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를 잘못 이해했는가?④

개혁자들과 함께 아우구스티누스 읽기

by Zach Howard2022-10-23

칼뱅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칭의에 관해서 성경과 다른 주장을 한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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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장 칼뱅 같은 개혁자들이 성경을 빼고 가장 많이 인용한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들은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다른 주장보다도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라는 진리를 이 교부가 어떻게 옹호했는지에 관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참고했다. 그렇지만 개혁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에 관해서만은 이 위대한 교부에게서 원하는 만큼의 명료성을 찾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며, 그의 저작을 주의 깊게 읽으면 그가 이 교리를 다루는 데 있어서 모호함을 드러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에 관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안점을 두는 것은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declaring)는 점이 아니라, 의롭게 만드신다(making)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료성을 중시하는 종교 개혁자들에게는 아무리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의롭다 하심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의를 부정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런 식의 교리 표현 방식을 모호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목회자, 지도자, 교사를 위한 특집 기사 시리즈를 위해서 우리는 베들레헴 신학교에서 신학 및 인문학 조교수로 일하는 잭 하워드에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칭의 교리를 탐구하도록 요청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이해

  1. 인간의 본성에 대한 치유로서의 칭의

  2. 경건하지 않은 자를 경건케 만드는 칭의 

  3. 사건과 과정으로서의 칭의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평가

  1. 아우구스티누스 칭의론에 대한 칼뱅의 평가

  2. 믿음과 사랑의 관계

  3. 은혜의 면류관을 씌우시는 하나님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 검토하기 


칭의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와 후기 개혁자들 사이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첫째, 칭의의 의미 속에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는 사건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과정까지 포함했다는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의 의미를 보다 더 폭넓게 이해하고 있다. 대조적으로, 개혁자들은 칭의를 단지 선언적 의미로 제한하고 성화와의 분명한 구분을 강조한다. 둘째, 칭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이 변화되어야 할 필요성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개혁자들은 사람이 용서받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의롭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완전히 치유함으로써 더 이상 “죄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21] 개혁자들에게 “의롭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기초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아우구스티누스와 개혁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칭의에 관한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먼저 칼뱅과 같은 개혁자들이 아우구스티누스와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를 알아보고, 이어서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이 그 시대에 제기된 관련한 우려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1. 아우구스티누스 칭의론에 대한 칼뱅의 평가


칭의에 관한 글에서 칼뱅은 우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지 결코 행위가 가져다주는 공로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반복해서 인용한다.[22] 그런 동의(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칼뱅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칭의에 관해서 성경과 다른 주장을 한다고 지적한다. ‘기독교 강요’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관한 확장된 섹션에서 칼뱅은 피터 롬바드(Peter Lombard, 1100-1160년경)와 같은 중세의 “스콜라 철학자”가 은혜에 관해서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랐지만 동시에 그를 어떻게 오해했는지를 설명한다. 칼뱅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칭의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감정, 또는 적어도 그의 표현 방식조차도 완전히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가 비록 사람의 의가 가져다주는 모든 공로를 제거하고 모든 공로를 오로지 하나님께로만 돌렸다는 점에 있어서는 마땅히 인정받아야 하지만, 그럼에도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은혜를 성화의 머리 아래에 두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다룰 때 우리를 매우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우리 자신의 행위에서 눈을 돌이켜서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그리스도의 완전하심만 바라보라고 성경은 명령한다.[23]


칼뱅은 칭의와 성화를 적절히 구별하지 못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 방식”을 도무지 승인할 수 없었다. 로마서 주석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다른 설명을 했다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의 의가 중생의 은혜라고 생각했다.”[24] 달리 말하면, 칭의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되는 은혜 (칼뱅이 칭의라고 부름)와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의롭게 되는 은혜(칼뱅이 성화라고 부르는 것)를 합친 것이다. 칼뱅은 이런 식의 “표현 방식”이 중세 후기 기독교의 남용, 그러니까 인간이 행위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졌다고 우려한다. 


칭의와 성화라는 이중적 은혜를 구별하면서 칼뱅은 하나님과 인간이 올바른 관계를 갖도록 한 근거가 인간에게 생긴 새로운 도덕적 본성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라는 진리를 보존하고자 노력했다. 그렇다고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이 그런 식으로 주장했다고 칼뱅이 말한 적은 없다. 오히려 칼뱅이 반박한 대상은 칼뱅 자신이 볼 때 아우구스티누스를 오해한 동시대 사람인 안드레아스 오시안더(Andreas Osiander)와 중세 후기 학자인 롬바드이다. 칼뱅은 단지 칭의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 방식”이 성경이 말하는 칭의와 비교할 때 어느 정도의 모호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 결과 롬바드와 같은 후대의 사상가가 칭의와 관련해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잘못 인용했다고 본 것이다. 


칼뱅의 이런 평가는 칭의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에 대해서 적어도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와 관련해서 믿음과 행함을 어떻게 연결하는 것이 바른 방법이라고 믿었는가? 그리고 더불어서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의 기초가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했는가?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던지기에 아주 좋은 질문이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시대에 접했던 두 가지 논쟁을 처리하면서 언급한 질문이기도 하다. 



22. 폴 헬름(Paul Helm)은 칼뱅이 ‘기독교 강요’에서 칭의와 관련해서 아우구스티누스를 긍정적으로 인용한 경우가 다음 세 번이라고 지적한다: 3.13.4; 3.14.4; 3.14.20. 이에 관해서는 다음을 보라. Paul Helm, “Duplex Gratia,” in Calvin at the Centr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196-226. 


23. Calvin, Institutes 3.11.15-16. Cf. 이 부분에 대한 폴 헬름의 논의는 “Duplex Gratia,” 205을 보라. 


24. Calvin, Comm. Romans 3:22. 



원제: Did Augustine Get Justification Wrong?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무제

칼뱅은 단지 칭의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 방식이 성경이 말하는 칭의와 비교할 때 어느 정도의 모호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 결과 롬바드와 같은 후대의 사상가가 칭의와 관련해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잘못 인용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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