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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문제다
by 고상섭2022-08-19

교회는 재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도와야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사역은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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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은 경제적 양극화를 다룬다. 같은 비라도 누군가에게는 생존의 문제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낭만적인 이야기가 된다. 영화는 단순히 영화로 끝나지 않고 2022년 오늘의 이야기로 다시 등장한다. 수도권에 100년 만에 폭우가 쏟아지면서 관악구 신림동 반지하 빌라에 거주하던 발달장애인과 십대 여학생 등 일가족 3명이 빗물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서울시에서도 다양한 대책을 내놓았고, 교회와 여러 단체가 수해를 입은 사람들을 돕는 손길을 펼치고 있다. 


이 사건은 겉으로 보면 폭우의 문제와 안전의 문제이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가난의 문제가 그 뿌리에 있다. 빈익빈 부익부라는 양극화가 신림동 반지하까지 사람들을 몰아갔기 때문이다. 교회는 재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도와야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사역은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팀 켈러는 교회가 해야 하는 중요한 사역 중에서 이웃에게 경제적 물질적 필요를 채우는 사역을 ‘정의 사역’이라 명명하며 강조한다. 


왜 정의 사역인가? 


팀 켈러는 ‘오늘을 사는 잠언’에서 이웃에게 베풀어야 할 선은 경제적, 물리적 필요를 채워주는 실제 원조이어야 하고, 이것은 자선의 문제가 아니라 이웃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받는 것이라 말한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으면 단지 사랑이 없는 게 아니라 불의한 것이다”(오늘을 사는 잠언, 43).


왜 어려운 사람을 돕지 않는 것이 불의한 일이 되는가? 구약성경에서 ‘정의’ ‘공의’라는 단어는 ‘미쉬파트’이다. 미쉬파트라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2백 번 이상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는데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는 ‘인간을 공평하게 대한다’이다.


“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할 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레위기 24:22에 나오는 ‘법’이라는 말이 바로 ‘미쉬파트’이다. 이 단어는 ‘동일하게’ 법을 집행하라는 의미이다. 즉 징벌이든 보호든 보살핌이든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그에게 돌려준다는 의미이다. 특히 4대 취약 계층인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을 보살피고 보호하라는 의미로 ‘미쉬파트’가 사용되었다. 


팀 켈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성경 말씀에 따르면, 이런 집단을 어떻게 대우하느냐는 한 사회의 미쉬파트(정의)를 평가하는 척도가 된다. 어떤 식으로든 취약 계층에 속하는 이들을 외면하는 처사는 자비와 자선의 부족이라는 차원을 넘어 정의, 곧 미쉬파트를 짓밟는 행위로 규정해야 마땅하다”(정의란 무엇인가, 36).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섬기는 일은 교회가 베풀어야 할 자선이 아니라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그들에게 돌려주는 정의 사역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은 은혜이며, 우리는 세상의 청지기로 부름을 받았다. 그래서 교회의 정의 사역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정의 사역의 동기 


정의 사역의 동기는 가난한 사람을 향한 긍휼이 아니라 은혜이어야 한다.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요구할 수 없는 사랑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자비를 명령하시지만, 그 명령에 대한 반응으로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에게서 너그러움이 흘러나와야 한다”(여리고 가는 길, 82).


복음과 종교의 차이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순종하느냐 아니면 순종을 통해 원하는 복을 추구하느냐의 차이이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을 통해 어떤 보상이나 공로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일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에서 첫째 아들은 둘째 아들인 탕자가 돌아와서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었을 때 분노하며 들어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은 아버지의 명을 다 지켰는데 보상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했을까? 바로 자신에게 있을 유익과 복 때문이었다. 팀 켈러는 ‘탕부 하나님’에서 첫째 아들이 품은 마음의 동기를 이렇게 분석했다. “첫째 아들은 그의 선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잃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선함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을 잃은 것이다. 첫째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벽을 만드는 것은 그의 죄가 아니라 도덕적 삶이었다. 그의 악행이 아니라 의로움이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이다”(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45).


