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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마음의 명령에 뇌와 몸이 순종하기를

기독교 세계관의 마음-뇌-몸 관계

by 김경호2023-05-14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

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인간은 마음 안에 영혼을 지닌 지-정-의로 이루어진 존재다. 또한 인간은 뇌와 몸을 지닌 존재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의 궁금증은 마음, 뇌, 몸이 각각 어떤 역할을 하느냐이다.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이런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마음 안의 영혼을 전제로, 뇌와 몸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이 관계를 잘 설명한다. 영혼은 인간 삶의 원리이자 주체이고, 마음은 그 생명의 근원이다. 하지만 우리의 궁금증은 더 많은 설명을 요청한다. 마음은 사실 뇌의 기능이 아닌가? 마음이 뇌의 기능이라면 몸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분야에 노련한 작은 거인들이 있다. 이제 이 작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보자. 


원리: 마음속 영혼의 명령을 따르는 머리(지), 가슴(정), 손(의)    


파편화된 신앙, 파편화된 사람들. 데니스 홀링거Dennis P. Hollinger는 마음을 머리, 가슴, 손 ‘신앙’이라고 표현한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머리와 가슴과 손이 흥겹게 합주하는 악기처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파편화된 신앙, 파편화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생각이 깊은 그리스도인(머리 신앙)은 개인 경건을 얄팍한 감정이라고 비난한다. 감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인(가슴 신앙)은 역동적인 내면의 경험을 중시하며, 지식이나 이해 추구를 비난한다. 행동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인(손 신앙)은 경건을 믿음 있는 척하는 위선이라고 비난한다. 이 세 가지 신앙은 분리되고 한 가지 차원만 강조할 뿐, 나머지는 철저하게 무시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파편화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머리, 가슴, 손 신앙을 균형 있게 제시한다.


머리 신앙. 머리 신앙은 회심, 성장, 세상과의 관계에서 필수적이다. 머리는 회심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성의 변화 없이는 진정한 회심은 불가능하다. 머리는 그리스도인의 성장에도 중요하다. 성장의 핵심에 바로 사고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고란 “하나님에 대해” 아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어야 한다. 그러나 왜곡된 머리 신앙도 있다. 사고를 소홀히할 때 감정이 지배하는 신앙에 머물게 되고 이단을 낳기 쉽다. 또한 지성을 깎아내리게 될 때 세상에 개입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흑백논리로 세상을 보게 된다. 사고가 모든 것에 우선할 때도 머리 신앙은 냉랭한 죽은 정통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 하나님과의 관계의 생동감이나 자발성, 그분과의 임재 의식을 잃어버리기 쉽고, 자기기만에 빠지며, 결국에는 신앙을 포기하게 된다.


가슴 신앙. 가슴 신앙은 의지, 애정, 느낌, 이해, 이렇게 네 가지 차원의 형태를 띤다. 먼저 ‘의지’는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려는 내면의 결단이다. ‘애정’affection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내면의 성향이나 방향성이다. ‘느낌’feeling은 우리가 특정한 사건이나 사물, 사람이나 사상에 반응하며 경험하는 즐겁거나 고통스러운 감각이다. ‘이해’는 지식과 지혜의 개념과 연결된 지식을 적용하는 분별력이다. 그러나 왜곡된 가슴 신앙도 있다. 가슴을 소홀히 할 때, 성령의 임재와 능력의 부재가 나타난다. 또한 도덕적 성품이 결여하고, 결국 율법주의로 빠져들고 만다. 가슴이 모든 것에 우선할 때, 다시 말해 지나치게 내면 상태에만 집중하면 내면의 상태가 신앙을 지배하게 된다. 그러면, 가슴은 변덕이 죽 끓듯 하고, 왔다 갔다 한다. 또한 과도한 가슴 신앙은 이단에 빠질 소지가 있다. 


손 신앙. 손 신앙이란 몸을 통해 드러나는 구체화된 신앙이다. 기독교 영성은 몸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몸 안에서의 자유다. 이처럼 기독교에서는 몸이 중요하다. 창조는 물리 세계를 강력하게 지지한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몸의 부활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그러나 왜곡된 손 신앙도 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좋은 선물인 몸 자체도 잘못된 고유한 충동과 경향을 지닐 수 있다. 타락한 인간은 몸을 오용할 수 있다. 행동을 소홀히 여길 때, 기독교가 위선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력 또한 상실된다. 또한 행동이 최고가 될 때, 손 신앙은 자기만족에 빠지거나 자기 의가 되고 만다. 그 이후 행위에 치우친 신앙은 피상성과 맹목적 헌신으로 끝장난다. 결론은 “마음heart을 다하고 뜻soul을 다하고 힘strength을 다하여”(신 6:5) 머리와 가슴과 손이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원리를 따라 뇌와 몸에도 적용해 보자.

   

적용 1: 마음의 명령을 따르는 뇌  


캐롤라인 리프Caroline Leaf는 다음과 같이 마음-뇌의 관계를 잘 설명한다. 우리의 마음이 어떤 생각을 품느냐에 따라 우리의 뇌가 변화된다. 그렇다. 당신의 마음이 바로 그 변화의 스위치다. 이는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서 인간의 영혼의 좌소인 마음을 전제로 뇌가 작동하고 실천한다고 볼 수 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일상 용어가 사실로 밝혀진 셈이다. 마음은 뇌의 전제이고, 뇌는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즉 마음이 뇌에 물리 변화를 일으켜 마음의 명령을 따르게 한다. 과거에는 “마음(생각)은 두뇌 활동의 산물이다”라는 입장이었다면, 최근의 입장은 “두뇌는 마음의 명령을 따른다”는 입장이다. 리프는 이에 대한 근거를 설명한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이미 마음속에 담긴 무언가가 밖으로 표현되는 현상이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1)무의식 상태에서 어떤 정보를 분석하고 평가한다. 그리고 분석한 결과를 기반으로 결정을 내린다. (2)이후에 그렇게 결정한 내용(생각)을 마음에 저장한다. (3)이렇게 저장된 생각은 말과 행동으로 표현된다. 두뇌 활동은 뇌의 기계적인 작용이 아니라 무의식에 저장된 정보를 처리하여 생각으로 인식하는 과정이다. 즉 두뇌 활동은 무의식 상태에서의 지적 정보처리 과정이다.


