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국가의 분리
by Nicholas Needham2018-12-20

11세기의 서유럽은 책봉 갈등으로 인해 극심하게 흔들렸다. 왕들이 교황들에게 굴욕을 당하고, 교황들은 왕들에 의해 쫓겨나며, 군대들 간에는 전쟁이 일어나고, 교회 내부에는 불화가 생겼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 의하여 결국 새로운 유럽이 탄생했다.


신학적 논쟁은 갈등의 중심에서 요동쳤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봉건주의가 처음 발전하던 시기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서방에서는 5세기부터 시작된 로마 제국의 해체로 인해, 새로운 사회적 환경이 형성되었다. 이 환경에서는 돈이나 정치적 직위보다 땅을 소유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많은 땅을 소유해서 더 힘있는 자들은 힘없는 자들에게 땅을 하사했다. 그 결과 땅을 하사받은 자들은 상관들에게 개인적인 충성을 맹세했다. ‘하사하다’(grant)에 해당하는 라틴어는 ‘페우둠’(feudum)이며, 여기서는 ‘봉건주의’를 의미하는 영어 ‘퓨덜리즘’(feudalism)이 생겨났다. ‘땅과 충성’(land and loyalty)이라는 사슬의 가장 꼭대기에는 왕과 그의 귀족들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밑바닥에는 농민들이 있었다. 중간에는 중요성이 덜한 계층인 이류 귀족들과 지역 기사들이 있었다.

 

‘땅과 충성’이라는 이 사회적 구조는 교회에 변혁적인 영향을 미쳤다. 지역 땅 주인은 자신이 소유의 땅에 비용을 들여 지역 교회 또는 수도원을 지을 수 있었다. 교회의 땅과 부동산(예를 들어, 목사관)이 성직자에게 속하는 것은 오직 지역 영주의 하사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자연스럽게 영주는 지역 교회의 재산을 사제, 주교 또는 수도원장으로서 관리할 사람을 선택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봉건주의는 교회 구성원들이 성직자를 선택하고, 성직자와 사람들이 함께 주교를 선택하던 고대의 전통을 종식시켰다. 봉건 영주 가운데서도 최상위의 영주이지만 동시에 평신도였던 왕이 자신이 선택한 사람을 주교나 수도원장으로 임명하거나 서임할 때, 이를 ‘평신도 서임권’이라 불렀다. 이 책봉식은 왕이 주교나 수도원장에게 영적 직분의 상징인 자신의 반지와 지팡이를 수여하는 의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때 주교나 수도원장은 자신의 영주가 된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봉건화 된 교회에 대해 모두가 기뻐한 것은 아니었다. 11세기 중엽에, 교황권은 오랫동안의 비참한 부패와 무능의 시대 이후에 그 고결함과 권력을 다시 회복하기 시작했다. 일련의 개혁적인 교황들은 교회 내에서 강한 세력의 지지를 받아 교황의 법정을 다시 한번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 개혁을 주도적으로 추진한 천재는 힐데브란트(Hildebrand)라는 이름으로 비천하게 태어난 투스카니 지방의 사람이었다. 그는 개혁적인 교황들 아래에서 신임을 받으면서 다양한 직위를 매우 탁월하게 수행한 후에, 1073년에 대중적인 환호를 받으며 교황의 자리에 선임되었다. 힐데브란트는 그 후 그레고리 7세(Gregory VII)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가 배후에서 지휘한 개혁 운동은 힐데브란트의 개혁 또는 그레고리의 개혁으로 알려져 있다.


힐데브란트는 삶을 전투적인 견지에서 보았다. 즉, 삶을 빛과 어둠 사이의 맹렬한 싸움으로 보았다. 어둠의 주요 대리인들은 세속의 통치자인 백작들, 공작들, 왕자들, 그리고 왕들이었다. 그들은 단지 미화된 흉악범들, 즉 가난한 사람들을 압제하고 이 땅을 불의로 가득 채운 자들에 불과했다.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빛의 대리인들, 즉 교황권의 지휘를 받는 교회가 이 악한 통치자들을 통제해서 하나님의 대의를 섬기도록 만들어야 한다.


