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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눈 덮인 작은 예배당”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정동제일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2022-11-16

이영훈이 만들고 이문세가 부른 ‘광화문 연가’에는 “눈 덮인 조그만 예배당”이라는 노랫말이 있다. 이 노랫말을 쓸 때 작가는 분명히 벧엘예배당을 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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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 


서울이 도읍지가 된 것은 조선을 세운 이성계에 의해서이다. 오늘날 정동이라는 이름도 이성계와 닿아있다. 이성계는 계비(繼妃)인 신덕왕후를 이곳에서 만났고, 신덕왕후가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남겼는데, “제가 죽거든 큰 연을 만들어 거기에 제 이름을 써 하늘 높이 날리세요. 그리고 연줄을 끊어 연이 바람에 날다가 떨어진 곳에 저를 묻어주세요.”라고 했단다. 그런데 그 연이 떨어진 곳이 다름 아닌 신덕왕후와 이성계가 처음 만났던 이곳에 있던 우물이었다고 한다. 본래 우물골이라고 하던 이곳에 신덕왕후의 묘를 만들고 정릉이라고 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곳을 정릉골이라고 했는데, 후에 묘를 현재의 정릉으로 옮긴 다음에도 그렇게 불리다가 ‘정동’이 되었다.


즉 우물이 있던 곳(현, 세안빌딩 터)에 신덕왕후의 무덤을 씀으로써 정릉(貞陵)골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 지명을 생각하면 정동은 새롭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조선의 문호개방과 함께 들어온 신문물이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한반도를 살려내는 우물과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하여, 정동은 외교적인 의미를 넘어서 선교사들을 통해서 전해지는 복음과 신교육, 그리고 서방의 문물들이 터를 잡고, 다시 전해진 곳이다. 그러므로 정동은 이 나라 근대사에서 ‘최초’라는 수식어를 갖고 있는 것들이 많다.


정동은 정동제일교회를 비롯하여 초기 선교사들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기 때문에 시간을 거슬러 그들을 만나고, 그들이 남긴 역사의 흔적을 찾아 나서고 싶은 곳이다. 정동을 계절 따라서 찾노라면 그때그때의 멋과 아름다움이 있다. 따라서 정동에 대한 의식을 조금만 준비해서 찾아 걷노라면 근대사와 선교 현장에 남겨진 많은 이들과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그중에 정동제일교회와 그 터에 남겨진 역사의 흔적들은 최초라는 수식어가 굳이 필요할까 생각해야 할 만큼 너무나 자연스럽게 ‘최초’가 많은 곳이다. 덕수궁과 정동은 140여 년 전 귀인들과 외인들의 거리였다. 게다가 개화기에 들어서면서 제국주의 국가들이 한반도를 침탈하기 위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기에 한국 근대사에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예배당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 벧엘예배당이다. 단순히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만이 아니라 최초의 벽돌구조의 건물이기도 하다. 증축되면서 정방형 건물이 되었지만, 처음 이 예배당은 서울 장안에 프로테스탄트교회로서 십자가 모양의 건물이었다. 거기에 종탑을 별도로 만들어서 망루처럼 우뚝 서서 서울 장안을 살피는 형상을 하고 있다. 작지만 종탑의 네 귀퉁이에는 첨탑을 만들었는데, 이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열망을 담은 것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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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종탑 안에는 ‘경세종’(警世鐘)이라는 특별한 종이 있다. 직역하면 세상을 깨우는 종이라는 의미인데, 이 종은 1902년 성경번역위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목포를 가다가 해상사고를 당해서 순직한 아펜젤러 선교사를 기념하는 종이다. 특별히 이 종은 1907년 미국에서 제작해서 가져온 것이기에 국내 몇 개 없는 것으로 귀하다. 비록 지금은 울리지 않지만, 그 종의 존재를 알고 이곳을 찾노라면, 지금도 세상을 향해서 깨어나라고 심금까지 울리고 있는 듯하다.


이영훈이 만들고 이문세가 부른 ‘광화문 연가’에는 “눈 덮인 조그만 예배당”이라는 노랫말이 있다. 이 노랫말을 쓸 때 작가는 분명히 벧엘예배당을 보았을 것이다. 아마 서울 장안에서 주변의 건물들과는 사뭇 다른 모양의 건물은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외양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곳에 남겨진 것들은 무엇이든 조선의 문호개방과 함께 한반도에 처음 들어온 것들이었기에 비록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이 땅에 터를 잡아가면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게 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있고, 뵈지 않게 숨겨진 것도 있지만 벧엘예배당은 지어진 이래로 그 자리를 지키면서 지금까지 정동과 근대사를 증언하고 있다.


