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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절제된” 아름다움인가? 예술-공포증인가?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을 위하여

by 서나영2022-10-05

과연 기독교는 진정한 아름다움은 절제하고, 아름다움의 그림자들로 교회와 삶 속에 채워나가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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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

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미학에 대한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많은 이론과 담론과 논란이 존재한다. 그리고 시대와 출신을 불문하고 미학에 대한 연구자들이 내리는 공통된 결론이 있다. “아름다움은 어렵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종류가 많고, 느끼는 통로가 다양하며, 주된 통로인 예술 자체도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그것에 대한 생각과 관점이 역사와 문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같은 사회라도 개개인의 취향과 맞물려 그 누구도 쉽게 표현하거나 단정 지을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역사는 아름다움의 의미를 찾는 것을 포기한 적이 없다. 아름다움을 의도적으로 멀리했던 시대에도 아름다움을 찾고자 하는 갈급함은 오히려 커져만 갔다. 그것은 아마도 마일즈(Margaret R. Miles)의 경고처럼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행복을 결정하기 때문에, 무엇이 아름다운가를 잘못 판단하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수많은 철학적 글들을 볼 때마다, 또 예술작품이나 비평을 대할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개혁주의 교회와 성도들은 이런 글들을 읽고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적용을 할까?” 또 예술작품을 대하고 대중 문화예술을 접할 때마다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한 생각이 있다. “개신교회와 성도들은 이 작품을 경험할 때 어떤 아름다움을 느꼈고 어떤 결론을 얻었을까?”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으로 미(美)를 연구한다는 것은 단언컨대 그 어렵다는 미학보다 더 답답하고 어려운 일이다. 개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술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감각적 사유의 개인차와 미적 취향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구원론을 믿고 같은 교리 아래 같은 신앙의 문화 속에 걸어간다고 해서 미적 수준이나 기준이 맞추어져야 한다는 법은 없으며, 자본과 연결되어 있는 예술의 필요에 대한 우선순위가 다르다.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이 개혁주의 기독교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칸트가 말한 순수이성, 실천이성, 판단력 비판의 구분으로 인한 미의 독립을 인정함과 동시에, 기독교 신학과 세계관 안에 재통합하는 복잡하고 광대한 범위의 작업이 쉽게 이루어질 리 없다.


대부분의 한국 개혁주의 신자들은 ‘예술’과 ‘아름다움’의 중요성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개신교인들의 교회 현장과 삶에서 미적 영역들을 적용해볼 때, 종교개혁 전통 아래 몇 가지 공통된 현상이 나타난다. 그중 하나가 그들이 무의식중에 가지고 있는 “이미지 공포증”(Iconofobia)이다. 종교개혁의 표면으로 드러나는 가장 큰 결과가 ‘성화상 파괴’였듯이, 그들에게는 “이미지의 사용은 우상숭배로 변질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결국 한국의 개신교인들도 교회의 장식과 예술적 장치를 모조리 없앤 칼뱅과 청교도의 후예가 아닌가!


