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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용서’가 사라졌다

팀 켈러의 ‘용서를 배우다’에 나타난 문화 내러티브

by 고상섭2023-02-23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버리면 사회는 도덕주의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심해진다. 어설픈 정의감은 그대로인데 용서를 주고받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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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더 글로리’가 인기리에 시즌 1을 마감했다. 학교폭력을 다룬 이 드라마의 중심 테마는 복수이다. 많은 사람이 복수에 열광하는 데는 정의가 바르게 집행되지 못하는 답답한 사회 현실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지만, 현대 문화의 한 형태를 고스란히 보여주기도 한다. 


팀 켈러도 용서를 배우다에서 용서하지 않는 오늘날 미국의 문화현상에 대해 언급한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에서 살해당한 흑인 아홉 명의 유족들이 저격범인 딜런 루프에게 “당신을 용서합니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하자, 이를 두고 다양한 여론이 형성된 적이 있었다. 그중에는 “미국 흑인은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를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끊임없는 용서는 공격과 학대를 지속시킬 뿐이라는 논리였다. 


여성 성폭력 피해자를 돕고자 시작된 ‘미투’ 운동도 많은 긍정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용서보다는 정의를 강조하고 있으며, 학교폭력 이슈도 가해자의 처벌에만 집중되어 있다. 물론, 무조건적 용서가 기독교의 가르침은 아니다. 가해자에 대한 정의의 실현이 없는 피해자의 무조건적 용서는 성경에 기초한 용서라기보다는 본회퍼가 말한 ‘값싼 은혜’에 가까울 것이다. 


또 거래적으로 용서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 강조점은 가해자가 용서받을 자격을 갖추는 데 있고, 가해자의 충분한 회개와 배상 행위로 용서를 얻어 낼 때까지는 분노를 버리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은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는 모델과 거래적 용서, 그리고 값싼 용서라는 세 가지 정도의 반응이 나타난다. 


심리치료 문화 내러티브 


용서에 대한 이러한 세 가지 신념―값싼 은혜, 인색한 은혜, 은혜 없음―의 배후에는 어떤 문화 내러티브가 존재한다. 첫 번째는 심각할 정도로 개인의 내면에 치우친 문화이다. 이전 시대에는 공동체를 개인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개인이 공동선에 부합하도록 자신을 조정하던 문화가 지배했다. 반면 모더니즘은 자기 내면을 통해 각자의 갈망을 바탕으로 정체성을 형성한 뒤 밖으로 나가 사회를 향해 개인의 이익을 존중하라고 요구했다. 오늘날 현대 심리치료는 일정한 기준을 내세워 공동체나 외부의 영향에 맞서 개인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 임무이다. 


프로이트로부터 영향을 받은 이 신념은 결국 진정한 개성이란 자신이 선택하거나 만들어 내지 않은 일체의 규범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심리치료 문화의 강조점은 개인이 공동체의 전통과 의무와 책임이라는 속박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만의 동경과 갈망을 추구하는 데 있다. 


오늘날 심리치료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을 해결할 때 용서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힘든 상황에서 억지로 용서하는 것은 무거운 짐을 더 지워주는 것이라 여긴다. 심리치료의 핵심은 환자를 지원하는 것이지 용서에 대한 도덕적 부담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다. 용서를 강요하는 것은 원치 않는 관계 속으로 도로 떠미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이런 현대 심리치료 모델은 용서를 정서적 폭력처럼 강요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모델이 적용된 사례는 다양하다. 개인의 마음과 정서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피로사회의 저자인 한병철 교수는 또 다른 책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오늘날 문화를 상처를 거부하는 문화, 즉 “매끄러움을 추구하는” 문화라고 꼬집는다. 


한 교수는 특히 현대 미술의 거장인 제프 쿤스의 ‘풍선 개’(Ballon Dog)를 통해 매끄러움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문화를 분석한다. “제프 쿤스의 조형물처럼 우리는 왜 매끄러움을 아름답다고 느끼는가? 이것은 미적 차원을 넘어 하나의 사회현상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긍정사회를 체현하는 것이다. 매끄러운 것은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어떤 저항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좋아요’를 추구한다. 매끄러운 대상은 자신의 반대자를 제거한다. … 제프 쿤스의 작품은 관찰자가 그저 ‘와!’라고 내뱉기만 바랄 뿐이다. 그의 예술 앞에서는 어떤 판단도, 해석도, 해석학도, 성찰도, 사고도 필요하지 않다. … 관찰자를 포옹하라, 관찰자에게 충격을 주거나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된다”(아름다움의 구원, 13).


자기감정의 평온함에만 초점이 맞추어진 사회는 어려움을 극복하거나 사람을 용서하는 단계로 나아가지 않는다. 특히 오늘날 같은 소셜미디어의 세상에서는 소통이 되지 않을 때 관계를 단절하고 친구를 끊어버리는 것이 일상이 되어 있다. 심리치료의 문화 내러티브는 결국 자기중심성을 강화하고 타인과의 관계성을 더욱 약화한다.


