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그늘이 청춘을 짓누르고 있다
by 조성돈2022-11-02

죽음조차도 불사하겠다는 죽음의 문화가 이 땅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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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1999년생입니다. 아들이 중학교 2학년이었던 때 세월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받았던 충격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남의 일 같지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아들 또래는 수학여행을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정부에서 내린 대책은 수학여행을 금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수학여행이라는 학창 시절의 가장 신나는 경험을 못 했습니다. 


2017년 아들은 고등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그때 포항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수능시험 전날이었습니다. 지진 피해는 상당히 컸기에, 수능 시험장으로 동원된 일부 학교가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수능은 1주일 미루어졌습니다. 


다행히 대학을 가고 2년을 보냈는데, 전 세계가 경험하는 코로나19가 닥쳤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에게 불안이 밀려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볼 수가 있었습니다. 곧 졸업도 하고 취직도 해야 하는데 모든 것이 불확실하게 되었습니다. 3학년을 마치고는 늦게 군대를 갔습니다. 


작년에는 한강에서 손군이 익사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논란 가운데 술에 취해서 일어난 우발적 사건으로 결론이 났습니다만, 아직도 한강에 가면 의문을 밝혀 달라는 게시물이 있습니다. 손군은 아들의 한 건너 친구입니다. 학교 동창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아들에게는 더욱 충격이 컸습니다. 그 트라우마는 아직도 집 앞 한강을 나갈 때마다 찾아옵니다. 


지난 주말에는 이태원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직 이것을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건이 맞는지, 참사라 해야 할지, 또는 재난이라고 해야 할지 말입니다. 꽃다운 청춘이 오늘 기준 155명 사망했다고 합니다. 아들은 그날 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뉴스를 보자마자 분주해졌습니다. 카톡이 불이 났습니다. 현장에 있는 친구들이 보내는 사진들이었습니다. 뉴스와는 다른 현장의 모습들이 속속 들어왔습니다. 그 충격은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아들은 그날 가자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대학 친구들, 동네에 있는 중고등학교 친구들이 그룹 지어서 같이 가자고 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혼자 빠졌는가 봅니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에 아들은 밤새 카톡을 한 것 같습니다. 서로 생사를 확인하느라 그랬을 것입니다. 다음 날 물어보니 대학 선배 하나가 밤새 연락이 안 되었는가 봅니다. 현장에서 경험하고 정신이 나가서인지, 이태원에서 국민대까지 걸어갔다고, 카톡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궁금한데, 살아 있냐고 물어볼 수가 없어서 기척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오후에 물어보니 직접 친구는 괜찮은데, 한 다리 건너의 친구 중에 사망자가 있다고 합니다. 덤덤한 듯 말하지만 큰 충격인 것 같습니다. 그다음 날 퇴근하는 아들에게 별일 없냐고 물으니 아는 이들 중에 사망자가 한둘이 아닌 것 같다고만 합니다. 그 말을 듣는데 저도 충격이었습니다. 아들이 더 충격을 받았을 거라 생각이 드니 더 이상 물어보지를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뉴스를 껐습니다. 아들이 이제 그만 보라고 합니다. 뉴스가 남의 일이 아니니 충격인 것 같습니다. 


우리 아들만의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이 일보다 더 무서운 일들이 우리 가운데 더 많이 있었을 것이고요. 


구의역에서, 노동 현장에서 아직 어른도 되어보지 못한 친구들이 죽어간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강남 화장실에서, 최근에는 신당역 화장실에서 죽은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을 버티지 못하고 자신의 삶의 중앙에서 스스로를 포기한 이들도 있습니다. 


자살 예방 사업을 하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청년들의 자살입니다. 10대, 20대, 30대에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것은 이미 오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제가 사망원인 통계표를 보다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20대 사망자 중에 자살로 인해서 죽은 사람의 비율이 56.8퍼센트인 겁니다. 즉 20대 사망자 10명 중 6명은 자살로 인해서 죽은 것입니다.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죽인다는 자살이 사망원인의 거의 60퍼센트에 이른다는 것은 결코 정상이 아닙니다. 


