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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리스도인은 세상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있는가?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을 위하여

by 김경호2022-09-21

세계관 운동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반성과 대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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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

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요한일서 5:4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이 말씀의 요지는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능히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일까요?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무엘상 4:1-12에서 볼 수 있는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패배했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심지어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빼앗기고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까지 죽임을 당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일까요? 답은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짓 약속을 하셨거나! 아니면 우리의 믿음이 실제로 거짓이거나!  


나의 고민은 오래전부터 ‘교회’였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신학교를 다니면서 교회에서만 일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나에게 교회이자 곧 세상이었습니다. 언젠가 책을 읽으면서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사람은 오스 기니스였습니다. 기니스는 교회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지닌 수십 년에 걸쳐 예수님을 따라 사는 동안 그분을 아는 ‘기쁨’ 다음으로 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은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라고 자칭하는 우리들의 상태를 보며 느낀 ‘슬픔’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 가운데 이런 이중적인 감정이 있을 것입니다.


이 고민은 오랜 친구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항상 나를 따라다녔고 나를 괴롭혔습니다. 결국 나는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한 편의 설교를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고민의 시작이 사무엘상 4:1-12의 말씀이기에, 그 답도 이 본문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생각은 하나님이 틀리실 리는 없다는 것이었고, 그렇다면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기준의 문제’였습니다.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이스라엘이 두 번째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언약궤와 제사장을 동원했다는 사실이 그 기준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 즉 하나님에게 있느냐 아니면 사람에게 있느냐에 따라 “절대적 신앙과 상대적 신앙”(혹은 “성숙한 신앙과 성숙하지 못한 신앙”)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내 생각의 결론은 기준을 하나님께 맞추는 신앙이 곧 절대적 신앙이고, 기준을 사람에게 맞추는 신앙이 곧 상대적 신앙이라고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상대적 신앙이란 모양-형식만 있고 내용-마음이 없는 신앙이라고, 자기 긍정-위선만 있고 자기 부정-회개는 없는 신앙이라고, 노력은 있지만 기도가 없는 신앙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또한 나는 이런 거짓된 믿음의 결과를 두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하나는 ‘처절한 패배’이고, 다른 하나는 ‘역할의 역전’입니다. 여기서 역할의 역전이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그 믿음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지 못할 때 나타나는 역전 현상을 의미합니다. 이는 언약궤를 동원한 이스라엘보다 오히려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어라”라고 용기를 낸 블레셋이 이긴 현상을 의미합니다. 언약궤 대 용기! 결과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승리였습니다. 


역할의 역전과 역-변혁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런 현실이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키네먼과 게이브 라이언은 나쁜 그리스도인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 “도대체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과 기독교에 대해 정확히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두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한 3년간의 방대한 인터뷰와 조사를 통해 비-그리스도인의 생각 속에 담긴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정확하게 드러내었습니다.


나는 두 저자가 6가지 주제로 한정한 주제 중에서 특별히 첫 번째 ‘위선적’과 두 번째 ‘전도에 지나치게 집중하는’과 여섯 번째 ‘타인을 판단하는’이라는 세 항목에 주목했습니다. ‘위선적’이라는 이미지는 통계에서 세 번째 순위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위선적이라는 이미지의 문제점은 위선 그 자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터뷰의 결과에 의하면 비-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인이나 다 위선적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 우리의 기준을 가지고 비-그리스도인들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실 우리는 위선적인 이미지를 자초했습니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판단으로 이어집니다. 키네먼과 라이언은 그리스도인이 ‘타인에 대한 판단’의 동기가 남을 돕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정죄하거나 우월감을 나타내려는 이미지임을 분석했습니다. 결국 이런 위선과 판단의 이미지는 매우 불쾌한 ‘전도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비-그리스도인은 전도자를 통해 자신이 진심 어린 관심을 받고 있다고 보지 못했고 마치 ‘목표물’이 된 것과 같이 느꼈으며, 전도에서 사용되는 대화는 일종의 “책략”과 같은 “대화 사기”로 여겼습니다. 


