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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가정이 무너진 시대에 교회는
by 김형익2022-10-17

우리 사회는 개인적으로는 고독의 병리적 현상을, 사회적으로는 가정 붕괴의 참혹함을 경험하는 고독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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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심각한 저출산율에 대한 글을 쓰면서, 우리 사회의 그늘진 사각지대를 보여주는 여러 지표를 보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율과 노인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위다. 전체 자살률은 2003년 이래 줄곧 1위 자리를 수성하고 있다. 가족, 친척 등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 채 홀로 살다가 임종을 맞고 한참 지나서야 주검이 발견되는 고독사 문제도 심각하다. (고독사는 1990년대 일본에서 나 홀로 죽음이 급증하면서 생긴 신조어다.) 우리나라의 독거노인 비율은 지난 7년 동안 매해 20퍼센트 선을 유지하고 있다. 65세 이상 노인인구 중 혼자 사는 사람이 다섯 명 중 한 명이라는 말이다. 독거하는 사람은 비단 노인만이 아니다. 다양한 이유로 사회 진입에 어려움을 겪거나 장기불황 등 상황적 이유로 원치 않게 홀로 살게 된 2, 30대 인구도 지속해서 늘고 있고, 그만큼 2, 30대 청년 고독사 비율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가정이 필요한 사람들 


노인 빈곤율, 노인 자살률, 일반 자살률, 독거노인 비율, 1인 가구 비율, 고독사 등의 통계들을 분석하는 사람들은 그 원인으로 저출산에 따른 외동 자녀 증가, 장기간의 경제 침체와 실직률 증가, 개인주의 문화 확산, 독신(비혼) 및 이혼 증가 등을 꼽는다. 그러나 나에게 이 통계가 보여주는 것 하나를 말하라면, 그것은 가족의 붕괴다.


여기에 더해, 보육원에서 성인이 되어 자립하게 된 청년들을 주목하고 싶다. 다양한 이유로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거나 부모를 떠나 보육원에서 자라게 된 아동, 청소년들이 있다. 그들은 만 18세가 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보육원에서 나와야 한다. 그나마 지난해(2021년) 개인 의사에 따라 보육원에서 만 24세까지 머물 수 있도록 기간을 연장하는 법안이 통과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통계를 보면, 해마다 보육원을 나와 자립하는 청년은 2,5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지자체별로 상이하지만, 이 청년들은 자립지원금 명목으로 최소 500만 원에서 1,500만 원을 받고 홀로서기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보육원이라는 공동체에 속해 있다가 갑자기 홀로 사회 속으로 뛰어들게 된 앳된 청년들이 느끼는 경제적, 심리적 부담은 상상하기 힘들다. 이들의 평균 소득은 최저임금에 못 미치고, 이들 중 2/3는 정부 지원금에 의존하여 살아야 한다. 이들에게 대학 진학은 꿈같은 이야기다. 정착금으로는 한 학기 등록금과 생활비를 감당하기도 벅차다. 그러다 보니 보육원에서 자립한 청년 10명 중 8명은 우울증과 공황장애 등 심리적 문제를 안고 있고, 자살을 생각해 본 청년의 비율은 50퍼센트에 달해, 그 연령대의 일반 청년들이 14퍼센트인 것과는 격차가 크다.

 

두 달 전 내가 살고 있는 광주의 보육원에서 자립한 두 청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다. 이들은 18살, 19살이었다. 한 청년은 자립지원금 대부분을 대학 등록금과 기숙사비로 지출했고,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 보육원 관계자에게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 너무 힘들다”고 호소했다고 한다. 마음이 아파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들이 필요로 한 것은 가족처럼 기댈 수 있는 공동체였다. 


고독 사회


우리 사회는 개인적으로는 고독의 병리적 현상을, 사회적으로는 가정 붕괴의 참혹함을 경험하는 고독 사회다. 성경을 믿는 신자로서 나는 내가 살아가는 사회의 어두운 면들을 볼 때 아프고 슬프지만 크게 놀라지는 않는다. 인류의 첫 사람 아담이 타락한 결과 아담의 모든 후손이 예외 없이 죄와 비참의 상태에서 살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7).

