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출산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by 김형익2022-09-15

복음은 성도가 모든 삶의 형편에서 자족하게 하는 능력이다. 이 복음은 21세기 초저출산율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고 유효한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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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TGC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Living as Christians in a National Fertility Crisis”


우리나라는 핑크(PINK) 족의 국가다. 핑크는 소득이 낮아 아이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Poor Income No Kids)을 일컫는 신조어다. 지금 우리는 저출산율 세계 1위 국가에서 살고 있다. 2018년부터 2021년까지 우리나라는 저출산율에서 줄곧 선두자리를 지키고 있고, 이 추이로 볼 때 이 상황은 향후 수년간 계속될 전망이다. 정부가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 15년간 투자한 비용은 380조 원에 달하지만, 그 효용성은 오늘의 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분석가들은 우리나라에 저출산율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 변곡점으로 1998년 외환위기를 꼽는다. 외환위기는 대규모 구조조정과 실업 사태, 노동유연화에 따른 비정규직 양산으로 우리 사회에 기존하는 불평등의 구조를 심화, 고착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소득의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소득분배지표인 지니계수(Gini coefficient)와 합계출산율(15-49세 여성이 가임기간에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출생아 수)은 반비례한다. 불평등 지수가 높을수록 출산율은 떨어진다는 말이다.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는 OECD자료에 의하면(2021년도) 31.5퍼센트로 OECD 국가 중 최악이다. 취업자 90퍼센트가 일하는 중소기업의 임금은 대기업 임금의 60퍼센트에 그치고, 비정규직은 정규직 임금의 50-70퍼센트에 머무는 우리나라의 상황은, 임금 근로자의 상위와 하위 10퍼센트 임금 격차에서도 OECD 국가 중 최악이다. 


이런 불평등의 심화가 가져온 상대적 박탈감뿐 아니라, 세계 1위의 노인 빈곤율과 노인 자살률 등은 저소득층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위기감과 불안감을 가중하고 있고, 현실적으로 높은 생활비, 치솟는 집값, 과도한 사교육 비용, 여성의 경력 단절의 문제도 젊은 세대의 잠재적 불안 요소로 작용하여 결국 비혼과 저출산의 가속화 요인이 되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


잠깐 우리 시선을 40-50년 전으로 돌려보자. ‘인구폭발’이라는 말을 기억하는가? 산아제한정책은 1960년대 초부터 1994년까지 정부의 일관된 정책이었고, 그 이면에는 인구폭발과 경제적 빈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 귀가 따갑게 들었던 국민 구호,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를 생생히 기억한다. 추계인구 4천만 명을 넘어서게 된 1983년 7월, 정부는 ‘인구폭발 방지를 위한 범국민 결의 캠페인’을 벌였다. 당시 문서에는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인구 증가는 50초에 한사람 꼴로 하루에 1,700명, 한 달에 5만 명, 1년이면 대전시 인구와 맞먹는 60만 명이 늘고 있습니다. … 2050년에 가서야 인구성장 정지가 예상되므로 인구 증가 억제가 선행되지 않는 한 경제·사회 발전은 자연 지연될 것입니다.” 문서는 인구과잉이 불러올 취직난, 교통지옥, 주택 부족, 환경오염, 질병의 증가 등을 언급하며 이렇게 끝맺는다. “이제 폭발적인 인구 증가는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 가장 큰 적이 됐습니다.”


이 캠페인의 주장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싶은가? 불과 40-50년 전에 인구폭발을 두려워했던 우리가 이제는 인구감소를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는 산아제한을 말했던 똑똑한 정부 지도자들이 이제는 출산장려를 하고 있지 않은가? 비슷한 두려움 때문에 말이다. 과연 인간은 어디까지 인간 사회를 기획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일까? 


3포에서 N포까지


다시 현실로 돌아와 보자. 미국에서 목회하던 10여 년 전, 한국에서 대학생 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다. 미국으로 돌아간 뒤, 집회에 참석했던 한 학생으로부터 받은 이메일은 아직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 학생의 질문은 이런 내용이었다. “3포 세대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이런 세상을 사는 저희에게 복음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한국 사회를 떠나 있던 내게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3포 세대’란 너무나 생소하고 마음이 무너지는 용어였고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느끼는 현실이었다. 이후에 나는 그 이상의 이야기들도 들었다. 세 가지로도 모자라서 취업과 내집 마련도 포기하는 5포, 건강과 외모 관리도 포기하는 7포, 인간관계와 희망마저 접어야 하는 9포, 그리고 삶마저 포기하는 10포, 또는 완포, 전포이다. 나는 이 용어들 자체는 지나친 비관론에 근거한다고 보지만, 이런 용어들이 반영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의 심각성, 특히 젊은 세대들이 직면하는 무서운 현실도 경시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복음의 원리를 어떻게 이 현실에 적용할 것인가?


