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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공동체가’ 전도한다는 것

심플리 미셔널 | Simply Missional

by 김선일2023-03-20

교회가 전하는 진리의 복음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실한 제자들의 공동체 위에서 온전하고 굳건하게 전파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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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리 미셔널

Simply Missional


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폭발적 관심을 끌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는 그리스도인 시청자라면 더 불편하게 보았을 캐릭터가 있다. 중견 교회 목사의 딸로 성경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게 분명한 ‘이사라’이다. 악랄한 학폭 가해자 중 하나이고 마약에 찌들어 사는 화가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천연덕스럽게 교회에서 성가대원으로 서고, 성경을 곧잘 인용하며, 피해자에게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경고한다. 그의 어머니는 마약을 한 남녀가 뒤엉켜있는 자리에 무슨 조직의 보스인 양 아주 익숙하고 태연하게 경호원들을 데리고 등장하여 잠든 딸을 깨우며 현장을 수습한다. 목사 아버지가 그 딸을 윽박지르는 이유는 딸의 학폭과 마약중독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자신의 위신을 추락시켰기 때문일 뿐이다. 그 또한 탈세 혐의자다. 다소 과도한 설정으로 보이기도 하고,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담은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드라마가 묘사하고 있는 기독교의 메시지와 그 삶의 괴리를 뼈아프게 되새겨 보아야 한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몇몇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소위 ‘교회를 대표하는 이들’(목사와 사모,  그 주변인들)이 함께 보여주는 삶의 행태다. 그것은 교회가 ‘전하는’ 복음과 교회의 ‘공동체적 삶의 양식’ 사이의 간극이다. 이러한 불일치, 부조화, 부조리가 복음을 공허한 ‘좋은 소식’으로 전락시킨다. 


필자는 오늘날의 전도는 개인 중심에서 공동체 중심으로 이동한다고 자주 말한다. 그러면 ‘공동체가’ 전도한다는 것에 대해서 회의와 난색을 표명하는 이들이 있다. 집회 전도나 노방전도에서 탁월한 메신저나 신실한 개인이 복음을 제시하는 형태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물론 전도에서 복음을 나누고 설명하는 중요한 가교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개인이다. 그렇지만 그 복음의 내용을 삶의 경험으로 확증하고 생생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공동체이다. 기독교 공동체가 추구하는 삶의 양식은 복음의 언어를 습득하게 하는 통로다. 모든 언어는 그 언어가 쓰이는 문화를 경험함으로써 가장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습득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는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종교나 사상이 없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또한 그의 가르침과 성품으로 빚어지는 특유한(peculiar) 공동체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 죄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 서로에 대하여, 타인에 대하여 어떠한 관용과 환대의 삶을 사는지가 속죄의 언어를 깨닫는 중요한 경험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관계가 없는 이들이 어떻게 하나를 이루며 서로를 돌보는지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사랑을 맛보는 계기가 된다. 자기의 권리와 욕구보다 다른 이들을 섬기는 데 진심 어린 신자의 모습이 자기를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 이러한 실천을 하는 개인도 본보기가 되고 소중하지만, 더욱 근본적인 과제는 공동의 실천과 습관으로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의 서신서들이 교회 안에서의 사랑과 용서와 친교를 반복해서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다.


오늘날은 개인의 정체성과 선택, 취향과 자유가 최우선의 가치로 떠오르고 있다. 이에 부응하여 관계와 공동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바뀐다. 혈연, 지연, 학연으로 대표되는 끈끈한 연줄의 관계가 관심과 취향에 따라 모이는 느슨한 연대로 대체되고 있다. 개인주의가 심화하고 있지만, 본래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관계와 공동체를 갈망한다. 그래서 SNS나 소셜 앱을 통해 소모임과 커뮤니티들이 번창한다. 단지 관계와 모임의 문법이 변화할 뿐이다. 자신의 관심과 취향을 밝힌 소모임을 만들면 비슷한 관심사를 지닌 사람들이 모여드는 방식이다. 언제든지 들어가고, 언제든지 나올 수 있어야 한다. 자율성과 취향이 가장 존중되어야 할 모임의 기준이다. 관계와 공동체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본질적이지만, 그러한 욕구를 경험하고 표현하는 방식은 변화한다. 코로나 이후 교회들도 소그룹과 같은 공동체적 모임의 필요성을 더욱 실감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위에서부터 구역이나 소그룹을 구성하고 획일적인 의제를 던졌던 교회들이 이처럼 개인의 관심과 취향에 부합하는 관계와 공동체의 문법을 담아낼 수 있느냐는 새로운 도전이 될 것이다(참고: “코로나 이후, 새로운 공동체를 준비하라”). 