교회의 정의 사역은 교회가 더 나은 사람이기 때문에 부족한 사람을 돕는 자선의 의미가 아니라 마땅히 이웃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돌려주는 의미이다.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이 은혜이며 그것을 나눠주어야 할 청지기로서의 사명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은혜의 결과가 아닌 인간의 공로로 사람을 돕게 되면 정의 사역의 본질에 대해 오해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가난하기는 하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돈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집에 가보면 다 살만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에 부합되지 않는 태도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 문제라면 벼랑 끝에 이르기 훨씬 전부터 어떻게든 손을 쓰려고 하면서, 왜 이웃에게는 굶어 죽을 지경이 돼야 도움을 주려고 하느냐”(정의란 무엇인가, 116).


또 “나누고 자시고 할 여력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기네 식구 먹고 살기도 빠듯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굴 도울 힘이 없다는 말은 내 삶의 한 귀퉁이를 잘라내는 부담을 지면서까지 누군가를 도와줄 자신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정의는 상대방의 행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하신 것처럼 은혜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내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에서 그 이웃의 몫을 나누는 것이다. 


정의 사역의 실천 


정의 사역을 시작하려면 먼저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해서 가정과 교회와 지역 공동체로 관심의 원을 넓혀가야 한다. 직계 가족을 포함한 근친 중에서 장애인, 노인, 만성질환 환자가 있다면 그들을 돌보는 사역으로부터 시작하면 된다. 지역사회를 섬기면서도 혈연에게조차 자비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다음은 교회이다. 먼저 교회 안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조사해서 다각도로 섬겨야 한다. 때로 교회에서 기금을 조성해서 전달하거나 비공식적인 통로로 다른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마지막은 이웃이나 지역 공동체이다. 슬픔, 상실, 이혼, 질병, 장애, 개인 문제 등으로 힘들어하는 이웃은 없는가? 이주민 가정이 눈에 보이거나, 노숙을 하는 사람들을 섬길 수도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도록 노력하면 된다.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관심의 원을 확대하라(여리고 가는 길, 170).


또한 정의 사역은 긴급한 필요를 채우는 데만 급급해서는 안 된다. 장기적인 사역의 계획이 필요하다. 한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면 단순 후원금 이상이 필요하다. 자립할 수 있게 도와야 하고, 위협적인 사회 체제를 바꿀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도 도움을 받아야 한다. 


팀 켈러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약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단계를 소개한다. 


첫째. 구제의 단계이다. 구제란 말 그대로 신체적, 물질적, 경제적으로 시급한 필요를 직접 채워주는 것을 말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응급처치를 해 주고 회복 기간에 소요되는 경비를 부담하는 구제 활동을 펼쳤다. 수해를 만난 사람들에게 물품을 기부하거나, 궁핍한 사람들에게 음식과 의복을 나눠주거나, 최소 비용이나 무료로 병을 고쳐주거나 상담을 해주는 식의 섬김은 흔히 할 수 있는 구제 사역이다. 


둘째, 개발의 단계이다. 개발은 개인이나 가족 또는 공동체 전체에 적절한 자원을 제공하여 구제 단계의 의존에서 벗어나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후원하는 일을 가리킨다. 구약성경을 보면 종의 부채를 면제하고 해방해 줄 때는 새로운 삶을 꾸려 나가는 데 필요한 경제적 자원을 넉넉히 제공하라고 주인들에게 명령했다. 구약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종의 해방, 이삭줍기, 희년에 관한 갖가지 율법 규정이 우리 시대에 갖는 의미를 곱씹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집 마련을 돕는 작업뿐만 아니라 교육, 일자리 창출과 직업훈련, 취업 정보, 재정 자문과 같은 항목들이 들어 있다. 물론, 개발은 구제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며 복잡하고 비용부담도 큰 일이다. 그러나 교회는 단순히 구제의 차원을 넘어서 사람들의 자립을 위한 개발 단계를 고민해야 한다.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이 주셨던 율법은 단순히 개인의 구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의 회복이었다. 