리차드 마우는 이런 불쾌한 방식의 전도를 직접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한 남자가 상냥하게 말을 걸고 15분가량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전도자가 갑자기 주제를 종교로 바꾸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기 시작할 때, 마우는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밝혔습니다. 그러자 그 전도자는 “진작 그걸 얘기했어야지!”라고 내뱉고는 그 자리를 떠나 다른 상대를 물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불쾌한 전도를 체험한 마우는 자신에게 다가온 전도자의 “교양”은 하나의 ‘책략’에 불과했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마우는 그 전도자의 손에 놀아났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 술회했습니다. 그 이후에 마우는 무례한 기독교라는 책을 저술하여 전도의 수단으로서의 교양이 아니라 교양 그 자체의 가치사랑—가 중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렇다면 비-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을 비윤리적인 위선자와 판단자로 생각하는 이 결과 이면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나는 이 문제가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세계관의 문제’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행위 이전에 교회와 세상을 분리하는 이원론과 세속적 세계관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올바른 세계관의 부재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자기 스스로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비윤리적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비-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보다 더 뛰어난 이유를 일반은총으로 설명합니다. “비열함, 부정직, 그리고 불법을 저지르는 행위들에 대해 불신자들을 포함한 공공의 양심이 저항하지 않는가? 그리고 때때로 신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불신자들이 실천하는 인류애와 자비로운 행위들이 많지 않는가?” 불신자의 공공의 양심, 인류애, 자비로운 행위는 타락에도 불구하고 죄를 억제하는 일반은총에 기인한 것입니다. 또한 카이퍼는 반정립(antithesis)을 통해 타락의 교리를 근거로, 신자의 비윤리적 행위는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영향력(반정립)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떤 세계관을 가지느냐에 따라 그 실천의 방향이 결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어떤 세계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현실은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그리스도인(christian)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해 비-그리스도인(NON-christian)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어 비-그리스도인이 우리를 향해 나쁜-그리스도인(UN-christian)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다시금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투가 재현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처절한 패배”에 따라 “역할의 역전”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야콥 끌라베이크(Jocob Klapwijk)는 이것을 “역-변혁”(inverse transformation)이라고 말합니다. 역-변혁이란 내부에서부터 변혁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외부의 것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할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사용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니라 비판적 수용을 통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비판적 수용이 아니라 무비판적인 수용을 통해 사용할 때 오히려 우리 자신이 세속화, 즉 역-변혁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하면서 애굽의 제물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이 사례를 “약탈” 개념으로 보았습니다. 이 약탈한 금과 은은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됩니다. 하나는 금과 은을 무비판적으로 우상숭배에 사용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금과 은을 비판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예배와 성막 제작을 위해 사용한 경우입니다. 여기서 예배와 성막에 금과 은을 사용한 경우가 바로 올바른 사용 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성과 대화로부터 다시 시작! 


과거 성경에서의 역-변혁과 현재의 역-변혁의 두 가지 사례는 우리에게 무척 뼈아픈 결과입니다. 따라서 세계관 운동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반성과 대화입니다. 헤르만 도예베르트는 세계관의 해결점이 대화에 있다고 보았고, 이 대화는 표면적인 접촉이 아니라 심층적인 출발점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도예베르트는 무엇보다 “무조건적인 반박”보다 “신뢰를 추구하는 대화의 길”이 열려야 하며, “추상적인 탐구”가 아니라 “자기 검토의 길” 즉 반성으로부터 이루어지는 대화이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반정립적 대립을 우선으로 하는 세계관 운동에 대한 도예베르트의 일침은 뼈아픈 충고임이 틀림없습니다. 최용준은 이런 점에서 도예베르트의 반성을 따라 자신의 논문의 제목을 “대화와 반정립”(Dialogue and Antithesis)으로 명명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과거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대한 여러 가지 비판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판이 대화와 반성의 여지가 없는 주장이라면 세계관 운동은 지적인 차원에서만 머물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반성과 대화의 여지가 있는 표현으로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 나는 A가 아니라 B(Not A But B)라는 방식의 표현보다는 A에서 B로(From A to B) 또는 A이기보다 B(B rather than A)로 표현하는 것이 반성과 대화에 더 적합한 표현 방식이라고 제안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무엇보다도 세계관을 “원리적-이론적 운동”에서 “삶의 변화와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표현하거나, 또는 “원리적-이론적 운동”이기보다 “삶의 변화와 실천”이라고 말하는 것이 반성과 대화의 여지가 있는 표현이라고 봅니다. 자! 이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2.0 버전을 위해, 반성과 대화로부터 다시 한번 시작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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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경호

김경호 목사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M.Div.) 논문 “세 가지 유형의 개혁주의 세계관 연구”로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연구단체 Worldview & Work를 설립하여 연구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20년부터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국내외에서 세계관 교육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