공동체의 형식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핵심 가치이다. 공동체의 형식에 있어서 교회는 현대인들의 변화된 관계 문법인 자율성과 수평성을 최대한 이해하고 그에 적응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공동체의 핵심 가치를 기반으로 형성되는 그 공동체의 문화와 습관은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세속주의와는 분명히 차별되어야 한다. 심지어, 오늘날의 세속적 윤리에서도 비판하는 위계주의, 학벌주의, 배타주의와는 더더욱 거리를 두어야 한다. 필자는 그리스도인 청년 공동체로 인도되어 처음 신앙을 갖게 된 청년의 고백을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여러 사정으로 또래들과는 달리 정규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었고 경제적으로도 취약했다. 그런데 이 공동체를 소개받았고, 이들이 표방하는 기독교 정신을 기반으로 한 사회, 문화적 가치에 매료되어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또래 청년들은 다들 대학을 졸업하고 자기 전공에 따른 경력을 쌓아가고 있었지만, 이 청년은 함께 어울릴만한 학력과 경험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 공동체는 이 청년을 동등한 일원으로 받아주었고, 그에게 대학 진학에 필요한 무료 과외도 돌아가면서 제공해주었다. 이 청년은 자신을 적극적으로 환대하고 자신이 제기하는 신앙에 대한 의문에도 포용적이고 개방적으로 대화해주는 공동체에 깊은 고마움을 표했다. 


포용성과 개방성만이 기독교 공동체를 대표하는 가치는 아니며, 인간을 온전한 회심에 이르게 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위의 공동체는 시대에 부합하는 매력적인 특성을 지녔음에도 그리스도를 오롯이 신뢰하는 교회로 발전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자신을 내어주신 그분의 사역과 가르침을 중심으로, 또한 그의 본을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상호 섬김의 공동체를 이루는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대속 사역으로부터 환대와 용서와 사랑과 존중이 생성되어야 한다. 오늘날 관계와 공동체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는 자율적인 취향과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가치를 기반으로 한다. 과연 그와 같은 기초 위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고유한 관계에 대한 필요와 진정한 공동체적 소속 열망이 해소될 수 있을까? 교회가 보여주어야 할 것은 자기 부인의 영성과 타인에 대한 환대와 섬김을 실천하는 공동체다.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견고하게 뿌리 내리며, 그의 가르침과 삶을 기억하고 재연하며 살아내는 공동체다. 이러한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야말로 관계를 갈망하지만 관계를 지속하기에는 너무도 취약한 문화에서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유력한 방식일 것이다.


그러한 공동체적 삶은 교회가 전하는 복음의 진리에 따른 결과나 부산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디모데전서 3:15에서 바울은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라고 선언한다. 이 구절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순서다. 진리가 교회의 기둥과 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인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것이다. 진리의 기반 위에 교회가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기반 위에 진리가 서 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전하는 진리의 복음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실한 제자들의 공동체 위에서 온전하고 굳건하게 전파될 수 있다.        


