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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회고와 반성, 그리고 도약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을 위하여

by 김경호2022-10-12

우리의 세계관도 잘못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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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

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회고: 1970-2003년까지 


국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시작은 1970년대부터입니다. 인물로는 손봉호 교수와 문서 선교사인 웨슬리 웬트워스(Wesley Wentworth)를 통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목적은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데 있습니다.


그 이후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세계관 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첫 모임은 1980년 초, 당시 IVF 사무실에서 제임스 사이어(James W. Sire)기독교 세계관과 현대 사상을 읽고, 토론 모임을 가진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계관 모임의 1세대는 강영안, 김헌수, 송인규, 신국원, 양성만, 오창희, 이승구, 이정석, 황영철, 홍병룡이었습니다. 세계관 모임이 얼마나 활발하게 진행되었는지, 당시 원서의 출판과 번역이 늦게는 5년, 빠르면 2, 3년 만에 나왔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당시 기독교 세계관은 1970년대 광주사태와 마르크시즘을 중심으로, 사회변혁의 논리를 치열하게 전개하던 상황에서, 나름의 “대안적 이론”으로 기대감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정체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원년 멤버들이 유학과 취업으로 흩어졌고, 세계관 각론이 나오지 않으면서,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서의 문화 분석은 거의 방어적으로, “영적 비평”(사탄의 문화)이라는 형태로 비약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1990년대 기독교 세계관은 원론을 반복하는 것 외에 이론적 측면에서나 실천적 측면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어놓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기독교 세계관의 효용성에 대한 의문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기독교 세계관은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 위기에 대한 인식은 2002년 ‘복음과 상황’, 2003년 ‘신앙과 학문’에서 표출됩니다. 먼저, 2002년 ‘복음과 상황’에서 일어난 비판과 제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박총은 기독교 세계관이 원론에 머물러있고 인지-명제적 접근법만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기독교 세계관을 “명제성”에서 “생생한 이야기”로 되살려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최태연은 모던-명제성과 포스트모던-이야기라는 등식은 지나친 단순화라고 비판하고, 모던과 포스트모던은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양희송은 세계관의 문제가 내러티브적 성격을 포착하지 못하고 명제화하는 작업을 주된 과제로 설정함으로써, 최종 목표가 그것을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것”에만 머물렀다고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내러티브만이 살아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정정훈은 기독교 세계관이 이원론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현실 속에서는 그리스도인들끼리 모이는 단체,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논리를 바탕으로 기독교 내부와 외부의 경계선을 긋고 그 내부에만 머물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따라서 먼저 타자의 얼굴을 솔직하게 대하고, 소모적인 논쟁보다는 서로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대화해 보기를 제안했습니다. 이원석은 기독교 세계관이 가장 우월한 세계관이고, 한국 교회에 가장 적합한 세계관이 아니라고 비판하면서, 세계관의 다양성을 제안했습니다. 


2003년 ‘신앙과 학문’에서 일어난 비판과 제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최태연은 개혁주의 세계관이 기독교 세계관의 전부일 수 없다는 점, 기독교 세계관을 구체화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 그리고 실천을 위한 전략과 행동이 부족했다는 점을 비판했습니다. 그 대안으로 함께 연구하고, 다양한 연구자원을 넓혀 가야 한다고 말하며, 결국 다양한 세계관 가운데 가장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세계관 쪽으로 결정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김기현은 세계관 운동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고, 사회 참여의 근거는 창조가 아니라 십자가이며, 세계관의 문제는 이원론보다 혼합주의라고 비판하면서, 이에 대해 다양한 변혁 모델 가운데 상황에 맞는 것을 선택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양희송은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개혁주의 신학에 의해 독점되고 있고, 창조-타락-구속이라는 개념적 틀에 여백이 많으며, 세계관의 개념 자체가 느슨하게 정의됨으로써 가지는 오해나 왜곡이 많다고 비판하면서, 이론은 그만하고 실천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승구는 기독교 세계관을 없애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 없애야 하는 것이 용어라면 상관없지만, 내용이 비성경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또한 기독교 세계관의 표현, 제시 방식을 내러티브로 바꾸자는 비판에는 동의하지만 그 내러티브는 명제성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보았고, 이러한 세계관은 반드시 성경의 가르침이 기준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일이 그 방향이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이상의 2002년과 2003년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비판과 제안은, 비판을 통해 위기의식을 가지면서, 동시에 여러 다양한 제안들을 통해 탈출구를 찾았고, 그 이후 반성과 도약의 발판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반성: 무례한 말투, 무례한 전투, 무례한 태도! 또는 잘난 척, 거룩한 척, 완벽한 척! 


