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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이원론과 세속주의를 넘어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을 위하여

by 김경호2022-11-10

이원론의 가장 비참한 효과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이중적 충성을 가지게 한다는 점이다. 즉, 그것은 우리에게 두 주인을 섬기도록 강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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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

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네덜란드 자유대학 설립 기념 연설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것이다’라고 외치지 않는 영역은 한 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경적 삶이 우리의 문화와 역사 속에서 충만하게 드러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 주된 이유는 이원론dualism이라는 분열된 시각과 세속주의secularism로 인한 주도권 상실에 있습니다. 이 분열된 시각과 주도권 상실을 초래한 “이원론에서 세속주의로”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이원론과 세속주의를 넘어” 우리에게 찾아온 기회와 실천의 단서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이원론 


이원론의 의미. 세상은 아직도 이원론의 형태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세상의 한쪽은 거룩하고, 다른 한쪽은 거룩하지 않은 영역으로 구분 짓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쪽에서 살고, 비-그리스도인은 거룩하지 않은 쪽에서 살아갑니다. 이처럼 이원론이란 성과 속, 선과 악, 교회와 세상,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등으로 분리되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또한 이원론은 창조를 구조로, 타락과 구속을 방향으로 보지 않고, 창조를 제거하고, 타락과 구속이라는 방향을 두 가지로 구조화시킨 것입니다. 이 결과는 생각 이상으로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창조라는 “공통성”의 토대가 상실되면서, 타락과 구속 간의 “대립”만 존재하게 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원론의 구체적인 네 가지 형태. 이원론은 구체적으로 네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고등한 것과 열등한 것,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영혼과 육체, 성, 그리고 영원한 것과 시간적인 것입니다. 첫째, 고등한 것과 열등한 것에서, 일과 여가 이원론이 있습니다. 일은 열등하고 여가는 고등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명상과 활동 이원론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상은 고등하고, 활동은 열등하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구분이 현대에까지 미쳐, 고등한 기독교 전임 사역과 열등한 비-전임 사역 이원론이 나타나게 됩니다. 전임과 비전임 사역은 더 구체적으로 계층화되어, 최고인 해외 선교사, 그 다음은 목사, 그 다음은 의사나 교사, 그 다음은 사회활동이나 대중 매체이고, 마지막 최악은 정치 분야로 등급이 매겨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고등-열등 이원론은 신앙으로 자신의 직업을 변혁시키는 것이 아니라 직업에 신앙을 첨가하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둘째, 성속 이원론이 있습니다. 성속 이원론이란 두 영역을 분리하여, 한 영역은 거룩하고 다른 한 영역은 거룩하지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는 거룩하고 세상(농업, 예술 등)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셋째,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이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을 하나의 통일체로 보지 못하고,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였습니다. 즉, 이성적 영혼이 육체에 거주한다고 보았고, 따라서 영혼이 더 중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성sex을 욕정에 뿌리를 둔 수치스러운 것으로 보았습니다. 넷째,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의 이원론에서, 영혼의 고향은 영원한 곳이고, 육체의 고향은 시간적인 곳이라고 보았습니다. 


리차드 미들톤J. Richard Middleton과 브라이언 왈쉬Brian Walsh는 결국 이원론의 다양한 형태가 가지는 해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원론은 우리의 성경 해석을 왜곡시키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순종의 생활을 방해한다. 하지만 이원론의 가장 비참한 효과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이중적 충성을 가지게 한다는 점이다. 즉, 그것은 우리에게 두 주인을 섬기도록 강요한다.” 


이원론에서 세속주의로 


세속주의의 뿌리: 중세의 자연관. 이원론은 세속주의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이 지점은 우리에게 무척 뼈아픈 역사입니다. 창조된 세상이 타락 이후에, 결국 전 영역에 걸쳐 하나님 없는 세속주의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 시작은 중세의 자연과 은총의 이원론에서부터입니다. 은총과 자연은 아래의 자연이 위의 은총에게 복종하는 위계질서였습니다. 그러나 자연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연관의 특징인 “질료 안의 형상”이라는 원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이 지점에서 세속주의의 뿌리가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질료 안의 형상”이라는 개념 자체가 곧 자연의 원리와 법칙을 의미했고, 이는 근대 과학의 시작이 바로 이 자연관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프란시스 쉐퍼Franscis Schaeffer는 이 변화를 “자연이 은총을 먹어버리기 시작했다”고 표현했습니다. 또한 미들톤은 자연이 세속주의의 뿌리가 된 결과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습니다. “교회의 이원론은 세속주의가 서구 문화의 지도적 정신이 될 수 있도록 그것에게 승리의 문을 열어주었다. 대담하게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중세의 자연-은총 이원론이 없었다면, 현대의 세속주의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중세 교회는 자연이 은혜를 삼키도록 방치했고, 세속주의로 나아가는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세속주의의 발전: 근대의 합리론과 경험론의 종합(과학혁명). 자연에서부터 시작된 세속화는 세속화된 근대 인간을 등장시키면서 세속주의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 흐름은 르네상스로부터 계몽주의에까지 이르는 세속화의 과정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자연에서부터 발전된 과학혁명의 결과를 둘러싼 서로 다른 세 가지 이야기가 주도권 경쟁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1) 먼저, 세속화의 버전은 과학혁명은 베이컨의 경험론과 데카르트의 수학적 합리론을 아이작 뉴턴이 종합함으로써 과학혁명이 일어났다고 보았습니다. (2) 그러나 기독교 버전은 다르게 설명합니다. 뉴턴은 과학에 대한 신념을 과학 자체에 두지 않고, 하나님이 주권과 통치에 두었습니다. 따라서 뉴턴은 하나님의 창조를 하나님의 통치에 기반한 “질서 있는 세상”으로 믿고, 과학 활동에 전념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학적 결과를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델 라치Del Ratzsch도 기독교 정신에서 비롯된 과학을 제시했습니다. 그 이유는 고대 그리스는 물질 세계를 연구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겼고, 고대 이교 문화권에서는 자연을 신성시 했으며, 동양 문화권에서는 실재를 경험적 탐구가 불필요한 엄격성에 지배되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3) 마지막으로, 기독교와 세속주의의 상호작용 버전입니다. 이 버전은 중간 입장인 셈입니다. 낸시 피어시Nancy R. Pearcey와 찰스 택스턴Cgarues V, Thaxton은 한편으로는 기독교가 근대 초기 과학자들의 지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근간이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자들의 이러한 사고들에는 헬라 철학과의 대화가 작용했다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헬라 철학이란 구체적으로 신플라톤주의를 의미합니다. 결국 상호작용 버전의 관점에서 과학혁명은 “성경-하나님”과 “신플라톤주의”라는 두 가지 신념의 상호작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 세 가지 버전 가운데, 상호작용 버전이 더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상호작용에서 구별해야할 점은 “성경-하나님”에 대한 신념이 주된 것이었고, “신플라톤주의”에 나타난 수학적 신념은 근대초기 기독교 과학자들에게 자료적 차원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고 봅니다.     


