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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예수님의 만짐, 은혜의 전염
by Rosaria Butterfield2022-10-18

예수님의 만짐을 통해 은혜가 전염되어 사람들이 믿고, 회개하고 돌이켜 순종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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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가장 무서운 전염병은 나병이었다. 그 병은 불결하고, 치명적인 불치의 질병이었을 뿐 아니라 제멋대로 거침없이 퍼져나가는 전염성까지 지녔다. 그 병은 사랑하는 가족을 사회적 추방자로 전락시켰다.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처럼 나병환자의 피부는 힘줄과 근육을 감싸지 못하고 여기저기 고름이 터져 나오면서 하루아침에 사랑스러운 가족에서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어 버린다. 나병환자들은 도덕적, 사회적으로 배척과 멸시를 받아 격리된 채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았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고통에 시달리며 살면서 모든 희망을 잃은 채 죽기만을 기다렸다. 나병은 체포와 추방이 가능했던 법정 전염병이었다. 율법의 의식법은 나병환자를 도덕적, 육체적으로 불결하게 여겼다. 나병은 전염성이 있는 피부 질환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건강한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었고, 예배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이처럼 예수님 당시에 나병은 원죄의 물리적 현현이자 혐오스러운 징후였다. 그것은 특별한 죄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지닌 죄의 본성, 우리 내면에 장착된 시한폭탄을 가리켰다. 해결책은 나병환자를 격리하고, 아직 건강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뿐이었다. 레위기 13-14장은 나병의 전염을 억제하고, 치료된 나병환자를 공동체 안으로 회복하는 방법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한다. 이 질병은 사랑하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하루아침에 멸시받는 추방자로 전락시킬 수 있었다. 함께 어울리고 부대끼며 존중받으며 살다가도 한순간에 쓰레기와 같은 처지가 될 수 있었다. 나병은 비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빗물 같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 곧 온전한 하나님이자 온전한 사람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을 때 두 가지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누가복음 5장에는 “온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나병환자 거주지를 방문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사회적으로 추방된 그들을 찾아가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는 나병환자 거주지를 떠나(이것은 모든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는 불법적인 행동이다) 곧장 예수님께 나와 엎드려 간구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눅 5:12). 


나병환자들이 모여 있는 지역을 떠나 마을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산을 옮길 만한 믿음과 용기, 곧 선지자적인 믿음과 용기가 필요했다. 그것은 자기의 문화와 자기의 동료들과 정해진 장소가 주는 안전함을 뒤로한 채 예수님께 나오는 일이었다. 아마도 예수님께 나오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너는 너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위험한 존재다. 너는 지금 율법을 어기고 있다. 너는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해칠지도 모른다’라며 스스로를 질책하는 생각이 가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주”로 일컬은 것으로 보아, 그의 행동은 믿음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사용한 칭호인 “주”는 성경에서 오직 신실한 신자들만 사용했던 칭호이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나병환자로 하여금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그는 체포당할 위험을 무릅썼다. 그는 공중 보건을 위태롭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감염시킬 위험과 군중에게서 쫓겨나 다시금 자신이 처한 냉엄한 현실(자신은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온전하지 못한 인간이라는 것)로 되돌아가야 할 위험을 기꺼이 감수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면에서 우리보다 더 나았다. 그는 자신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단지 사회적 신분의 향상이 아닌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았다.


