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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를 잘못 이해했는가?①

개혁자들과 함께 아우구스티누스 읽기

by Zach Howard2022-10-02

우리의 목표는 합창이라는 큰 화음 안에서 칭의라는 주제로 울리는 음표를 주의 깊게 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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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장 칼뱅 같은 개혁자들이 성경을 빼고 가장 많이 인용한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들은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다른 주장보다도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라는 진리를 이 교부가 어떻게 옹호했는지에 관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참고했다. 그렇지만 개혁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에 관해서만은 이 위대한 교부에게서 원하는 만큼의 명료성을 찾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며, 그의 저작을 주의 깊게 읽으면 그가 이 교리를 다루는 데 있어서 모호함을 드러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에 관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안점을 두는 것은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declaring)는 점이 아니라, 의롭게 만드신다(making)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료성을 중시하는 종교 개혁자들에게는 아무리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의롭다 하심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의를 부정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런 식의 교리 표현 방식을 모호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목회자, 지도자, 교사를 위한 특집 기사 시리즈를 위해서 우리는 베들레헴 신학교에서 신학 및 인문학 조교수로 일하는 잭 하워드에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칭의 교리를 탐구하도록 요청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이해

  1. 인간의 본성에 대한 치유로서의 칭의

  2. 경건하지 않은 자를 경건케 만드는 칭의 

  3. 사건과 과정으로서의 칭의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평가

  1. 칼뱅의 아우구스티누스 칭의론 평가

  2. 믿음과 사랑의 관계

  3. 은혜의 면류관을 씌우시는 하나님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 354-430)는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실 때 그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진리를 옹호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린도전서 4:7,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1]는 바울의 질문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조차도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했다. 개혁자들도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동일한 관점으로 이 성경적 교리를 이해했다. 더불어 당시 교부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당대의 거짓 가르침과 관행에 대항하여 은혜로 받는 구원이라는 진리를 회복하고 선포하려고 노력했다. 실제로 장 칼뱅 외에 많은 개혁자가 성경 본문 이외의 다른 어떤 저자보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더 많이 인용했을 정도로 아우구스티누스는 풍부한 신학적 통찰력을 제공한 인물이다.[2]


그렇지만 칼뱅과 대부분의 다른 개혁자들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를 선포할 때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게 하시는 방법이 행위의 공로가 아니라 믿음의 은혜를 통해서라고, 갈라디아서 2:16로마서 3:20 같은 본문을 근거로 말한다. 그러나 칭의의 의미를 로마서 4:5과 같은 본문(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을 설명할 때, 또는 칭의를 성화의 과정과 구별할 때면 칼뱅 같은 개혁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생각이 달랐다. 기독교에서 칭의라는 주제가 갖는 중심 위치와 더불어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갖는 중요성을 고려할 때, 칼뱅이나 루터 또는 이후의 개신교 신학자들의 책을 즐겨 읽는 많은 독자에게 이 사실은 충격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다. 그럼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러나 이 질문에 답하는 건 절대로 쉽지 않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마지막 20년을 지배한 펠라기우스 논쟁이 16세기에 벌어진 신학 논쟁에서도 똑같이 메아리쳤지만,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는 최소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의미를 둘러싸고 16세기와 비슷한 위기는 없었다. 달리 말해서, 아우구스티누스로 하여금 신학적 성찰에 매진하도록 한 심각한 위기가 없었기에 그는 어쩌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이 무슨 의미인지에 관해서 굳이 체계적으로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건지도 모른다. 오히려 칭의에 관한 그의 견해는 당대 관련한 논쟁 속에서 필요했던 답변과 더불어 관련 성경 본문에 대한 설교에서 나타난다. 바로 이런 난관 때문에 우리는 칭의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해를 별도의 주제로 구분해서 파악하는 대신에 구원에 관한 그의 넓은 신학적 성찰이라는 맥락 안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 파악하기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 신학 전반에 걸쳐서 지속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사역 전반에 걸쳐 그가 분명히 밝힌 구원에 관한 통일된 시각 때문이다. 성경이 완성된 이후 그 어떤 전임자들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적 증거를 통합하여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을 구원하신다는 진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변호하고 설명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합창단 지휘자처럼 성경이 이곳저곳에서 부르는 노래를 하나의 합창으로 모아서 하나님이 죄인의 공로에 근거하여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진리를 기가 막히게 조화시킨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더 이상 중재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친교가 가져다주는 선행의 삶에서 절정에 이르며 귀결된다는 것이다.[3] 우리의 목표는 합창이라는 큰 화음 안에서 칭의라는 주제로 울리는 음표를 주의 깊게 듣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적어도 세 가지 방식으로 칭의의 의미를 상상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상한 본성에 대한 치유, 경건하지 않은 자의 변화,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사건이자 동시에 과정으로서 이해, 이 세 가지이다.


