위치(흥덕구 신대동 426)에 있다. 해주 오씨 집성촌인 이 마을에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진 해는 1901년인데, 죽산(둔병리교회)에서 열린 사경회에 이 마을 사람 오천보, 오삼근, 문성심 등이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돌아와서 오천보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북장로교회 선교사인 밀러(Frederick S. Miller, 민노아)와의 만남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밀러 선교사는 1901년에 충청북도 지역의 선교 책임자로 임명받고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은 한국인 조사들의 도움을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청주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밀러는 김홍경이라는 전도인을 대동하고 청주지역을 방문하여 전도했다. 그러한 수고의 열매가 1904년에 비로소 맺게 되었다. 남문 밖에 초가 한 채를 마련해서 청주읍교회(현, 청주제일교회)를 설립했고, 1년 만에 50여 명의 신자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릴 만큼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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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회가 예배당을 마련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한 사람의 소원이 있었다. 임원배라고 하는 이가 개종해서 신앙인으로 살다가 별세하면서 예배당 마련을 위해서 100원을 유언으로 남긴 것을 계기로 새로운 예배당을 위한 건축헌금을 시작했고, 첫 예배당인 초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1,500평 부지를 마련했다. 그곳이 현재 이 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곳인데, 이곳은 청주 진영의 영장(領將)이 거처하는 관사와 감옥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 100석 규모의 예배당을 건축함으로써 그동안 뜻은 있었지만 할 수 없었던 큰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곧 선교부의 전략에 따라서 교회 설립과 동시에 학교, 병원을 함께 시작하는 것이었다. 인력과 재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모든 사업을 할 수는 없었지만, 청남학교를 먼저 시작했고, 예배당을 마련한 다음에는 여자학교인 청신학교(1907)를 시작했다. 그리고 병원을 운영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은 없었지만, 시약소(施藥所)를 설치하여 급한 대로 필요한 처방과 투약을 할 수 있는 시설을 운영했다. 


밀러 선교사는 청주읍교회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의 선교를 전개했다. 이 교회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교회를 세우고, 각 교회에는 학교를 세워 선교 정책에 부합하는 사역을 감당하게 했다. 그래서 청천교회는 청동학교를, 신대리교회는 청서학교를, 청주읍교회는 청남학교와 청신여학교를, 북망교회는 청북학교를 세웠다. 멀리 괴산에도 교회와 학교를 세웠는데, 괴산읍교회와 곽신여학교 등이다. 이렇게 남자학교 4개, 여자학교 2개를 세워 청주를 중심으로 하는 충청북도 지역의 복음화와 신교육과 의료사업을 선도하였다. 


청주에 제일 먼저 선교거점을 만들고 선교 현장을 이끈 밀러 선교사는 1892년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에 왔다. 하지만 그는 조선에서 가장 슬픈 일을 당했다. 아들 둘을 1899년과 1902년에 모두 잃었기 때문이다. 장남은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차남은 하루 만에 잃는 슬픔을 당했다. 하지만 그의 슬픔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슬픔을 넘어서는 고통이었다. 이듬해인 1903년에는 아내인 안나(Anna Reinecke Miller, 1864~1903)마저 복막염으로 잃어야 했다. 그녀는 별세하기 전까지 서울에서 정신여학당(연동여학교, 현 정신여고)에서 교육 선교사로 섬겼는데, 이렇게 거의 같은 시기에 가족을 잃고 밀러 선교사는 청주로 내려와 선교거점을 세우고, 충청북도 지역의 복음화를 위한 초석이 되었다.


청주읍교회는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면서 예배당이 비좁게 되었다. 따라서 1914년 200석 규모의 목조 예배당, 1939년 500석 규모의 고딕양식 2층 구조로 된 벽돌조 예배당을 마련했다. 현재도 이 교회의 예배당으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이때 지은 것이다. 다만 이 예배당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증축한 것으로, 외부에서 2층 예배당으로 바로 올라가는 계단을 설치했다.