 

하나님께서는 본래 인간을 고독한 존재로 창조한 것이 아니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좋지 않다고 평가하신 것은 아담의 독거였다(창 2:18). 지금도 죄와 저주로 말미암아 인간이 극도의 고독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좋게 보실 리 없다. 아담을 위해 하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친히 두 사람을 부부라는 가족 공동체로 묶어 주셨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주심으로써(창 1:28), 가정을 통한 번식과 공동체의 형성을 의도하셨다. 영원히 공동체로 존재하시며 세 위격 안에서 최고의 기쁨을 누리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기쁨을 주어 누리게 하시려고, 사람을 공동체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은 고독과 외로움을 모든 인간의 실존 속에 가져왔고,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겪고 살아가는 죄와 비참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다. 고독사, 노인 빈곤율, 노인 자살률, 보육원 자립 청년들이 겪는 어려움은 모두 고독이라는 피할 수 없는 인간 실존과 연결된다. 본질상 타락한 인간이 만들어가는 사회는 고독 사회이고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개인주의라는 시대 정신과 문화적 흐름은 외로움을 증폭할 뿐이고, 어떤 정부도 현상에 대한 후속 조치를 넘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독거노인 문제의 해결책으로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을 개발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이것은 기술문명이 최고로 발달한 세상이 고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실례다. 고독과 외로움의 문제는 인간의 죄와 관련된, 영적 근원을 가진 문제이기에 고도로 발달한 세상이라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정직하고 깊숙하게 우리가 사는 고독 사회를 바라본다면, 절망 외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다른 선택은 없어 보인다.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가정, 교회


하지만 희망이 있다.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죄와 죄책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셨고 그들을 성령 안에서 결속하는 새로운 가정으로 만드셨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단순히 개개인의 영혼이 구원받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깨어진 관계와 무너진 가정을 구속하셨다. 그것이 교회다. 주님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 12:50)라고 하셨고 바울 사도는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선언했다(엡 2:19). 그리스도께서 가정이 무너진 세상에 오셔서 가정을 구속하셨다는 소식은 외로움에 사무친 인간과 고독 사회에게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분리되고 깨어진 모든 관계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고 깊은 결속을 통해 교회의 하나됨을 경험하게 하신다.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 그 저녁에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 것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실 구속이 가져올 교회의 본질을 보여준다(요 13:34-35). 교회는 신자들이 단지 예배를 위해 모였다가 흩어지는 느슨한 클럽이 아니다. 교회는 외로움을 가속하는 세상 문화를 거슬러, 결속을 만들어내고 관계의 깊이를 추구하며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서로를 돌보는 가정으로 부름을 받았다. 


초기 교회와 21세기 교회


로드니 스타크는 기독교의 발흥에서 초기 기독교가 박해 속에서도 고속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로, 2세기 중반과 3세기 중반에 약 15년 동안씩 로마제국에 창궐했던 역병의 상황을 지적했다. 두 차례의 역병은 때마다 제국 인구의 25-35퍼센트를 앗아가는 가공할 역병이었다. 접촉을 통해 병이 전염된다는 사실 때문에, 부자와 의사들은 모두 도시를 떠났고 심지어 가족들조차 병에 걸린 가족을 돌보지 않고 떠날 정도였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도시를 떠나지 않았고 버려진 병자들을 돌보았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물론 그리스도인들도 감염되어 죽기도 했지만, 감염병으로 인한 그리스도인의 사망률은 비그리스도인의 1/3에 불과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돌봄으로써 죽음 대신 회복을 경험했던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병자들을 돌보았던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은 로마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이 일로 수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21세기에도 이런 일이 가능할까? 코로나 팬데믹에서 경험했듯이, 고대 세계와 달리 현대의 전염병은 정부와 의료기관이 감당하고 있어서 초기 교회와 같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두드러진 역할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지금 같이 관계와 가정이 무너진 고독 사회에서 교회가 주님이 구속하신 가정으로서의 교회를 회복하고 그렇게 존재한다면, 외로운 이들을 두 팔 벌려 환대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결속을 보여준다면, 21세기의 세상에 교회보다 더 충격적인 메시지가 있을까? 


보육원에서 자립한 청년들을 돕는 한 사역자의 말이다. “이들은 정서적으로 불안하다 보니 매주 한두 번이라도 꾸준히 연락하며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하다. 이들에게는 ‘사회적 가족’을 만들어줘야 한다.” 환대의 전통 속에서 교회는 외로운 노인과 외로운 청년들의 가족이 되어줄 수 있을까? 


주님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 희생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우리가 현세에서 누릴 백 배의 가족은 교회다. 가정이 무너진 세상에서 서로 사랑하는 하나님의 가정으로 존재하는 교회는 세상이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복음이다. 두 달 전 내가 사는 도시 광주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두 청년이 우리 교회의 청년들이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교회는 외로움을 가속하는 세상 문화를 거슬러, 결속을 만들어내고 관계의 깊이를 추구하며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서로를 돌보는 가정으로 부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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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형익

김형익 목사는 건국대에서 역사와 철학을, 총신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인도네시아 선교사, GP(Global Partners)선교회 한국 대표 등을 거쳐 지금은 광주의 벧샬롬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 ‘율법과 복음’, ‘참신앙과 거짓신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