공동체가 전도한다는 것은 공동으로 전도를 위한 행사나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각자의 은사에 따라 협력하는 것도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보다 더욱 근본적인 공동체적 전도는 기독교 공동체의 고유한 존재 양식과 공동의 습관으로부터 나온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어떻게 이루느냐가 곧 우리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전하는 증거가 된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평소에 그리스도인들과 기독교 공동체를 접하면서 점진적으로 교회의 일원이 되곤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존 사회적 자본, 곧 인간관계보다 더욱 강력하고 따뜻하고 매력적인 사회적 자본을 제공하는 기독교 공동체에 끌린 것이다. 기독교의 공동체가 함께 추구하고 실천하는 삶은 믿지 않는 이들의 삶과 질적으로 차이가 있을 때 초월적인 복음의 메시지와 조화를 이룰 것이다.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전도의 어려움은 바로 이처럼 차별화된 공동체를 경험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조사에 의하면, 그리스도인 청년들의 개인 윤리적 생활에서 비그리스도인 청년들과 거의 차이가 없다. 양극화된 사회에서 정치적 적대성과 편향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목회자와 교인들에게서 복음으로 인한 화해와 환대를 경험하기란 만무하다. 환경 문제에 대한 아무런 고민 없이 쓰레기를 양산하는 교회의 행사와 모임에서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책임 있는 감수성을 발견할 수 없다. 문제는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아니라, 그 복음의 내용이 가리키는 삶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복음전도 방법의 부재가 아니라, 복음의 실체를 경험하고 표현하는 공동체의 부재가 문제이다. 


초기 기독교는 박해와 위협 가운데서도 실질적인 전도를 이루었고 교회는 성장했다. 공개적인 전도가 금지된 상황에서 초기 기독교는 그들의 대조적인 생활방식으로 복음을 전했다. 2세기의 기독교 철학자 아리스티데스는 당시 황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기독교 공동체의 삶을 이렇게 전한다.


오 왕이시여,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두루 찾다가 발견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책들에서 배운 것처럼, 그들은 열방의 어느 백성들보다 진리와 진정한 지식에 더 가까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알고 신뢰합니다. 그분 안에서, 그분으로부터 만물이 존재하며 그분에 비견될 그 어떤 신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분으로부터 계명을 받아 도래하는 세상에 대한 희망과 기대 안에서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간통과 음란한 행동을 하지 않고, 거짓 증언을 하지 않으며, 맡겨진 재물을 사취하지 않습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탐내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며, 이웃에게 친절을 다합니다. 사람의 형상으로 만든 우상들에게 기도하지 않으며, 남들이 자신에게 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은 남에게 행하지 않으려 합니다. 자기를 멸시하는 사람을 설득하여 친구로 삼으며, 원수들에게는 선을 행합니다. 오 왕이시여, 그들의 여성들은 처녀와 같이 순결하며 그들의 딸들은 단정합니다. 그들의 남성들은 모든 불법적인 연합이나 불결함을 멀리하며 다가오는 다른 세계에서의 보상을 희망합니다. 더욱이,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으며, 노예들에게도 차별 없이 그들을 향한 사랑 안에서 형제라 부르며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권면합니다. 그들은 이상한 우상을 숭배하지 않으며, 어디에서나 겸손과 친절을 다합니다. 과부들을 멸시하지 않으며, 고아들을 그 학대하는 자들로부터 풀어줍니다.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사람에게 우쭐거림 없이 내어주고, 나그네를 보면 자기네 집으로 맞아들여 친형제처럼 반깁니다. 그들은 육체를 따라 형제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하나님 안에서 형제라 부릅니다. 그들 가운데 어느 가난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각 사람이 능력에 따라 조의를 표하며 정성껏 장례를 치러줍니다. 그들 중 누군가가 구세주의 이름 때문에 투옥되거나 곤란을 겪으면, 모두가 그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여 가능하면 그를 옥에서 나오게 합니다. 그들 속에 가난한 사람이나 궁핍한 사람이 있다면, 이삼일 동안 단식을 해서라도 궁핍한 사람의 필요한 양식을 마련해 줍니다. 그들의 주님이신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그리스도의 계명들을 신중하고 정의로우며 진중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 오 왕이시여,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법이 담긴 계명이며,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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