그런데 현재 이 교회가 터를 잡은 이곳은 조선시대 이 지역 죄수들을 수용하고 있던 옥사(獄舍)가 있던 곳이다. 그렇다 보니, 신유사옥(1801), 기해사옥(1839), 병오사옥(1846), 병인사옥(1866) 등 조선 후기에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있을 때마다 이 감옥에는 수많은 천주교도가 투옥되었고, 또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무심천(無心川) 변에 자리하고 있는 이 교회 터가 본래 청주 감옥이었다는 사실은 이곳에서 수많은 천주교도가 투옥되고 처형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이곳에 서린 아픈 역사이다. 처형당한 천주교들의 잘린 머리, 팔다리, 몸이 방치되어 나뒹굴다가 비라도 내리면 그대로 무심천으로 씻겨내려 갔다. 하여 무심천이라는 천명(川名)은 보는 사람마다 그 느낌이 다르다. 이러한 내력 때문에, 청주제일교회 마당 끝, 시장통으로 나아가는 곳에는 천주교회에서 세운 순교자 기념비와 순교지 정원이 있다. 매우 이례적이고 특별한 공간이다. 모르긴 해도 청주제일교회에서만 만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아닐까 싶다.


그런가 하면 청주제일교회 마당 구석구석에는 여러 비석이 세워져 있음이 특별하다. 비석 한둘쯤이야 예사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청주제일교회에는 비석이 여럿이다. 관심을 가지고 그 비석들에 담긴 인물, 사건, 역사를 찾아본다면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기에 충분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천주교회가 세운 기념 공간을 비롯하여 이곳에는 청주지역 여성교육과 선교에 일생을 바친 로간 부인 기념비가 있다. 이 기념비는 1909년 조선에 와서 이곳으로 부임한 후 1919년까지 10년 동안 청주지역의 여성 교육을 위해 헌신하다가 별세한 로간을 기념하는 비이다. 이 교회의 여선교회 회원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충청북도 최초의 한글 기념비이다. 그밖에 충청북도 기독청년, 기독여성, 민주화운동요람, 창립백주년기념비 등의 비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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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크고 특별하고 낯선 비석도 하나 있다. 망선루(望仙樓) 터를 알리는 비석이다. 고려시대(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음) 누각인 망선루가 청주지역에서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인데, 그것을 1922년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헐어버리려고 하자 이 교회 청년 김태희가 중심이 되어 청주청년회가 망선루 보존 운동을 전개했고, 그것을 1923년 청주읍교회 경내로 옮겨온 것이다. 결코 간단하거나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역사적 건축물이자 청주지역의 대표적인 건물을 파괴하려는 일본에 저항하면서 교회 경내로 이축한 것이다. 망선루를 교회 경내로 옮긴 다음, 이 건물에서 청남학교, 청신여학교, 상당유치원 같은 교육시설로 사용하면서 민족과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근대교육의 장으로 사용했다. 이 망선루는 1999년까지 이곳에 있었는데, 보수관리가 필요해서 2000년 청주중앙공원으로 옮겨갔고, 그 자리에 망선루 터라는 표지석을 세운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청주제일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특별한 장소이다. 옥사 터 위에 예배당이 세워진 것이고, 또한 많은 천주교도가 처형당한 곳으로, 속죄와 영원한 소망을 증언하는 복음의 터전이 되고 있다는 의미를 더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말살시키려는 과정에서 파괴하고자 했던 망선루를 지켜낸 터라는 의미도 더해지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러나 끝내 마음과 시선을 멈추게 하는 것은 일제 말기에 건축된 붉은 벽돌 예배당의 외벽에는 민족의 아픔인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이곳도 전장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남은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어, 외관의 고풍스러움에 젖다가 이내 탄흔이 눈에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70년 전 민족의 아픔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이 교회의 예배당은 찾는 이들에게 발걸음을 멈춰 그 역사를 잊지 말라고, 그 역사를 치유하여 꼭 통일 공동체를 세우라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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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종전 · 장명근

글 이종전 

이종전 목사는 고베개혁파신학교(일본), 애쉬랜드신학대학원(미국)에서 수학하고, 1998년부터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역사신학을 가르쳤고, 현재는 은퇴하여 석좌교수와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인천 어진내교회를 담임하며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C채널 ‘성지가 좋다’ 국내 편에서 역사 탐방 해설을 진행하고 있다.


그림 장명근 

장명근 장로는 토목공학 학부(B.S.)를 마치고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환경공학(M.S & Ph.D)을 공부했다. 이후 20년간 수처리 전문 사업체를 경영하였으며 2013년부터는 삼양이앤알의 대표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정동제일교회의 장로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