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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최고의 전도, 최고의 환대: 교회됨과 성도됨
by 이춘성2023-02-09

세상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은 진정한 복음이며, 사람을 감동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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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주일 날, 교회를 개척하고 처음으로 한 달 동안 휴가를 받은 선배 목사님을 대신해서 주일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설교의 내용은 예수님의 광야 시험(눅 4:1-13) 사건과 베드로전서 5장을 연결한, 두려움과 믿음에 대해서였습니다. 설교를 끝내고 교회에서 준비한 간단한 식사를 하면서 한 달 동안 담임 목사님을 대신하여 교회 일을 맡고 계신 전도사님과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신학대학원 졸업반이었던 전도사님은 자연스럽게 방금 설교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평소에 자신의 고민이라면서 ‘이 시대의 전도’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목사님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앞으로 제가 배고픔, 무명, 질병과 죽음이라는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서서 그 길을 선택해야 할 것 같은데, 여전히 두렵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선택하신 그 길을 따라가야겠지요. 그런데 저도 두려운데, 하물며 일반 성도들은 어떨까요? 그리고 이렇게 어려운 길을 누가 선택할까요? 과연 현대에 전도할 수 있을까요?”


전도는 강요가 아니라 공감이다


이 질문을 받고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과거 우리의 전도가 사람을 설득하기보다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신 후에 받으신 세 종류의 시험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귀의 시험 방식은 예수님에게 선택을 강요하였습니다. 선택하면 받을 유익을 제시하고 그렇지 않았을 때의 위험을 보여주면서, 둘 사이에서 선택하라고 하는 것이지요. 마귀의 시험은 현대인들에게는 손익 계산이 분명하기에 매우 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와 정반대의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하시지요.


현대인에게 합리적 선택처럼 보이는 마귀의 시험 방식은 지난 세기 전도의 대표적인 구호였던,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짧지만 강렬한 구호와 닮았습니다. 이 구호의 내용은 사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이라고 하여서 전도를 위한 성경적 방식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이런 식의 선택을 불신자와 이방인에게 요구한 일이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선택을 강하게 요구하신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상은 제자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로 선택되어 따르는 자들에게 그들의 미지근한 모습을 보면서 제자로서의 바른 삶을 촉구하시기 위한 방식으로 선택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자신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결코 합리적 선택과는 거리가 멀었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처음 만난 자들에게는 한없는 공감과 자비, 측은함으로 다가가셨습니다. 하물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알았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병이 낫는 기적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이나 합리적 선택을 전도의 도구로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통받는 자들과 공감하고 연대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이들의 고통을 측은하고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마 9:36, 20:34; 막 1:41; 요 11:33). 하물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팔아넘긴 원수 가륫 유다를 향해서도 측은하고 불쌍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요 13:21). 예수님께서는 가륫 유다의 배신에 괴로워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괴로워하시는 모습을 동사 ‘타라쏘’(ταράσσω)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같은 단어를 두 장 앞에 나오는 요한복음 11:33,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비통하게 울면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사건에서 “불쌍히 여기사”로 동일하게 사용합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요 11:33). 이전의 한글 성경인 개역한글판에는 이 두 절을 동일하게 “민망히 여기사”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전도는 측은함과 공감에서 출발하였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예수님은 자신의 주된 사역이 병자를 치료하는 사역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칠 때까지 자기에게 오는 병자들은 돌보셨습니다. 예수님의 다른 이름은 상처 입은 치료자셨습니다.


전도는 세상을 향한 교회의 응답이다


초대 교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베드로전서의 교회들도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따랐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의 마지막 5:9-10에서 이렇게 격려합니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5장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과 더러운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교회를 분열시키는 일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을 통해 마귀가 교회를 분열시키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런 후에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세상에서 함께 고난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이전까지 베드로 사도는 성도의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에 고난을 다시 언급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전서 5:9이 이전과 다른 점은 ‘동일한’(τατ), ‘같다’는 단어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만 당하는 고난과 고통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동일한 고난을 당하면서 서로 연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마귀가 주는 두려움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우리 성도들과 교회도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전도는 개인이 헌신하고 고난을 믿음으로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와 동등하게 중요한 것이 ‘함께’라는 연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이 말씀에서 질문의 대상은 그리스도인 한 개인이 아니라 교회라는 공동체(μς, 너희들)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기에 한목소리로 합창하듯 세상을 향해 답할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의 한목소리는 우리의 삶이라는 음악과 이 음악을 기록한 악보인 성경 말씀과 정확히 일치하여 세상을 향해 진실함과 신실함이란 매력적인 새로운 세계를 향한 윤리로 다가갈 것입니다. 


전도는 세상을 향한 교회의 환대이다


우리는 전도에 대한 다양한 방법을 배워왔습니다. 노방 전도, 편지 전도, 식사 전도, 전단 전도, 붕어빵 전도, 전도 폭발, 알파 코스, 우정 전도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전도의 방법과 전략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밥을 먹을 때, 밥그릇과 숟가락이 있어야 하듯 말이지요. 그러나 밥이 없다면 아무리 금과 은으로 만든 비싸고 고급스러운 식기가 있어도 먹을 수 없습니다. 


전도의 핵심인 밥은 두려움과 위협이 아닌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진실한 모습과 세상을 향한 측은함과 공감입니다. 교회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세상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은 진정한 복음이며, 사람을 감동하게 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정성을 다해서 밥그릇에 담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상위에 놓고, 밥에 곁들일 반찬과 국을 차려놓는다면,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두려움의 노예로 허둥지둥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진정한 환대일 것입니다.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그럴듯한 말 뒤에서 위험이 아닌 안락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버리라는 마귀의 시험이, 두려움 마케팅이며 실제로는 위협과 강요의 폭력이라는 것을 모르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교회의 공감과 진실함은 환대이자 가장 확실한 전도일 것입니다.


교회됨과 성도됨이 전도의 처음과 끝이다


교회의 교회됨은 그 무엇보다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전도입니다. 또한 교회의 교회됨은 전도의 기초이자 전도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전도의 처음과 끝입니다. 전도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에게 도구나 방법이 없기에 새로운 방법이 필요한 것일까요? 그것도 일부 옳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방법이란 기본이라고 생각해서 잘 돌아보지 않았던 기초를 다시 점검해 보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길을 충실하게 따르는 복음 중심적인 사람과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 중심적인 선택과 삶이 되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예수님의 선택과 길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혹독하였습니다. 그리고 선택을 강요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과 세상의 길 이 두 갈림길에서 어느 편에 설지 선택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매 순간의 선택과 삶이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감동이 되고 위로가 되어 세상을 떠나 전혀 다른 신비한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는 용기를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우리 교회의 복음적 선택과 삶이 전도라는 것입니다. 성도됨과 교회됨은 전도의 처음과 끝입니다. 이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세계에서 극소수와 변두리로 존재했던, 1-3세기의 초대 교회의 전도였듯, 급속도로 교회의 영향력이 감소하는 우리 시대에도 교회됨과 성도됨이 가장 적절한 전도 전략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그 무엇보다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전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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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춘성

이춘성 목사는 20-30대 대부분을 국제 라브리 회원으로 기독교 공동체 운동과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쳤다. 지금은 한국기독교윤리연구원 전임 연구원, 고려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 겸임교수, 분당우리교회 협동목사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