좀 더 전문적으로 도식화해 보자. 그 매커니즘은 무의식적 메타인지 단계, 의식적 인지 단계, 상징적 결과물 단계로 나누어진다. (1)첫째, 무의식적 메타인지 단계는 무의식적으로 생각이 떠오르고 조직되는 현상이다. 이 단계에서 뇌는 하루 24시간 내내 쉬지 않고 활동한다. (2)둘째, 의식적 인지 단계에서는 초당 2천 가지 활동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의식적 인지 단계는 무의식적 메타인지 단계에 의해 통제받는다. (3)마지막 상징적 결과물 단계는 오감을 통해 자기 의사를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고, 외부 세계와 내면 세계(마음)를 연결한다. 이런 식으로 무의식적 메타인지-의식적 인지-오감(말과 행동)은 끊임없는 사이클로 반복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두뇌 활동은 무의식 상태에서 지적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이고, 의식 상태에서 그것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패턴은 황농문 박사의 책, 몰입에서 그 예를 잘 보여준다. 황농문 박사에 따르면, 몰입적 사고로 계속해서 문제를 반복해서 생각하면, 뇌가 그 문제가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고도로 활성화된 장기기억을 활용하게 된다. 즉 잠을 자면서도 주어진 문제를 푸는 것이다. 어느 순간 갑자기 생각이 떠오를 때, 본인은 그 생각이 우연히 떠올랐다고 보지만, 사실상 무의식의 상태에서 계속해서 뇌가 문제를 풀고 있던 것이다. 이런 떠오르는 경험은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수학자인 아르키메데스의 연구에서도 나타난다. 아르키메데스는 순전한 금관인지를 확인하고자 했으나 확인할 방법이 없었던 상황에서, 몇날을 고민하다가 어느 날 목욕탕에서 목욕하던 중 욕조에 들어가면 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고 갑자기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서로 다른 물질은 비록 무게가 같더라도 부피는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은이 섞인 가짜 금관은 같은 무게의 순금으로 만든 금관보다 부피가 클 것이며 따라서 금관을 욕조에 넣어서 차오르는 물의 양을 비교하면 금관에 은이 섞였는지 확인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것을 깨닫게 된 아르키메데스는 너무 기뻐서 옷을 입는 것도 잊은 채 목욕탕에서 뛰어나와 외쳤다. “유레카!” “부력의 원리를 알아냈다!” 이는 무의식(뇌)-의식-표현(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동일한 결과다.


적용 2: 마음의 명령을 따르는 몸 


사이먼 로버츠Simon Roberts뇌가 아니라 몸이다에서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몸의 지식에 대해 소개한다. 제목처럼, 로버츠에 따르면, 인간의 지적 능력이 뇌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 감, 감각, 직관 등과 같은 체화된 지식embodied knowledge을 지닌 몸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명제적 지식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영혼과 몸을 지닌 개혁주의 인간론에 따라, 마음을 전제로 뇌와 몸이 마음-뇌-몸의 순서로 작용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적용 1 “마음의 명령을 따르는 뇌”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의 마음이 어떤 생각을 품느냐에 따라 우리의 뇌와 몸이 변화된다는 성경적 전제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에 따라 몸도 마음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는 몸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다 나은 몸에 대한 사유가 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소유하고 있는가?” 여기서 말하는 소유란 “가진 사람”과 “가짐을 당한 물건” 사이에 일종의 “주종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스마트 폰을 가지고는 있지만 사용하지 못한다면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 스마트 폰을 소유했다고 볼 수 없다. 이런 경우를 “소유의 역전 현상” 즉 “나의 소유가 나를 침해한다”고 본다. 핵심은 가진 사람과 가짐을 당한 물건 사이의 주종관계다. 따라서 마음은 주인이고 소유된 몸은 종이어야 한다. 


이러한 주종관계라는 전제 안에서, 마음을 따르는 몸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 바로 생각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초보, 능숙, 숙련, 전문가의 네 가지 단계가 있다고 보자. 여기서 ‘초보’는 가장 간단한 단위로 쪼개 학습하는 수준이라면, ‘능숙’은 어떤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수준이고, ‘숙련’은 이성적 반응에서 본능적 반응으로 대처할 수 있고, 쪼개지 않고 전체적으로 대처하거나 관여할 수 있는 수준이며, 마지막 ‘전문가’는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반응, 즉 수행해야 하는 일에 덜 생각하고,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보다 하는 일 ‘속’에 있다고 느끼는 수준이다. 나는 이것을 주종관계가 분명한 “몸의 자동성”이라고 본다. 마음의 명령에 따라 뇌와 몸이 순종하는 것! 이것이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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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경호

김경호 목사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M.Div.) 논문 “세 가지 유형의 개혁주의 세계관 연구”로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연구단체 Worldview & Work를 설립하여 연구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20년부터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국내외에서 세계관 교육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