1. 인간의 본성에 대한 치유로서의 칭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원죄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는 점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는가에 관한 그의 해석을 파악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다. 로마서 5:9을 해석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인간은 자신의 뜻대로 범죄한 아담의 살로 만들어진 옷을 입었기에 아담으로부터 기인한 죄에 대한 책임을 떠안게 되었다. … 그리스도를 옷 입은 어린이들과 같이…. 그로부터 의로움에 참여하는 자격을 얻게 된다.”[4] 원죄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지은 첫 죄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타락했다는 결과이기도 하다.[5] 오염된 물이 하류의 모든 것을 감염시키는 것처럼 아담의 죄는 모든 인류를 타락시킨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원죄는 인간의 본성을 타락시켜 모든 인류가 스스로 어떤 특정한 죄를 짓기로 선택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원죄의 문제는 칭의와 관련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칭의는 단지 개인의 특정한 범죄 행위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의 본질적인 타락도 관련한 문제이다. 칭의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의 회복이라면,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런 올바른 관계가 오로지 성령의 은사가 가져다주는 인간 본성의 변화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이해했다. 하나님 앞에서의 의롭게 되는 것은 단지 지위의 변화(“용서받지 않음”에서 “용서됨”으로)뿐만 아니라, 일차적으로 본성의 변화(환자에서 건강한 사람으로)를 포함해야 한다.


이러한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가 가장 즐겨 사용한 비유 중 하나가 그리스도를 의사로, 그리고 우리를 환자로 설명한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 힘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람은 신성한 의사를 의지하게 되고, 병을 고치기 위해서 그를 향한 전적인 신뢰를 바치게 된다. 의사는 질병의 근본 원인을 제거한 다음 완전한 회복을 위해 약을 처방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칭의는 나를 고쳐 달라고 의사에게 요청하는 믿음이며, 또한 완전한 회복을 위해 온전히 의사의 처방을 따르겠다는 믿음이기도 하다.[6]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이루신 칭의의 행위를 행위에 따른 당연한 보상이 아니라 은혜로운 선물로 묘사한다. 또한 칭의 행위를 사람의 의지(will)를 고치시는 성령의 은사와 동일시한다.[7]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율법이 드러내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약하다는 것이고, 따라서 은혜가 우리의 의지를 치유하고 그 결과 건강하게 된 의지가 율법의 지배를 받거나 율법을 필요로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율법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8]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의 의미를 인간 의지의 치유로 생각한다. 더불어 인간의 본성도 치유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 결과 인간은 이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 율법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9] 이러한 치유는 죄의 용서로 시작되지만, 또한 그리스도인의 지상 생활 내내 계속되었다. 또한 예수님의 병 고침이 기적이었던 이유는 환자가 단지 병이 나았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죽은 상태였기 때문이다.[10]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과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즉 똑바른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to be iustus), 하나님이 인간의 법적 지위뿐 아니라 의지를 치유하심으로써 본성 자체를 변화시켜야만 한다.


 


1. 아우구스티누스는 반펠라기우스 저작에서 자주 이 점을 지적한다. 칭의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라고 논의할 때, 그가 구체적으로 반박하는 두 가지 예는 Spirit & Letter 9.15(WSA 1.23:152) 및 Letter 186.3.10(WSA 2.3:214)을 참조하라. 아우구스티누스 텍스트의 모든 번역은 The Works of Saint Augustine: A Translation for 21st Century by New City Press에서 가져온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용을 따라가기 어려울 때가 있으므로 인용 방법을 설명하겠다. 작품명(예: Spirit & Letter) 뒤에는 보편적인 섹션과 단락 번호(예: 9.15)가 온다. 괄호 안의 WSA는 The Works of Saint Augustine이라는 특정 컬렉션을 나타내며 숫자 “1.23:152”는 시리즈의 1부, 23권, 152페이지 순으로 해당 권을 나타낸다.


2. Anthony N.S. Lane, John Calvin: Student of the Church Fathers (Grand Rapids: Baker, 1999). 


3. 통일된 구원의 비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Matthew Levering, The Theology of Augustine: An Introductory Guide to His Most Important Works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13)을 참조하라.


4. Gerald Hiestand quotes from Augustine’s Unfinished Work Against Julian VI, as quoted in Eugene Portalie, A Guide to the Thought of Saint Augustine (London: Henry Regnery Company, 1960), 211. See also Augustine, On Original Sin, chs. 43, 252. 


5. See Gerald Hiestand, “Augustine and the Justification Debates: Appropriating Augustine’s Doctrine of Culpability,” Trinity Journal 28, no. 1 (Spring 2007): 115?39. 


6. 아우구스티누스는 설교에서 자주 이 비유의 버전을 제공하지만, 이 주제를 설교 360B에서 가장 완전하게 발전시켰다. 특히, sections 14-20 (WSA 3.11:372?76). 예를 들면, 설교 49, 80.2, 113A.13, 374.8.를 참조하라.


7. Peter Dubbelman, “Augustine’s View of Justification and the Faith That Heals,” Southeastern Theological Review 11, no. 1 (Spring 2020): 53-78. 


8. Augustine, The Spirit & the Letter 9.15 (WSA 1.23:152). 


9. 우리가 사랑을 통해 율법을 완성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임을 아우구스티누스는 분명히 한다. 


10.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를 영적, 육체적 사망과 동일시하며 종종 에베소서 2:1을 인용한다. 



원제: Did Augustine Get Justification Wrong?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무제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의 의미를 인간 의지의 치유로 생각한다. 더불어 인간의 본성도 치유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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