헤르만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는 자신의 저서인 서양 문화의 뿌리에서 이론적 탐구가 반박보다는 신뢰를 추구하는 대화의 길이자 자기 검토의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 많은 무례함을 보여 왔습니다. 리차드 마우(Richard J. Mouw)는 이것을 무례한 말투, 무례한 전쟁, 무례한 태도라고 부르며, 그 사례를 소개합니다. 무례한 말투의 예로, 마우는 귀담아들으시는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교회는 언어 사용에 있어서 모델 공동체가 되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우는 17세기 청교도와 퀘이크교도 사이의 논쟁을 하나의 본보기로 보여줍니다.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는 한 팸플릿에서 퀘이커 교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모욕했습니다. “술주정뱅이, 욕쟁이, 호색가, 음탕한 자들, 교황 절대주의자보다 나을 것이 없다.” 반면에 퀘이커 지도자인 제임슨 네일러(James Naylor)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청교도들의 비난에 응수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청교도들을 “뱀, 거짓말쟁이, 마귀의 자식, 저주받은 위선자, 멍청한 개망나니”라고 말했습니다. 무례한 전투의 예로, 마우는 무례한 말투 안에는 십자군식 의식구조, 즉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무례한 전투가 포함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무례한 태도란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에게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데이비드 키네먼(Davie Kinnaman)과 게이브 라이언(Gabe Lyons)나쁜 그리스도인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외부인들이 보기에 어떻게 비치는지를, 잘난 척, 거룩한 척, 완벽한 척이라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외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반감을 느끼는 이유는 어떤 신학적 입장 때문이 아니다. 그들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잘난 척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들과의 대화에서 그들만의 잘난 척하는 분위기가 분명히 있습니다. “거룩한 척하는 가면을 쓰고 싶은 유혹은 죄를 짓지 않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다른 중요한 신앙의 우선순위들과 균형을 이루지 못할 경우 자신만 우월하고 완벽한 척한다는 이미지를 풍기게 될 소지가 있다.”


도약: 정체성, 다양성, 그리고 경계-투과성 


지금까지 세계관의 회고와 반성이 이런 수준이라면, 우리의 세계관도 잘못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합니다. 브라이언 왈쉬(Brian J. Walsh)는 기독교 세계관도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습니다. ‘세계관이 어떻게 억압적 이데올로기로 바뀔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왈쉬는 다섯 가지로 답합니다. 


첫째, 세계관이 전체 체계로 간주되며, 세계관 자체를 지나치게 강조하게 될 경우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둘째, 세계관이 보편적 최종성을 대표할 때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셋째, 세계관이 성경적 역학성을 잃을 때,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즉, 방향, 방향 상실, 재방향이라는 이러한 요소를 잃어버릴 경우다. 만일 방향을 상실하게 될 때, 그 방향을 재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 재방향을 통해 세계관이 수정될 수 있어야, 세계관은 활력, 힘, 통찰력의 깊이를 가지게 된다. 넷째, 세계관이 변화하는 문화적 맥락에 부적절하거나 논리에 맞지 않을 때,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된다. 다섯째, 세계관은 자기-폐쇄적 기독교 공동체에서 안전에 대한 방어적 정신을 섬길 때,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된다. 


따라서 나는 세계관의 도약을 위해, 정체성, 다양성, 그리고 경계-투과성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정체성이란 “개혁주의 세계관의 입장”을 의미합니다. 이런 개혁주의를 정체성으로 표현하는 세계관으로는 2003년부터 이승구의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2005년 신국원의 니고데모의 안경, 2008년 송인규의 새로 쓴 기독교, 세계, 관, 2020년 최용준의 성경적 세계관 강의 등이 있습니다. 또한 다양성이란 “기독교 세계관의 입장”을 의미합니다. 기독교란 넓은 범주의 종교를 의미합니다. 개혁주의보다 범위가 넓고 다양합니다. 양희송의 세계관 수업은 이러한 다양성을 대표하는 책입니다. 그는 다양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째, 세계관은 “관”으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청,” 세계“미,” 세계“향”으로도 표현될 수 있습니다. 둘째, 세계관은 명제성이 아니라 이야기를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세계관은 명제보다 이야기를 통해 더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런 다양성과 이야기성에 따른 세계관의 판별 기준은 복잡성을 감당해 낼 역량, 그리고 자기 오류 불가능성에 반대하는 자기성찰능력입니다. 경계-투과성은 개혁주의와 기독교 세계관의 범주 외의 비주류 세계관을 의미합니다. 경계-투과성은 개혁주의와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많은 비판점을 가진 세계관입니다. 그러나 나는 소수의 입장이라 하더라도 성경의 관점을 조금이라고 반영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을 정체성이나 다양성 안으로 투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전성민의 세계관적 성경읽기는 이러한 경계-투과성을 대표하는 책입니다. 그는 경계-투과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째, 경계-투과성은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가 우리의 선입견을 깨뜨리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둘째, 경계를 넘는 힘은 바깥과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나타난다. 즉, 우리의 삶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 끊임없는 교류가 필요하다. 셋째, 이러한 노력에는 고집이 아니라 겸손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성경 읽기가 자기 확신 강화제, 즉 고집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는 정체성과 경계선에 대한 해결책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경계가 없다면 한 집단은 정체성을 잃고 그 집단이 누릴 수 있는 영향 자체를 포기하는 셈이 된다. 그렇지만 기독교 공동체가 경계를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높은 장벽과 같아서는 안 된다. 그 경계는 소통을 위해 열려있어야 한다. 그래야 변화를 위해 참여할 수 있고 밖에 있는 아름다움을 인식하기도 하고 그로부터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도약의 발판을 딛고 좀 더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 봅시다! 

나는 세계관의 도약을 위해, 정체성, 다양성, 그리고 경계-투과성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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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경호

김경호 목사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M.Div.) 논문 “세 가지 유형의 개혁주의 세계관 연구”로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연구단체 Worldview & Work를 설립하여 연구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20년부터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국내외에서 세계관 교육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