주도권의 분수령: 르네상스 vs. 종교개혁. 근대 과학혁명의 결과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진영 사이에 서로 다른 입장으로 갈라졌습니다. 르네상스 진영은 과학혁명을 받아들였지만, 종교개혁 진영은 과학혁명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주도권의 상실이라는 엄청난 결과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주도권 상실의 첫 번째 원인은 과학혁명의 결과에 대한 교회의 부정적인 반응입니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라는 전도서 1:4-5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함으로써, 지동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 종교개혁 진영의 지도자인 마르틴 루터의 코페르니쿠스를 향한 비웃음은 결정적인 것이었습니다. “본래 그런 것이 아니겠나. 누구든지 똑똑해지려면 남들이 중시하는 것들을 하나도 수긍해서는 안 되고 뭔가 튀는 일을 해야 하거든, 이 친구도 천문학을 몽땅 뒤 짚고 싶어서 그런 거겠지. 나는 성경을 믿네. 여호수아가 지구가 아니라 태양에게 정지 명령을 내렸거든.” 주도권 상실의 두 번째 원인은 종교개혁 진영의 분열과 전쟁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찬 논쟁 가운데 분열되었고, 다양한 정치 단위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르네상스 진영은 다방면에서 지식을 증가시켰고, 과학혁명의 결과를 등에 업고 주도권을 장악했습니다. 그 이후 계몽주의로까지 발전하여 진보라는 이데올로기 안에서 전체 사회를 통합할 수 있게 되었고, 결국 진보의 삼위일체인 과학-기술-경제라는 우상으로까지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원론과 세속주의를 넘어 


주도권 회복의 단서. 그러나 다행인 것은 이 진보의 신들(과학-기술-경제)은 1-2차 세계대전 이후로부터 부작용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마이클 고힌Michae W. Goheen과 크레이그 바르톨로뮤Craig G. Bartholomew는 그 증상을 다섯 가지로 소개합니다. 진보가 약속한 부는 소수만의 것으로 드러났고, 지구의 환경자원은 빠른 속도로 소비되어 갔으며, 반면에 무기는 대량으로 증가하였고, 각종 심리적 문제(거식증, 과식증, 스트레스, 낮은 자존감, 탈진, 우울증 등)가 발생했으며, 가정의 붕괴와 범죄율과 실업률과 같은 사회경제적 문제가 발생함으로써 사회 자체가 붕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증상들은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주도권 회복의 시작: 가치-사실, 사적-공적 이분법의 역전. 회복의 시작은 근대 이후의 변화된 상황들로부터입니다. 그것은 가치-사실, 혹은 사적-공적 이분법이 역으로 사용가능한 것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과거의 가치-사실 이분법은 종교가 가치의 영역에, 사회는 사실의 영역에 있어야 했습니다. 또한 종교는 사적 영역으로, 사회는 공적 영역으로 규정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사적 영역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공적 영역에는 진입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바뀌면서 우리에게 기회가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은 가치로부터 나오고, 공적 영역은 사적 영역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 개념을 통해 과학이 사실보다 과학적 전통이라는 가치에서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는 우리의 지식이 인격적 지식, 즉 가치로부터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이런 지적 분위기에서, 앨빈 플랜팅가Alvin Plantinga는 유신론의 합리성을 증명해 내었고, 언어분석 철학에서 힐러리 퍼트남Hilary Putnam은 사실이 가치로부터 나온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이후, 이제 우리에게도 발언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우리의 세계관을 가지고 사실과 공적 영역에 나아갈 기회의 다리가 생긴 것입니다. 이 끊어진 다리가 이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말할 수 있고, 과학과 과학주의의 차이를 더 설득력 있게 증언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이원론과 세속주의를 넘어설 수 있게 하는, 우리에게 다시 찾아온 절호의 기회입니다.

교회의 이원론은 세속주의가 서구 문화의 지도적 정신이 될 수 있도록 그것에게 승리의 문을 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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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경호

김경호 목사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M.Div.) 논문 “세 가지 유형의 개혁주의 세계관 연구”로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연구단체 Worldview & Work를 설립하여 연구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20년부터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국내외에서 세계관 교육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