이로 인해 흔히 나타나는 현상은 “절제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예술의 힘을 두려워한다”고 말해도 무방할 듯하다. 개신교 신학과 교리는 말씀 이외에 더 큰 영향을 끼치는 통로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으며, 예술의 강력한 영향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움직이는 것에 걱정이 많다. 그리고 개혁신학자들은 말한다. 종교개혁 이후, 네덜란드 중심으로 “예술가들은 일반은총의 개념을 이해하고 종교운동에 동참했으며, 세상 가운데 그들의 소명을 되찾았다”고 말이다. 정형화된 기독교의 이미지와 신비로운 “천상의 예술 언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베푸신 세상과 일터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예술가를 향한 더 넓은 비전과 사역을 제시함을 주장했다. 이것은 신앙생활 가운에 예술의 힘을 견제하면서, 동시에 예술인들의 소명에 대해 지혜로운 대답이고 논리적인 권유였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예술사조는 급격하고 분명하게 아름다움과는 상관없는 미학으로 흘렀다. 세상의 문화예술을 여과 없이 공유하는 그리스도인들과 예술가들 또한, 같은 양식과 재료와 내용을 가지고 예술을 표현하고 감상하는 세상이 되었다. 예술과 문화의 영향력은 예술적 감각이 있고 사유가 가능한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인식하고 있건 아니건, 사회에 속한 인간이라면 그리스도인-비그리스도인 구분 없이 그 시대 예술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다. 한스 로크마커가 말했듯, 보이지는 않지만 어느 집에나 존재하는 “수도관”처럼, 예술은 어느 인생에게나 “보이지 않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나른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는 문화와 예술을 세상과 공유한다. 기독교 신자들이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추하고 파괴적인 예술, 가짜와 패러디와 대량으로 쏟아내는 대중문화예술에 발맞추어 걷게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한국은 해방 이후 급격한 기독교의 부흥이 일어났고, 양적으로 성장한 교회들은 “자유로운 상상”에 근거하여 성화상의 이미지를 제외한 거의 모든 예술 양식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과 이질감 없는 디자인으로 교회 분위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대중음악 언어로, 대중의 안목과 디자인으로, 모던 스타일의 건축물로,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영상물로 예배와 교회를 채워왔다. 


그리고 이러한 개방적 움직임에는 개혁주의 세계관 운동이 배후에 있었다. 프란시스 쉐퍼와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반은총에 대한 개념과 영역주권에 대한 이해를 넓혀감과 동시에, 리처드 니부어의 다섯 가지 “그리스도와 문화” 관계 모형” 중 “기독교는 세상 문화를 변혁해야 한다”는 사명을 비전으로 채택했다. 


일명 이러한 “세계관 운동”으로 신자들은 기독교 세계관의 렌즈로 바라볼 때 예술을 수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비록 예술이 파괴적이고 추한 모습일지라도, 성도가 순례길의 과정 중 겪는 큰 스토리 안의 성화의 “과정 중”의 추함의 표현이라고 바라볼 줄 알게 되었다. 또한 대중의 안목에 맞춰 세련되면서도 기독교적 의미를 담으려는 노력이 일어났고, 순수예술가들은 모던 재료로 하나님의 심정을 표현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결과가 어떻든, 현재 개혁주의 교회의 모습은 문화의 기독교적 변혁을 목표로 움직이는 중이고, 그 내용은 대중이 추구하는 미의 기준과 굉장히 많이 닮아있다. 


최근 한 기독교 설치미술가와 개신교의 대중적 미적 기준과 취향에 대해 담론을 나눈 적이 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미적 감각과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감각에 대해 언급했다. 그리고 교회의 성도들이 경험하는 아름다움의 정도와 기준이 안타깝다고 탄식했다. 나는 그 외로움의 감정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다. 고 이어령 박사가 그렇게 반복해서 강조했듯이, 탁월한 예술가는 특권계층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 특별한 감각적 장애를 가진 불쌍한 사람들이다. 평범한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며,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초월한 세상을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 경험해본 사람만 아는 깊은 슬픔일 것이다. 칸트가 말한 숭고미는 “너에게는 아름답지 않지만 나에게는 아름다운” 그런 종류의 미가 아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일은 외로운 길이다. 


과연 기독교는 문화를, 특히 아름다움에 관계된 예술 문화를 성공적으로 변혁해 나가고 있는가? 혹시 진정한 아름다움은 절제하고, 아름다움의 그림자들로 교회와 삶 속에 채워나가고 있지는 않은가?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현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과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의 문화와 예술을 기독교 세계관으로 변혁하는 일은, 성령의 조명하심 아래 아름다움에 대한 깊은 이해로부터 시작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영이 한국 교회에 충만하게 부어지는 역사를 기대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교회와 세상에 충만한 날을 그려본다.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현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과제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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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서나영

서나영 박사는 미국 남침례신학교(SBTS)에서 교회음악(MM)과 신학(M.Div.equi.)을 공부하고, 기독교예술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총신대학교 객원교수, 미국 스펄전 대학교 초빙교수로 있으며, 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에서 문화예술파트 전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