이런 비관적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에게 우리는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가? 그들의 나쁜 삶의 현실에 대해서 복음은 정말 좋은 소식일 수 있는가? 물론 복음은 일차적으로 우리 영혼의 구원과 영원을 약속하는 기쁜 소식이지, 세상에서의 성공과 번영과 건강을 약속하고 보장한다는 의미에서 좋은 소식은 아니다. 그러나 복음은 저 세상을 위해서만 유용한 것이 아니라 성도가 살아가는 지상의 삶의 모든 영역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힘이 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가난과 박해를 달고 살았지만, 그들에게는 넘치는 기쁨이 있었고, 심지어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나눔을 실천할 수 있었다(고후 8:1-5; 벧전 1:6-9). 20세기 초 일제의 강압에 국권을 빼앗기던 절망적 상황에서, 1907년에는 이기풍을 제주 선교사로, 1913년에는 세 사람의 선교사를 중국 산동으로 파송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하늘의 기쁨으로 이 땅의 절망을 이긴 증거들이다.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보았기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갈 힘이 있었다(히 11:10, 13). 복음은 성도가 모든 삶의 형편에서 자족하게 하는 능력이다(빌 4:11-12).


이 복음은 21세기 초저출산율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고 유효한 능력이다. 그렇다면 이 복음의 능력을 어떻게 이 절망적으로 보이는 삶의 현실에 적용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제 말하려는 적용은 어떤 젊은이들에게는 매우 급진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복음 자체가 급진적이지 않은가. 그리스도인 젊은이들이 포기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정했고 그래서 포기하기 힘들어하는 삶의 기준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내 딸을 생각한다. 결혼한 지 1년이 조금 지난 내 딸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신학생인 남편과 함께 11평 전월세 집에서 살고 있다. 경제적 짐을 지고 있는 딸이 출산을 하게 되면, 당장의 현실적 어려움을 감당하기도 쉽지 않고 부모가 가까이 살고 있지 않아서 육아를 도울 수도 없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복음과 믿음의 원리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이들이 포기해야 하는 자신들의 기준은 무엇인가? 


문화명령은 언제나 유효한가?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하셨다(창 1:28). 이 문화명령은 이런 현실을 살아가는 젊은 그리스도인 부부들에게 여전히 유효한가? 물론이다. 하나님은 이 말씀에 너무나 순종하여 인구폭발이 일어나게 될 것을 염려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 염려는 어쩌면 인간의 몫이 아니다. 사오십 년 전, 산아제한 정책을 주도했던 똑똑한 사람들의 염려는 옳았는가? 그렇다면 그때와 동일한 경제 논리로 장래의 삶을 염려하여 저출산을 정당화한다면, 이것은 50년 후에도 옳았다는 판단을 받을 수 있을까? 


오늘날 젊은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하는 삶의 상황은 정말 녹록지 않다. 절망적이라는 말이 적당하다고 느껴질 만큼이나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문화명령의 정당성을 판단하도록 부름을 받지 않았고, 오직 순종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산아제한 정책의 시대에도, 초저출산율의 시대에도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문화명령은 유효하다. 나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연애와 결혼과 출산은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취업과 내집 마련, 건강과 외모 관리 정도는 적절하게 양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간관계와 희망, 삶은 포기하면 안 된다. 


나는 우리가 너무 스마트하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장래는 여전히 우리에게 불확실하지만, 드러난 현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현실이다. 장래를 위한 염려에 오늘이라는 시간을 희생시키는 일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불신앙적인 태도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계획은 필요하다. 하지만 이 세상의 과도한 흐름에 장악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주의 깊게 생각하라(롬 12:2). 그리고 순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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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연애와 결혼과 출산은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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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형익

김형익 목사는 건국대에서 역사와 철학을, 총신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인도네시아 선교사, GP(Global Partners)선교회 한국 대표 등을 거쳐 지금은 광주의 벧샬롬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 ‘율법과 복음’, ‘참신앙과 거짓신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