애초에 예배당은 라틴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차례 증축하면서 조금씩 바뀐 것이 현재의 모양이다. 외부에서는 벽돌이 색깔, 내부에는 기둥을 중심으로 보면 본래 예배당의 규모와 모양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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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벧엘예배당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되었었다. 1918년 우리나라에 처음 설치된 파이프오르간은 아시아에 3대 밖에 없는 것으로 희귀한 악기였다. 여성 독립운동가이자 이화학당의 교사인 김란사(1872-1919)가 우리나라 평신도 대표로 미국 감리교회 총회에 참석한 길에 미국 각지를 돌면서 재미동포들로부터 기부금을 마련해서 이 오르간을 설치했다. 하지만 그 경비가 상상을 초월하는 것으로 설치된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화폐로 오르간 가격이 2,500원, 운반과 설치비용이 5,000원이 들었다. 벧엘예배당 건축비가 8,000원이었으니, 오르간 설치비용이 얼마나 큰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정동제일교회의 오르간 설치는 예배에 있어서 찬양의 기쁨 이상의 의미가 숨겨져 있다. 정동제일교회는 1919년 삼일독립만세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두 사람이나 있었던 교회로서 이 운동을 이끌어가면서 필요한 것들이 많았고, 그것을 감당해야 했다. 그중에도 파이프오르간의 핵심인 송풍실 안에서 독립선언서와 당시 발행된 독립신문이 만들었다는 사실은 경이롭다. 일경의 눈을 피해서 만들어야 했던 것인데, 어디도 자유로운 곳이 없었다. 그런데, 바로 이 오르간 송풍실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곳이었기에 그곳에 숨어서 이러한 문서들을 등사해서 만세운동과 그 사실을 알리는 소식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단지 파이프오르간으로 찬양시간에만 유용했던 것이 아니라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공간이 되어줌으로써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현재 이 예배당에서 만날 수 있는 오르간은 당시의 것은 아니기에 아쉽다. 당시에 설치되었던 최초의 오르간은 6.25사변 당시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예배당 일부가 파괴되면서 오르간도 망가졌기 때문에 정동제일교회로서는 아쉬움이 컸다. 하여, 2003년 현재의 오르간을 다시 제작하여 설치했다. 이 교회의 이종덕 권사라는 분이 연보한 것으로 새로운 것이지만, 최초의 오르간 설계도를 근거로 해서 복원했다고 한다. 그래도 설계도가 있었기 때문에 비록 같은 것은 아니지만 복원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오르간과 함께 드리는 예배가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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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현재 정동제일교회의 벧엘예배당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스크랜턴(William Benton Scranton, 1856-1922)이 감리교회 최초 선교사로 이곳에 와서 자리를 잡은 곳이다. 그는 이곳에 자리를 잡고 최초의 개인 병원인 시병원(施病院)을 1886년 6월 15일 정식으로 개원했다. 그런데 바로 맞닥뜨리게 된 것이 조선의 정서상 남자 의사가 여자 환자를 볼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에 스크랜턴은 본국 선교부에 급하게 연락해서 여자 의사로서 선교사를 자원하는 사람을 찾아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하여, 스크랜턴은 새로 부임한 메타 하워드(Meta Howard, 1862-1930)가 도착하자 1887년 10월 보구여관(保救女館)을 새롭게 개원했다. 시병원이나 보구여관 모두 고종이 직접 지어서 하사한 이름이니, 그 자체가 병원으로서 허가를 내준 것과 같은 효력이 있었다.


따라서 현재의 정동제일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터는 스크랜턴이 살던 곳이며, 동시에 시병원과 보구여관이 시작된 곳이다. 물론 보구여관 터는 현재 이화여고 테니스장이기에 현재 정동제일교회 영내에 있지는 않았다. 다만 스크랜턴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대한민국 최초의 개인병원, 그리고 최초의 여성전문병원을 개설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보구여관의 역사는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반면 시병원은 스크랜턴 선교사가 모든 직분을 내려놓고 조선을 떠나는 것과 함께 사실상 문을 닫고 말았다. 하여, 그의 흔적은 안현교회, 상동교회, 동대문교회를 통해서나 찾아볼 수 있다.


아쉽게도 현재 정동제일교회를 돌아보면 아쉽게도 스크랜턴과 관련한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예배당 마당은 1919년 삼일독립만세운동에 민족대표로 앞장선 이필주 목사가 거주했던 주택이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 교회를 설립한 아펜젤러 선교사와 탁사 최병헌(1858-1927) 목사의 흉상이 건립되어있다. 그는 1888년 아펜젤러 선교사에게 복음을 전달받았으며, 1893년 존스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아펜젤러 선교사와 함께 신약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조력했다. 1902년부터는 이 교회의 제2대 담임 목사로 12년간 시무하면서 이상재, 윤치호 등과 함께 YMCA를 이끌었다.


이것만이 아니다. 정동제일교회는 이필주 목사가 목회할 때 박동완, 유관순, 서재필 등과 같은 이들이 이 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을 세워갔다. 그리고 독립을 위한 각자의 역할을 생각하면서 뜻을 같이했다. 아직은 미완이지만 이 교회에서는 기억되어야 할 역사와 인물들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을 만들 계획을 하고 있다. 


늦은 가을날 바람 따라 나뒹구는 낙엽을 밟으면서 정동길을 걷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어느새 벧엘예배당을 향하게 된다.

늦은 가을날 바람 따라 나뒹구는 낙엽을 밟으면서 정동길을 걷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어느새 벧엘예배당을 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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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종전 · 장명근

글 이종전 

이종전 목사는 고베개혁파신학교(일본), 애쉬랜드신학대학원(미국)에서 수학하고, 1998년부터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역사신학을 가르쳤고, 현재는 은퇴하여 석좌교수와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인천 어진내교회를 담임하며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C채널 ‘성지가 좋다’ 국내 편에서 역사 탐방 해설을 진행하고 있다.


그림 장명근 

장명근 장로는 토목공학 학부(B.S.)를 마치고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환경공학(M.S & Ph.D)을 공부했다. 이후 20년간 수처리 전문 사업체를 경영하였으며 2013년부터는 삼양이앤알의 대표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정동제일교회의 장로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