왕권에 대한 힐데브란트의 부정적인 견해는 초기 중세의 전통을 깊고 철저하게 끊어 버렸다. 초기 중세의 전통에서는 기독교적 가치에 기초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크리스천 왕권에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힐데브란트의 생각으로는 그런 왕권이 아닌 교황권 자체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기 위한 대리인이었다.


힐데브란트는 교황으로서, 봉건주의가 세속 통치자들에게 교회를 다스리도록 부여한 권력을 파괴하기로 결심했다. 힐데브란트가 그 결심을 실행할 날짜로 선택한 시점은 평신도 서임권을 시행하는 날이었다. 그는 특히 왕이 주교나 수도원장에게 자신의 반지와 지팡이를 수여하는 의식을 반대했다. 이런 의식은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이 그들의 영적 권위를 왕에게 빚지고 있음을 의미했고, 서방의 왕들 역시 실제로 그렇게 믿었다.

 

힐데브란트는 1075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헨리 4세(Henry IV, 1065-1105)가 평신도 서임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당시 헨리 4세가 서방 군주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를 몰아붙였다(헨리 4세의 영토는 기본적으로 독일이었다). 힐데브란트는 만약 자신이 헨리를 굴복시킬 수 있다면, 어느 누구도 다 굴복시킬 수 있음을 알았다.


힐데브란트가 자신의 도전을 천명했을 때, 독일의 주교들이 처음에는 황제를 지지했다. 그들은 황제를 기독교 사회의 중심으로 보는 전통을 따랐다. 이에 자신감이 생긴 헨리는 1076년에 보름스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여기서 헨리의 주교들 대다수는 힐데브란트를 배격하면서 황제 편에 섰다. 헨리는 공의회를 통해 힐데브란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무서운 편지를 보냈다.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된 나 헨리는 나의 모든 주교들과 함께 당신에게 고하노니, 교황의 자리에서 속히 내려와서, 만고에 저주를 받을지어다!”


힐데브란트의 반응은 마치 번개와 같았다. 그는 헨리를 파문하고, 모든 백성들을 헨리에 대한 봉건적인 충성, 맹세로부터 해방시켰다. 독일의 주교들은 숨이 멎을 정도로 놀랐다. 그래서 이제 그들은 자신의 자리를 잃지 않으려는 두려운 마음으로 헨리에게 더 이상의 협조를 거부했다. 헨리는 교회의 땅에서 소집된 자신의 군대 가운데 3분의 2를 단번에 상실하고 말았다. 헨리의 호전적인 독일 귀족들 역시 반역할 수 있는 이 기회를 잡았다. 그들은 힐데브란트를 또 다른 공의회에 초청했고, 반역에 가담한 귀족들은 그 공의회에서 새로운 황제를 선택하고자 했다. 그리고 힐데브란트가 그 선택을 주관했다.


헨리는 궁지에 몰렸다. 그래서 소수의 충성스러운 지지자들과 함께, 힐데브란트를 알현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카놋사 성으로 직접 찾아갔다. 실상 힐데브란트는 헨리가 군대를 동원해 자신을 공격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에, 투스카니 지방의 부유한 친구인 백작 부인의 보호를 받으면서 카놋사 성에서 피신하고 있었다. 헨리는 1077년 1월에 사흘 동안이나 성문 밖에 서서 자신이 회개했음을 힐데브란트에게 울부짖으며 말하면서 눈밭에 맨발로 서 있었다. 성 안에서는, 클루니의 수도원장인 위그(Hugh the Great)가 헨리의 회개를 받아달라고 힐데브란트에게 중재했다.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던 위그는 힐데브란트처럼 평신도 서임권에 반대했지만, 교회와 국가 사이의 친밀한 공조를 원하는 중도적인 인물이었다.

 

교황은 사흘 동안 주저했지만, 마침내 헨리를 성 안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했다. 황제는 울면서 평신도 서임권을 중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힐데브란트는 헨리를 다시 교회로 받아들였다. 한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국가에 대한 교회의 승리를 보여 주는 궁극적인 사례다. 서방 세계의 최고 통치권자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교황의 발아래에 엎드렸다.