저는 이 모든 일련의 일들이 결코 산발적인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관통하는 한 가지 생각이 있는데, 그것은 생명 경시입니다. 돈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서만 치열하게 달려가는 이 사회의 문화입니다. 죽음조차도 불사하겠다는 죽음의 문화가 이 땅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가볍게 흩날리며, 죽음을 향해 가는 나방과 같이 불빛을 향해서만 달리는 이 땅의 가치관, 즉 문화가 그 이유입니다. 이러한 문화 가운데 생명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특히 그것이 남의 생명이 되었을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안전을 비용으로 계산하게 되고, 생명을 돈으로 생각하게 될 때 이런 일들은 끊임이 없을 것입니다. 


생명은 대한민국에서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미 세월호 때 학습한 바가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으로 인해서 생때같은 아이들이 선실에 머물러 죽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으라’는 하나의 생명 구호와 같습니다. 물론 긍정적인 의미에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부정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입니다. 정부를 믿고, 주최측을 믿고, 공권력을 믿고 ‘가만히 있다’가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정말 슬픈 이야기입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나를 지켜주고, 나를 살려 줄 것이라는 믿음이 없이 이 땅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내가 알아서 살아야 한다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이 생존의 가치라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지요. 


그리고 우리 청년들을 치유해야 합니다. 3포, 5포 하다가 이제는 세는 것도 힘들어서 N포 세대라고 하는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이제 꿈꾸는 것조차 포기하고 남은 80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망막하기만 한 이 청춘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징어 게임’에 열광하며, 그들의 성공에 손뼉 치지만, 그게 현실인 것을 알아버린 이 청춘들에게 우리는 삶의 소망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태어나서 대학 갈 때까지, 그리고 취직할 때까지 갇힌 공간에서 치열한 경쟁을 해온 청년들에게 이제 와서 구호 물품 나누어 준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철창 경기장 안에 맹수로 사육해 놓고, 이제 와 소여물 나누어 준다고 해결될 일은 아닙니다. 


아들놈 힘들어하는 거 옆에서 보다가 이 세상이 너무한 것 같아서 쏟아놓아 봅니다. 이제 겨우 다 키워놓고, 그 빛나는 모습 쳐다보다 시신으로 만나게 된 그 부모가 너무 안되어서 이렇게 넋두리해 봅니다. 하지만 정말 이 사회가 이래서는 안 됩니다. 암만 빛나는 성과가 있어도 사람이 살 수 없다면, 그건 지옥과 같습니다. 우리의 청춘들을 이 지옥에서 벗어나게 해 주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버티고 사는 것도 힘든 이들을 이제 더 이상 죽음으로 몰아가는 일은 그만해야 합니다. 생명을 갈아 돌아가는 이 톱니바퀴를 멈춰 세워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3천 5백 년 전 안식일을 통해 주셨던 하나님의 지혜를 다시 새겨볼 때입니다. 안식일이 되면 너와 네 자녀들과 네 종들과 네 집의 객들과 네 집의 가축들이 모두 쉬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7일에 하루를 반드시 쉬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7일에 하루를 쉬는 것은 하나님이 명령한 약자들의 권리입니다. 이 명령과 권리에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배어 있습니다. 세상은 더 많은 노동과 수고로, 그리고 더 많은 착취와 폭력으로 부자가 되는 것이 원리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은 그 세상의 원리에 정면으로 맞섭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통해 하나님과 세상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범위가 놀랍습니다. ‘너’뿐만 아니라 자녀와 종들과 객들에게도 안식을 허락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가축들까지도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믿는 ‘너’뿐만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까지, 그리고 그 가축까지 포함하는 모든 피조물에게 안식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어 이렇게 모든 피조물에까지 이릅니다. 


생명은 사랑으로 지켜집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있을 때 생명은 절대적 가치가 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걸 놓쳤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생명이 없는 이곳에서 우리는 다시 죽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경험한 유가족들과 대한민국에 깊은 애도의 마음을 보내드립니다. 

사랑과 생명이 없는 이곳에서 우리는 다시 죽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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