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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문화

성경은 관용을 권장하는가, 불관용을 권장하는가?
by Josh Moody2018-12-12

성경은 관용을 권하는가? 아니면, 금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사랑과 자비와 친절을 권하는 책이라고 말한다. 이때 그들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생각한다(눅 10:25-37). 또한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도 돌려 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린다(마 5:39). 그리고 “비판하지 말라”는 유명한 구절도 떠올린다(마 7:1). 이처럼 사랑, 친절, 하나님과 이웃을 강조하는 성경 구절들을 고려할 때, 과연 어떻게 성경이 관용적인 사회를 억제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이런 성경 구절들은 우리에게 단순히 관용 베푸는 수준보다 더 나아간 삶, 즉 적극적인 봉사와 사랑 및 긍휼의 삶을 요구하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성경이 관용과는 너무 거리가 먼 책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에는 가나안 정복에 대한 기록이 있다. 엘리야가 직접 자기 손으로 바알의 선지자를 죽이는 역사도 보여 준다(왕상 18:40). 또한 예수님은 신약성경에서 지옥에 관해 자주 말씀하신다. 이런 성경 말씀들은 관용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성경이 권하는 것은 관용(tolerance)인가? 아니면, 불관용(intolerance)인가?


1. 성경은 관용과 불관용 모두를 강조한다


우리는 성경을 시대와 상황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따를 수 있는 이상적인 관용의 본보기들을 보여 주는 책으로 가정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편향적인 관점으로 성경을 규정하면, 해석상 중대한 실수들을 많이 범하게 된다. 성경의 균형적 특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다음처럼 소리를 높일 것이다. “잠깐만 멈춰 봐요. 당신은 지금 해석을 문제 삼는데, 누가 당신처럼 해석하는 것을 옳다고 할까요?” 


나는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만약 우리의 모든 대화를 단 한 가지의 방법으로만 해석하는 세상 속에 산다고 가정한다면, 그런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또 만일 우리가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영원한 법적 효력을 발휘하는 단 하나의 행동 규범으로 삼는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아니면, 현대인들을 위한 윤리적 행위의 기준으로 할리우드의 공포 영화만을 지정한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될까? 혹은 공항의 체크인 설명서와 똑같은 방법으로 시를 해석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또 어떠할까? 분명히 심각한 혼란과 혼동이 우리 삶에 찾아올 것이다.


성경의 각 권이 ‘참되고 권위 있는’ 말씀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하지만 각 권이 모두 다 ‘똑같은’ 말씀은 아니다. 성경 전체는 우리를 교훈하기 위해 기록되었지만, 각 권 안에 제시된 본보기들 중 어떤 것들은 우리가 피해야 할 본보기이고, 다른 것들은 닮아가야 할 본보기이다. 


2.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라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관용하신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당신은 하나님이 강간, 근친상간, 살인, 혹은 학살을 너그럽게 관용하시기를 원하는가?


성경은 선과 악을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심판날이 있음을 가르친다(롬 14:10; 고후 5:10). 성경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므로(삼상 2:2; 사 6:3), 우리는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고 가르친다(신 6:24; 시 31:19). 또 성경은 심판하시는 권세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심판할 권한을 가진 자들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영원한 심판이다(마 25:46; 막 9:43). 하나님의 영원한 지옥 심판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정복 전쟁과 살상에 대한 기록을 마주할 때, 반드시 확인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하나님은 누구시며, 우리는 누구인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해야 했던 주변 나라들의 침략, 그를 통한 고난, 그리고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되어야 했던 슬픔은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다. 신명기 28장은 순종에 대한 축복과 불순종에 대한 저주를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저주는 애굽이나 이스라엘이 정복한 나라들에게 내리신 형벌과 같은 심판을 말한다. 이러한 신명기의 저주 예언은, 의로운 왕들과 선지자들이 예견했던 것처럼(왕하 22:13; 렘 25장), 결국 이스라엘의 멸망과 유배로 성취되었다.


3. 관용(tolerance)과 상대주의(relativism)의 차이를 기억하라


우리가 사는 이 세속적 시대에는 상대주의가 넘쳐난다. 진리는 보는 사람의 관점이나 교육 배경 그리고 성격에 의하여 다르게 정의된다. 많은 사람들은 상대주의가 사람들이 서로를 판단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편협함을 방지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아이러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는 이 시대의 사고관이 과연 관용과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 전혀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된 관용은 상호 간의 차이를 전제한다. 예를 들면, 관용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당신이 말하는 것에 동의하진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가졌음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상대주의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과 내가 이미 동의하는 것처럼, 당신이 지금 주장하는 바는 단지 상대적인 사실일 뿐입니다.” 이처럼 상대주의는 옳고 그름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관용의 필요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4. 관용이 어디서 오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로마 제국이 가진 상대적인 관용의 사례가 있었다. 거기서는 황제와 그가 섬기는 신을 따르는 종교들만 선택적으로 용납되었다. 그러므로 “시저가 주님입니다”(Caesar is Lord)라고 말하기를 거부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 및 백성들은 고문과 죽음을 당해야만 했다. 로마 제국의 상대적인 관용은 왕과 그들이 정한 우상 이외의 다른 대상을 섬기는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관용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세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멸망 후에 그 제국이 가진 상대적인 관용의 정신을 계승하여, 자신들만의 관용 교리를 만드는데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중세교회는 자신들의 교회와 문명을 보호하려고 다양한 군사력과 지도자들에게 의존했다. 그리고 이런 군사적인 개입에 크게 의존했던 중세교회의 행보는 교회의 참 모습을 훼손시키고 말았다.  


개신교 개혁자들은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목적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그들 역시 왕들과 군주들을 의존했다. 왕들과 군주들의 도움을 얻어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의 공격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려고 한 것이다. 존 로크(John Locke)와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의 작품을 통해 나타나는 현대적 관용은 그와 같은 부정적 교회 역사에 대한 개신교의 반성 속에서 생겨나게 된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관용 사상이 발전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는 사회의 출현에 기대를 갖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이런 종교적 관용이 점점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위그노들과 유대인들을 포함한 다른 소수 종교의 성도들이 신변의 안전을 위해 런던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그 후 미국으로 건너 갔다. 


관용은 확실히 기독교적인 사상이다. 관용의 근거는 ‘진리는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라는 믿음이다. 따라서 관용은 종교적인 신념을 공적으로 표현하는 삶을 막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공공장소에서 기독교의 윤리를 옹호하는 것을 금지하지도 않는다.


물론 성경은 우리가 이웃에게 단순히 관용을 보이는 것 그 이상을 요구한다. 우리는 관용을 넘어 사랑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관용이란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시작된 뿌리 깊은 기독교 사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Does the Bible Promote Tolerance or Intolerance?

번역: 김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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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Josh Moody

조쉬 무디는 College Church의 담임 목사로 God Centered Life Ministries의 설립자이며 대표이다. 대표 저서로 How the Bible Can Change Your Life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