힐데브란트가 용서함으로 인해, 독일에서 헨리의 권세는 다시 회복되었고, 교회의 땅에서 소집된 군대가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내전이 발발하고 말았다. 귀족들 가운데 헨리의 대적들이 슈바벤의 루돌프(Rudolf of Swabia)를 황제로 선택했다. 헨리와 루돌프는 각각 힐데브란트에게 지지를 구했다. 힐데브란트는 전쟁이 지속되는 3년 동안 누구를 지지해야 할지 두 황제 사이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마침내 1080년 3월에, 헨리는 힐데브란트에게 루돌프를 파문하라고 고압적인 자세로 집요하게 요구했고, 이에 화가 난 힐데브란트는 오히려 루돌프 편에 서기로 결심했다. 이로 인하여 헨리는 또 다시 파문을 당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독일의 주교들이 헨리에 대한 충성을 지켰다. 그들은 루돌프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헨리를 독일의 안정을 위한 유일한 희망으로 보았다. 헨리는 6월에 공의회를 소집해서 힐데브란트를 교황 직에서 폐위했다. 그는 10월에 내전에서 승리했고, 루돌프는 전투 도중 죽임을 당했다. 승리에 도취한 황제는 이탈리아를 침공했고, 1084년에 로마를 점령했다. 여기에서 그는 라벤나의 대주교를 교황에 올려, 교황 클레멘트 3세(Pope Clement III)라고 칭했다. 이에 대한 답례로 클레멘트는 헨리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 주었다. 힐데브란트는 이탈리아 남부 살레르노로 망명을 떠났으며, 1085년에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죽어가면서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다. 이로 인해 나는 망명지에서 죽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한동안, 두 명의 라이벌 교황이 공존했다. 한 사람은 헨리가 세운 로마에 있던 교황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힐데브란트의 이상을 지지했던 개혁자들이 망명지에서 선택한 교황 우르반 2세(Pope Urban II, 1088-1099)였다. 우르반은 마침내 자신의 교회 라이벌을 내쫓았다.

 

서임권 갈등은 줄어들지 않고 계속되었다. 우르반의 후임 파스칼 2세(Pope Paschal, 1099-1118)는 교회를 국가로부터 독립시키는 데 혼신을 다한 인물이었다. 1110년에 그는 새 황제 헨리 5세(Henry V)에게 깜짝 놀랄 만한 제안을 했다. 만약 헨리가 주교들을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서임하는 모든 허례허식을 포기한다면, 파스칼은 독일에 있는 교회의 모든 재산을 황제에게 양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주교들은 청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이 제안은 독일의 주교들 대다수가 좋아하지 않았으며, 파스칼은 그것을 철회해야 했다. 그러나 서임권의 영적 측면과 세속적 측면을 나눈 파스칼의 구분은 1122년에 이루어진 논쟁의 해결에 대한 열쇠를 제공했다. 그 해 보름스에서, 교황 칼릭스투스 2세(Pope Calixtus II)와 헨리 5세는 두 가지 사항에 동의했다.

 

1. 황제는 자신의 직위에 포함되어 있는 땅에 대한 권위로서 주교 또는 수도원장을 서임할 것이다.

 

2. 주교의 영적인 상관인 그의 대주교가 교회에 대한 자신의 영적인 권위로서 해당 주교를 서임할 것이며, 이때 황제는 더 이상 반지와 지팡이를 수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타협은 힐데브란트에게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봉건주의 아래에서 누리던 지위보다 훨씬 더 독립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을 교회에 보장해 주었다. 이는 또한 주교들이 그들의 영적인 직분을 왕에게 빚지고 있다는 사상에 일격을 가한 사건이었다.

 

서임권 갈등은 우리에게 교회와 국가의 적절한 경계를 주의 깊게 구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그런 구분을 짓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동반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교회의 독립을 강하게 추구했던 중세시대의 교황들은 칭찬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 종종 국가를 통제하려고 시도하며 신정의 극단으로 치우쳤다. 이처럼 어떻게 하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막 12:17) 바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실천하는 일에는 심오한 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바로 그 지혜를 주시기 바란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번역: 김장복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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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Nicholas Needham

니콜라스 니드햄은 University of Edinburgh에서 학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코틀랜드 인버네스에 위치한 Inverness Reformed Baptist Church의 목사이다. 그는 스코트랜드 Dingwall에 있는 Highland Theological College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는 교수이며, '2,000 Years of Christ’s Power'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