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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주님의 기도는 그렇게 살라는 기도이다
by Jeremy Linneman2022-08-27

주기도문은 단순한 기도가 아니다. 이 기도는 이 땅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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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있는 동안 불량한 질문을 꽤나 했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눅 9:54). 그러나 가끔은 멀쩡할 때도 있었다.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눅 11:1). 제자들이 그럴 때면, 우리 주님은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아버지와 즐거이 교제하는 법을 가르칠 기회가 생겼다며 퍽 기뻐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어느 날 오후 제자들과 열성 넘치는 군중이 산 중턱에 모였을 때 그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다. 누가복음 11:2-4에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은 가장 유명한 말씀 중 하나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짤막한데다 어린아이도 쉽게 외울 수 있지만, 이 기도의 간결함이나 익숙함에 현혹되지는 말자. 우리는 주님의 기도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기도라고 바르게 알고 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는 또한 그 이상이다. J. I. 패커는 주님의 기도를 “복음의 요약”이라고 부른 테르툴리아누스를, 그리고 “신성의 몸”이라고 부른 토마스 왓슨을 인용한다. 패커 자신은 주님의 기도는 “생활 전반의 열쇠”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기도보다 더 명확하게 가르치는 것은 없다”고 덧붙였다.


주기도문은 단순한 기도가 아니다. 이 기도는 이 땅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비전이다. 이 기도는 망가진 이 세상에 불의와 굶주림과 악이 있음을 인지한다. 이 기도는 믿음의 선언이요, 예배로의 부름이요, 하나의 외침이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사회의 개혁을, 이 땅에 천국이 임하게 해 달라는 변혁의 탄원이다.


그리하여, 주기도문은 단순히 그렇게 기도하라는 기도가 아니다. 주님의 기도는 그렇게 살라는 기도이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의 기도를 기도하면, 어린아이처럼 의지하는 마음가짐으로, 전심으로 드리는 예배로,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선교에의 동참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의 자세: 어린아이와 같은 의존


마태복음 6장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이렇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으로 시작하신다. 예수님은 기도를 대하는 두 가지 방식을 대조하신다. 하나는 과시형 영성의 자세이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려고 종교 활동을 하는 자세이다. 다른 하나는 어린아이와 같은 의존, 곧 하늘 아버지께 우리가 완전히 의지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주기도문은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과 의존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나라가 우리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임을 인정한다. 우리의 생존과 번영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불가능함을 알기에, 우리는 겸손히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 어린아이가 밤에 잠잘 준비를 하면서 도움과 안전을 구하는 것처럼 우리는 용서와 보호와 구원을 간청한다.


우리가 선하고 사랑 많으신 아버지의 발아래 있는 굶주리고 궁핍한 자녀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우리의 초점: 전심으로 드리는 예배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시편이다. 주기도문은 찬양, 탄식, 간구(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기도), 중보(타인을 위한 기도)를 포함한 많은 요소가 시편의 구조와 흐름을 따른다. 주기도문은 우리를 자기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전심으로 예배하는 삶으로 초대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뿐만 아니라 주님과 왕으로서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전심으로 예배하는 자세로 기도하고 살아가라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끊임없이, 한눈팔지 말고 걸으라고 우리를 초청하신다. 진심으로 드리는 예배(시 86:11)는 우상 숭배(출 34:11-17), 탐욕(마 6:19-21), 처음 사랑에서 멀어짐(계 2:4)을 없애는 해독제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 삶의 중심을 예수님과 그의 영원한 나라에 두는 것이다. 남의 칭찬을 받으려는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인기를 얻고자 하는 욕심을 거부하는 것이며, 명성을 쌓으려고 거창한 일을 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 존재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고 그분께 온전히 복종할 때 오는 진정한 기쁨과 평화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의 관계들: 서로 사랑


단수 대명사가 사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주기도문에서 간과되고 있는 아름다운 차원이다. 주기도문에는 “나”(“I” 또는 “me”)가 없다. 그 대신에 예수님은 공동 대명사 “우리”(“We” “us” “our”)로 기도하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주기도문은 우리의 개인주의적 틀을 재고하고 우리가 교회와 얼마나 상호 연결되어 있는지 인정하고 맛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의 기도를 단수의 기도에서 공동의 기도로 바꾸심으로써,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두 번째 큰 계명(마 22:39)을, 그리고 주님께서 새 계명이라 이름 붙이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요 13:34-35)을 우리가 잊지 않게 하신다.


주기도문을 기도하면 우리는 형제자매의 실제적인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자원과 평화와 희망이 부족한 동료 신자들을 알아가는 것이다.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잘못할 때가 있으며 그럴 때마다 앙갚음을 일삼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며, 서로 용서하고 쓴 뿌리를 뽑아버리는 것이다.


주기도문을 정직하게 드린다는 것은 신속하고 철저하게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사명: 하나님의 일에 참여


결국,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깨어진 이 세상에 발을 들이지 않고서는 주기도문을 기도할 수 없다.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사역에 참여하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능력을 심어준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거나 그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한다.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게 될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된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온 세상 사람들의 (육체와 영의) 굶주림을 인식하고 그들을 먹이며 세계 빈곤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용서를 구하고(“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과 용서한 사실을 아뢰는(“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기도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자주 이웃과 동료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악의 잔혹하고 불의한 계략에서 사람들을 구하는 일에 나선다는 것이다.


주기도문을 기도하고 주기도문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기도하시며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요 17:18)


프레드릭 비크너가 말했듯이,


주기도문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게 좋다. 주님의 기도로 기도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 기도문을 입 밖에 낸다는 것은 호랑이를 우리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며, 원자력을 미풍처럼 보이게 하는 힘을 내뿜는 것이다.


비크너는 주기도문은 언젠가 성취될 약속의 노래임을 우리에게 되새겨 준다. 언젠가,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 잘될 거다. 그때까지, 우리는 기도한다.




원제: The Lord’s Prayer Is Meant to Be Lived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김은홍

주기도문은 단순히 그렇게 기도하라는 기도가 아니다. 주님의 기도는 그렇게 살라는 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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