예수님은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듯한 행동을 하셨다. 그 질병이 그 환자의 몸을 상하게 한 이후로 그 누구도 그 사람을 만진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손을 갖다 대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처음에 하얀 발진이 생겨난 순간에 운명이 결정되어 버린 그 사람의 몸을 만지셨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눅 5:13). 그 한 번의 만짐이 그 사람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그 만짐은 더 큰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세상을 변화시켰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만지면서 기존에 없었던 은혜를 새로 만들어 내지 않으셨다. 그것은 항상 존재해 온 성부 하나님의 은혜였다. 우리는 구약성경 곳곳에서 성부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은혜로 나병이 치유된 사실도 나온다. 나병환자였던 수리아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이스라엘 땅에 병을 고치는 기적을 행하는 선지자가 있다는 히브리 여종의 말을 듣고 엘리사를 찾아와 나음을 얻었다(왕하 5:1-14). 예수님은 누가복음 4:27에서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으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엘리사가 그 무명의 히브리 여종 때문에 나아만을 치료해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녀의 믿음은 강력했고, 주인의 나병보다 전염성이 더 강했다. 그녀의 믿음 때문에 엘리사는 전에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기적을 일으켰다. 그녀의 믿음은 참믿음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참믿음이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확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치유와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올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예수님이 무엇을 행하셨는지 볼 줄 아는 눈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이 무엇을 행하지 않으셨는지 아는 것도 또한 중요하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하나님이 그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고 인정하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나병이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에 근거하는 ‘사회 구성상의 문제’(객관적 현실로는 존재하지 않으나 사람들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존재하는 것, 말하자면 사람들이 그것이 존재한다고 합의했기에 존재하는 것)라거나 지금은 ‘은혜’의 시대이므로 ‘율법’은 더 이상 구속력을 갖지 않는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나병환자에게 자긍심을 좀 더 크게 가지라고 권유하지도 않으셨고, 나병환자들을 불합리하게 금기시한(나병공포증) 믿음의 공동체를 꾸짖지도 않으셨다. 문제는 전염성이었다. 전염성은 사회 구성상의 문제가 아니다. 전염성은 실제로 위험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상처받은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을 겁내지 않으셨다. 그분은 사람들을 가까이하셨다. 그분은 텅 빈 사람들을 만나 충만하게 채워서 보내셨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으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역설(Jesus paradox)이다. 예수님의 만짐을 통해 은혜가 전염되어 사람들이 믿고, 회개하고 돌이켜 순종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은혜의 전염성 덕분에 신자들은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기도하고, 섬기고,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무명의 히브리 여종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예수님의 만짐을 통해 은혜가 전염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이루셨을 뿐 아니라,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죄인에 불과한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원죄는 지정의를 왜곡시킨다. 자범죄는 우리의 주의를 흐트러뜨린다. 우리 안에 내재하는 죄는 우리를 마음대로 조종하려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원죄, 자범죄, 내재하는 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종종 그러는 것과는 달리 사탄이 조종하는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가 아니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율법을 온전히 이루시고, 자신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사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신 후에 자기 백성에게 그들을 속박하는 죄를 극복할 능력을 주셨다. 그분은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고 치유하시며, 성령을 보내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시고, 자신이 베푸는 구원의 사랑이 바위처럼 견고하다는 확신으로 우리를 위로하신다. 그분은 또한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 기업을 상속받게 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작고 고립된 은혜의 대리인이 되어 우리 “임의대로의 친절”을 베풀며 살도록 놔두지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허락하셨다. 믿는 자는 교회에 등록함으로써 멤버십 언약을 맺고, 한 가족이 되고,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세상 안에서 선교 사역을 행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가 된 사람들을 일상에서 돌보며, 필요할 때마다 교훈과 책망을 받고, 권징을 행하는 목회자와 장로들을 지원하며, 하나님의 가족처럼 행동하고, 아직 하나님의 귀한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의 가정과 가족과 교회로 인도하는 일을 실천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예수님의 역설은 특히 오늘날과 같은 탈-기독교 세상에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전달되는 전염성 있는 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일깨워준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전염성 있는 은혜 안에서 살 수 있을까? 그런 은혜가 행해지는 현장을 보려면 요한복음을 펼쳐 예수님이 행하신 첫 번째 기적(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을 살펴봐야 한다. 예수님은 급진적이고, 부인할 수 없는 환대를 통해 전염성 있는 은혜를 전하는 방법을 친히 보여주셨다. 그로 인해 하찮은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평범한 결혼식이 우리를 텅 빈 상태에서 충만한 상태로 변화시키는 기적의 현장이 되었다. 당시에 마리아가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요 2:5)고 말한 대로 우리가 행한다면, “전염성 있는 은혜” 곧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을 중앙으로 옮겨주는 은혜,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은혜, 예수님이 주님인 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은혜가 우리의 것이 된다.


간단하지 않은가?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내면에서 우러나는 순종을 행할 의지를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다. 우리는 은혜를 받고 우리의 십자가를 짊어지기 전에는 순종할 수 없다. 속되고 그릇된 우리의 정체성과 우상들을 우리의 목숨과 함께 버릴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순종할 수 없다. 복음은 우리가 한때 사랑했던 것들을 버리는 것과 함께 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비로소 순종할 수 있다. 우리는 자아에 대해 죽을 때 비로소 순종할 수 있는 자유를 발견한다. 수잔 헌트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반역자에서 구속받은 자로 변화시킬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받는다.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된다(고후 3:18). 즐거운 순종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다(요 14:15)”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으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베푸는 것이 상처가 될 때까지 베풀 수 있을까? 그렇다. 하나님이 우리가 강하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 2:14).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하다. 심지어 죄와 싸울 때도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인 우리가 강하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 대한 순종(이것은 자아에 대한 죽음이요, 육신의 정욕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다)은 자유를 가져다준다. 그래서 버림받고 멸시받는 사람을 보면 우리도 한때는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안타깝게 여겨 양팔을 활짝 벌려 환영하고 빵과 고기를 나눠줄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도 그러했고, 기독교 신앙을 무시하거나 멸시할 뿐 아니라 기독교적 가치가 참된 동정심과 관심과 다양성을 해친다고 생각하는 오늘날의 탈-기독교 세상에서도 여전히 마찬가지다.



이 글은 로자리아 버터필드, 복음과 집 열쇠(개혁된실천사)의 일부를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간추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급진적이고, 부인할 수 없는 환대를 통해 전염성 있는 은혜를 전하는 방법을 친히 보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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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Rosaria Butterfield

로자리아 버터필드는 오하이오주립대학교 교수이다. 시러큐스대학에서 영어학 및 여성학을 가르치던 교수였다. 레즈비언의 삶을 청산하고 그리스도께 돌아온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뜻밖의 회심(아바서원)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