셋째, 개혁의 단계가 있다. 개혁은 즉각적인 필요를 채우는 구제와 의존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개발의 차원을 넘어 의존성의 문제를 만들거나 약화하는 사회적 조건과 구조를 변화시키는 노력이다.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왔던 사마리아인이 여리고를 갈 때마다 강도 난 사람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순히 강도 만난 사람을 돕는 일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가 출현하지 않도록 방범을 강화하고 가로등을 설치하는 등 다양한 구조적 조치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사고를 막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결국 사회 개혁의 문제까지 확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사회 시스템과 직접 맞닥뜨린다는 개념에 거부감을 느끼는 그리스도인이 적지 않다.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이 변하다 보면 언젠가 사회 전체가 변화될 것이라는 생각을 편하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개인적으로 사회 활동을 하는 데 집중한다. 그러나 구조적인 죄를 외면한 채 개인적으로 구제 활동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한 교회의 영향력이 크지 않은 현실에서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먼저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은 구제의 일이다. 또 개발의 단계에도 어느 정도 참여하고 헌실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교회가 맡아서 하기에는 힘든 일이기에 개발의 단계에서는 지역교회의 연합이 필요하다. 한 교회가 세 가지 단계를 모두 하려면 가장 중요한 복음과 말씀 사역이 흔들릴 수도 있다. 


개발과 개혁의 단계는 교회뿐 아니라 지역사회 단체들과 연관해서 함께 일하는 것이 좋고, 교인들에게도 비영리 조직과 연합해서 개발과 개혁에 동참하여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쉽게 말해 영화 제작에 관여하는 교인들을 훈련하여 복음의 영향력이 담긴 작품을 만들게 할 수는 있지만 교회가 스스로 영화를 찍는 회사를 설립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일이라고 해서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을 다 잘할 수 있는 기관이나 조직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구체적인 적용 


아브라함 카이퍼는 영역 주권이란 개념을 이야기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고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이들을 양육하는 책임이 있다. 그럴 때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로서 세상과 구별된 방식으로 예술, 과학, 교육, 언론, 영화, 비즈니스를 이끌어 가는 그리스도인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교회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개인을 길러내지만, 지역교회가 자체적으로 특정한 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아니다. 카이퍼는 제도적 교회와 유기적 교회를 구분했다. 


제도적 교회는 교회의 기관으로 공동체 안팎의 식구들을 구제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바탕으로 복음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성도들을 양육하는 기능을 감당한다면, 유기적 교회로서 교회는 개발과 사회개혁 활동을 위해 다양한 기관, 단체와 연합하여 활동하는 것을 말한다. 


정의 사역은 극도의 정밀한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지역교회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일꾼들을 통해 말씀과 행동, 양면에 걸쳐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다. 구제와 개발, 사회 개혁에 뛰어들어야 한다. 빈곤의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 있다. 단순히 총과 칼로 세상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그 종류가 다르다. 복음으로 무장해야 하고 교회가 함께 교회와 지역사회를 도와야 하지만, 또한 개혁의 차원에 눈을 뜨고 동참하며 활동해야 한다. 단지 구제에만 집중하는 교회가 있고, 또 복음을 제쳐 두고 사회 개혁만을 부르짖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언제나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이고, 하나님의 복음은 개인과 사회구조 모두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이제 교회는 단순한 구제를 넘어 개발과 개혁을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의무나 무거운 짐이 아니라 복음의 은혜의 자연스러운 확장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참된 미덕의 본질에서 하나님을 가장 아름다운 분으로 여길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에게서 벗어나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주님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그리스도인은 좋은 평판을 얻으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좀 더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가난한 이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쁨을 드리는 일이기에 기꺼이 나설 뿐이며,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흡족하게 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이다(정의란 무엇인가, 170-200).


이러한 자세는 구제를 하면서 사람들의 반응이나 결과에 좌절하지 않게 우리를 도와준다. 결국 교회가 자기중심의 사고방식을 떨쳐 버리고 정의로워지라면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것에 먼저이다. 복음은 하나님이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그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나라의 샬롬이라는 이 땅의 번영으로까지 이어지게 한다. 

이제 교회는 단순한 구제를 넘어 개발과 개혁을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의무나 무거운 짐이 아니라 복음의 은혜의 자연스러운 확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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