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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기관이 성적 부도덕을 받아들이는 3단계
by Joe Carter2023-02-18

성에 대한 정통 기독교의 관점을 거부하는 모든 기독교 기관은 가장 먼저 젠더에 대한 평등주의 관점부터 수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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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뉴스 서비스(Religion News Service)에 따르면 이스턴 대학교(Eastern University)는 기독교대학협의회(Council for Christian Colleges and Universities, CCCU)에 속한 학교 중에서 성소수자(LGBT+) 교수진 채용을 허용하고 비차별 선언문에 성적 취향에 관한 정책을 수정한 최초의 비 메노파(non-Mennonite) 기독교 학교가 되었다. 이에 대해 CCCU는 이스턴 대학의 회원 자격을 “중지”하고 온라인 목록에서 학교 이름을 지웠다. 


이 대학의 역사를 살펴볼 때, 이런 정책의 변화가 크게 놀라운 건 아니다. 이스턴 대학교는 신학적으로 자유주의 역사를 가진 주류 교단, 미국 침례교(American Baptist Churches USA)에 소속되어 있다. 학교는 이전에도 LGBT+ 학생을 공개적으로 환영했으며 학생 주도 클럽이 LGBT+ 학생을 옹호하도록 허용했다. 자유주의 주류 개신교 학교가 정통 기독교를 버리고 성적 부도덕에 대한 이단적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그런 변화가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지에 관해서 질문해야 한다. 이스턴 대학교는 1925년에 성경과 “신앙의 근본” 수용을 기치를 내세우며, 말 그대로 보수 신학을 지지하는 기관으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채 백 년이 안 되어 기독교 역사와 함께해온 기독교 정통을 저버렸다. 도대체 무엇이 그런 변화를 가져온 걸까? 


정통에서 이단으로 가는 방식이 어디나 다 똑같다고 암시하는 것은 주제넘은 주장일 수 있다. 그러나 다음 세 단계가 반드시 포함되는, 일종의 반복되는 패턴이 있는 것 같다. 


1. 평등주의라는 문을 통해서 시작한다.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최소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주장부터 시작하자. 현재 성에 대한 정통 기독교의 관점을 거부하는 모든 기독교 기관은 가장 먼저 젠더에 대한 평등주의(egalitarian) 관점부터 수용한다.


이런 지적이 불공평해 보일 수도 있다. 평등주의는 이차 문제에 불과하다며,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정통 그리스도인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평등주의는 의미심장한 경계선을 만든다. 그리스도인을 갈라놓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 목사의 문제도 세례 방식과 마찬가지로 이차적인 문제이다. 똑같이 신실한 신자라도 얼마든지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같은 교회를 섬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성도덕은 다르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 진리인 일차적 문제이다. “음행을 하는 사람들이나 … 간음을 하는 사람들이나, 여성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나,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이나 …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고전 6:9). 성경이 분명히 금지하는 성적 부도덕을 범하면서도 얼마든지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이단을 조장하는 행위이다. 


평등주의와 이 문제를 연관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평등주의라는 토대가 없이도 LGBT+와 같은 특정 유형의 성적 부도덕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건 매우 어려울 것이다. 리건 던컨(Ligon Duncan)의 말이다. 


보완주의(complementarianism)의 부정은 성경의 권위를 온전히 받아들이려는 교회를 약화한다. (따라서 결국 그리고 필연적으로 복음 전파에 해를 끼친다.) 성경은 분명하게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라고 가르치는데, 실제 교회 현장을 보면, 그 구절에서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노라”라는 의미를 뽑아내고 있다. 이건 한마디로 체조 묘기와 다르지 않다. 이런 현실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의 삶 속에서 성경이 실질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권위(functional authority)를 갖지 못하도록 만든다. 


성경의 권위가 무너졌기 때문에 LGBT+ 그룹이 기독교 기관, 특히 대학에서 쉽게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젠더 특성을 제거하는 평등주의 운동은 젠더 본질주의(gender essentialism)라는 개념까지 훼손했다. 물론 이 모든 게 다 평등주의자의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결백하지 않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요점은 비난이 아닌 명백한 현실의 강조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평등주의 관점에서 구축된 모든 제도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단적 견해를 조장하는 세력에게 쉽게 넘어갈 위기에 처해있다. LGBT+ 수용을 옹호하려는 이들은 평등주의라는 문을 통해서 들어온다. 


2. 아무런 제약이 없는 미래를 추구한다.


평등주의 운동은 과거가 욕망, 특히 여성의 욕망을 제약한다면, 그런 과거를 얼마든지 무시해도 된다는 개념을 대중화했다. 성경이 여자 목사를 허용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 운동은 거의 2,000년 동안의 성찰, 가르침, 그리고 주석 및 성경적 숙고를 버리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평등주의자의 시도는 논리와 해석학과 이성에 근거한 주장을 함으로써 이미 기정사실화된 결론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을 따라서 성적 부도덕을 조장하는 자들은 기독교 역사가 간직한 사려 깊은 접근 방식을 아예 포기했다.


메리 해링튼(Mary Harrington)은 이 집단이 추진하는 많은 사상이 진실 여부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합리성 여부도 따지지 않으며 단지 욕망을 얼마나 제한하는가에 의해서만 평가된다고 지적한다. 이제 욕망의 제한은 아예 금기가 되었다. 


해링튼의 지적이다. “이제 사람들 대부분이 개인 욕망의 자유로운 발산을 제한하는 모든 대상을 다 적으로 믿고 있다.” 그런데 정통보다 더 욕망을 제한하는 것도 없다. 기독교 기관의 경우 정통성은 주로 성경에 기반을 두지만, 더불어서 신조와 교리 문답 그리고 초창기 신자들의 저술에도 일정 부분 의지하고 있다. 성적 부도덕을 조장하는 자들에게 정통 교리는 적이다. 개인의 욕망이 더 완전하게 지배할 수 있도록 정통 교리는 극복되어야만 한다. 