심리분석가 셰리 터클은 대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에서 오늘날 사람들이 ‘가상공간이라는 피난처’에 도피하면서 대화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공감 능력이 사라지며 더욱 자기중심성에 매몰된다고 말한다. 진정한 대화의 핵심은 경청인데, 가상공간은 결국 진정한 소통과 용서의 개념이 사라지는 공간이 된다. “페이스북에 ‘싫어요’가 없음을 상기시킨다. 긍정적 반응을 원하는 만큼 충분히 못 얻을 경우 실망감이 따르면서 갈수록 재미있는 것을 올리는 성향이 강해진다”(대화를 잃어버린 사람들, 64). 이런 자기중심적 감정관리에 몰두하는 문화 내러티브 속에서 “용서의 문화는 지옥에나 가라!”라고 외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새로운 ‘수치와 명예’의 문화 내러티브 


팀 켈러는 용서의 실천이 빈곤해진 또 다른 이유에 대해 새롭게 뒤바뀐 ‘수치와 명예’ 문화 내러티브라고 분석한다. ‘새롭게 뒤바뀐’이라는 한 것은 고대사회에 있었던 ‘수치와 명예’ 문화가 다른 형태로 현대에 등장했다는 말이다. 고대사회는 ‘수치와 명예’ 문화에 기초했다. 인간의 평등한 존엄성이 아니라 명예와 사회적 지위가 더 중요하게 생각되던 시대였다. 이런 문화 안에서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면 복수가 절대적으로 필수였다. 보복하지 않는 사람은 존중받을 자격이 없었다. 그런 문화 안에서는 정의와 사랑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복수를 통해 ‘충분한 명예’를 되찾을 피해자의 권리가 먼저였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수치와 명예의 문화를 거부한다.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거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잠 20:3).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고대의 ‘수치와 명예’의 문화 안에서는 재빨리 다른 사람을 공격해서 자신의 명예를 되찾는 것이 중요했지만, 성경은 그런 사람을 내면이 공허하고 불안해서 자기밖에 모르다가 화를 자초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자기변호에 빠른 사람일수록 강한 사람이 아니라 나약한 사람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고대의 수치와 명예 문화와는 다른 ‘새로운’ 수치와 명예 문화는 어떤 것인가? 팀 켈러는 서구 문화도 본래 다른 사회와 마찬가지로 수치와 명예 문화가 강했는데 시간이 흘러 개인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존엄성’의 문화로 변모했다가 다시 새로운 수치와 명예 문화가 출현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고대의 수치와 명예 문화에서는 자신이나 가족의 명예가 공격받을 때 힘 있고 강한 사람들이 그 명예를 찾아오는 것이 선호되었다면, 오늘날은 심리치료 문화에서 본 것처럼 개인이 사회의 기대와 역할과 구조에 억압받고 지배당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사회나 다른 권력자에게 종속해 있는 피해자일수록 더 큰 명예와 도덕적 품성을 부여받는다. 기존의 사회 위계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명예가 더 커질 수 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피해를 떠받드는 수치와 명예의 문화’이다. 


이렇게 뒤바뀐 수치와 명예 문화는 일정의 “배척문화”(cancer culture)로 힘 대신 허약함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지극히 사소한 문제로도 늘 선악으로 대치하는 사회를 낳고, 사람들은 피해자의 지위 또는 피해자를 옹호하는 지위를 얻고자 경쟁하기도 한다. 


이 문화는 사랑으로 허물을 덮어주는 역량을 위축시킬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용서와 화해의 개념 자체를 말살해 버린다. 이제 용서는 완전히 불공정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사람들이 피해자를 두둔하려 해도 피해자가 용서해 버리면 명예와 덕성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화에서는 망가져서 이미 회복 불능인 관계가 부지기수로 널려 있다. … 이제는 다른 사람의 실수조차 무조건 이단자의 악으로 간주된다(용서를 배우다, 70).


새로운 수치와 명예 문화는 이제는 새로운 신흥 세속종교가 되었지만, 이 종교 안에서는 구원이나 용서를 받을 방도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팀 켈러는 앨런 제이콥스의 말을 인용하며 새로운 수치와 명예 문화를 강하게 비판한다. 


우리 시대의 특히 심각한 도덕적 위기는 많은 동료 그리스도인이 생각하는 성적 방종이 아니라 복수심이다. SNS는 도덕주의자에게 마약과도 같다. 악인을 벌하는 것만큼 짜릿한 쾌감은 없다. 그러나 모든 중독처럼 여기에도 냉혹한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타격을 가한다. 그래서 남을 벌하려는 광기는 가라앉을 새가 없이 오히려 악화된다”(용서를 배우다, 71).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는 기독교적 관점을 버리고 사회가 점점 세속화가 되어 가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버리면 사회는 도덕주의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심해진다. 어설픈 정의감은 그대로인데 용서를 주고받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그에서 복귀한 야구선수가 학교폭력을 언급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또 과거 학교폭력의 가해자로 지목을 받은 배구선수를 팀에서 퇴출하라는 요구가 빗발쳤고. 결국 그 선수들은 한국에서는 선수 생활을 할 수 없어서 외국으로 나가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끊임없이 가해자를 퇴출해야 한다는 압력이 커지고 있다. 물론 가해자에 대한 정의는 바로 서야 한다. 그러나 사건 자체의 잘잘못보다는 이런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오늘날의 문화 내러티브는 건강한 용서와 사랑이 균형을 이루기보다는 강한 처벌과 응징, 복수에 가까운 말들이 난무하는 것 같다. 오늘날 우리는 왜 용서가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가? 또한 무조건 용서하는 것이 기독교적 용서인가? 문화 내러티브의 거대한 파도 속에서 우리는 휩쓸리지 않으면서도 바른 성경적 용서와 대인관계의 원리들을 배워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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