억제되지 않은 욕망에 대한 선호가 소위 말하는 “깨어난” 사람들에게만 국한된다면 기독교 조직은 크게 걱정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인은 욕망을 제약하는 모든 것을 반대하는 DNA를 가지고 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라는 신이교적 윤리에 전적으로 충성하면서, 겉으로는 마치 그게 성경적 윤리라도 되는 양 립서비스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 제약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분명하고 명백한 해를 입히지 않는 한, 그 어떤 행동도 다 허용되어야 한다고 그들은 믿는다.


여자 목사가 누구에게 상처를 줄까? 남자 친구와 결혼하려는 당신 아들은 누구에게 상처를 줄까? 현실을 부정하고 남자로 살겠다는 당신의 딸은 누구에게 상처를 줄까?


이제는 이런 질문을 하는 것조차 스스로를 구식으로 만드는 세상이 되었다. 여전히 계몽되지 않은 채 과거(1960년대 이전)에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멍청하게 서서 “역사의 잘못된 편”에 있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누구나 다 마음에서 허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조직과 기관에서 각종 제약을 향한 도전을 허용하고 마는 것이다. 


그럼 결과가 어떻게 될까? 최근 역사가 보여주듯, 제약은 도전받고 이어서 정통은 양보할 것이다. 


3. 새로운 정통을 금지하라.


중요한 도덕적 변화는 언제나 가볍고 사소해 보이는 양보에서 시작한다. 사소한 타협 말이다. 기관은 겉보기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한 가지를 용인함으로써 이전에는 감히 손을 댈 꿈도 꾸지 못하던 불가침의 교리나 관행에 대한 제약까지도 서서히 완화할 방법을 찾는다. 대학 캠퍼스가 취하는 방식은 비슷하다. 거의 항상 LGBT+ 지지 단체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과 더불어서 동성 결혼을 지지하는 교수를 용인하는 수순이다. 이런 식의 제스처는 해당 학교가 포용력이 있다는 인상을 주는 동시에 그다지 큰 부분을 양보한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단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니까. “우리는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소해보이는 양보라도 그것이 보내는 신호는 사소하지 않다. 해당 기관에게 정통성은 이제 단지 선호도의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교리의 정당성은 더 이상 “주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니 너희는 따르거라”에 달린 게 아니라, “중요한 건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이다. 그러나 그게 주님의 명령과 일치할 수도 있다”에 의해서 결정된다. 리처드 뉴하우스(Richard John Neuhaus)가 경고한 것처럼 그런 변화의 결과는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정통이 선택 사항인 곳에서는 조만간 정통이 금지될 것이다.” 


그가 “뉴하우스 법칙”이라고 말했을 때 의미한 바는 명확하다. 정통이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것은 명확한 기준이다. 그런데 정통이 선택 사항으로 전락하는 순간, 정통을 정통으로 만드는 바로 그 본질을 양보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자유주의적 관용의 법칙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이제 “옳고 그름과 참과 거짓에 대해서 편협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정통적 견해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억누를 수 있는 무모함(또는 힘)이 없는 한, 정통파는 여전히 원하는 바를 계속 믿으면서 살 수 있다.


많은 기관이 이런 변화가 제도적 역학을 어떻게 뒤집어엎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단지 적정선에서 타협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이다. 정통을 타협한 그들은 성적 부도덕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손에 자신을 맡겼다.


양보가 이뤄진 기관에서 누가 진짜 권력을 쥐고 있는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구분하는 게 쉽지 않다. 무제한적인 욕망의 조장자들이 자신들의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뉴하우스 법칙은 종종 기독교 기관 내에서 상당한 시차를 보이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기관에서 사역하는 그리스도인이 나이스하기(nice) 때문이다. 나이스한 그리스도인은 설교자가 되고 싶은 여자의 욕망을 억누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상호보완론에 집착하는 착한 장로들을 몰아내지도 않는다. 나이스한 그들은 LGBT+ 회원의 욕구를 제한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동성애 행위가 부도덕하다는 믿음을 고수하는 소수의 젊은이를 몰아내고 싶지도 않다. 노인들이야 오래지 않아 죽을 것이고, 젊은이들이야 사회적 압력에 굴복할 때까지 기다리면 되니까 말이다. 급한 건 하나도 없다. 물론 연합감리교회에 속했던 한 기관이 그랬던 것처럼, 상황에 따라서 결국에는 무제한적인 욕망이라는 새로운 정통을 금지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관은 얼마든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릴 수 있다. 결국 미래는 그들의 편이기 때문이다. 


쇠퇴가 불가피한 건 아니다


이러한 패턴이 기독교 기관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면 가슴 아프다. 그러나 타락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희망을 품어야 한다. 패턴을 식별할 수 있다면, 그 패턴을 중단하도록 노력할 수도 있다. 기독교 기관이 이단에 빠져 영혼을 지옥으로 이끄는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기독교 기관의 무결성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는 하나님이 버리신 현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떠나야 할 수도 있다. 


기독교 기관의 쇠퇴가 반드시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쇠퇴를 막기 위한 부지런한 노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시작한다면, 우리는 미래의 형제자매에게 정통 교회, 정통 교파, 정통 사역, 그리고 정통 대학을 물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원제: 3 Steps Christian Institutions Take from Orthodoxy to Sexual Immorality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성적 부도덕을 조장하는 자들에게 정통 교리는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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