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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 구약의 메시지
by 정현구2022-07-29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내 삶의 현실을 다스리며 살게 해주소서.’ 이것이 주기도문의 핵심 내용이자, 구약과 신약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 전부에 흐르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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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구 목사의 주기도문과 하나님 나라]


기도, 타인을 향한 자비의 실천

주기도문,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기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 구약의 메시지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 신약의 메시지


문제의 뿌리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는 기도다. 기도의 제목이 많을 텐데 예수님은 왜 ‘하나님의 다스림’을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믿는 사람이 반드시 구해야 할 핵심적인 기도 제목으로 가르치셨을까? 그 이유는 인간이 경험하고 있는 수많은 문제가 바로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 하나의 잘못된 뿌리에서 수많은 죄악의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다. 열매의 종류는 많지만 뿌리는 하나다. 그 하나의 뿌리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불순종이다. 문제의 핵심인 뿌리를 해결해야 참된 응답이 주어지기에, 먼저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는 것이다.


창세기는 모든 것의 시작을 알려주는 책이다. 죄의 시작을 다루는 창세기 3장의 타락 사건을 보면 죄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 에덴동산이 나온다. 에덴동산은 단순한 동산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초기 모델이다. 그곳에 다스림을 받는 백성으로 아담과 하와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거하는 땅인 에덴이 있었습니다. 그 땅에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뜻하는, 선악과 명령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법이 있었다. 그런데 아담이 에덴에서 선악과를 따서 먹는다. 선악과 사건의 의미는 이렇다. 선악과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다. 선악과를 금지한 명령은 마치 하나님이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것 자체를 나쁜 것으로 여기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사람이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선과 악을 ‘결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정하신 선과 악의 구분을 따르지 않고, 자기 자신이 선과 악을 구분 짓는 입법자의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한 행위다. 이렇게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했기에 에덴에서 쫓겨난 것이다. 이처럼 인간 죄의 뿌리에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에 대한 거부와 반역적 독립 선언이 들어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실 때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다.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은 똑같은 내용의 기도를 반복하지 말라는 의미 그 이상을 담고 있다. 옛날 사람들은 인격적인 신 앞에 기도한다는 의식이 약했기 때문에, 기도할 때 주로 주문을 외웠다. 주문을 외움으로 신이 기도를 꼭 들어주게 만들고자 하는 일종의 종교적 주술을 행했다. 이것이 ‘중언부언’이다. 이것은 인간이 기도로 신을 조종해 자기의 욕망을 성취하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이렇게 종교에까지도 깊이 들어가 있다. 이처럼 신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려는 것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면, 인간 문제를 푸는 핵심은 그 뿌리를 뽑아내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겠다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근원적 기도를 가르치셨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응답


주기도문은 기도의 진짜 응답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신다. 기도의 응답은 내가 원하는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라는 큰 맥락에서 볼 때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내 삶의 땅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 응답받은 것이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를 생각해보자. 기도를 했더니 내게 필요한 양식이 주어졌다. 표면적으로 기도가 응답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내일에 대해 염려한다면, 아직 기도의 응답을 받은 것이 아니다. 경제적 삶의 현실을 다스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가 보살펴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산다면, 그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음으로 경제 현실이라는 땅을 다스리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물질이 많음에도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욕망에 이끌려 살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비록 일용할 양식이 풍족하더라도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는 물질이라는 땅을 다스리지 않고, 도리어 물질에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라 여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물질을 기꺼이 사용할 수 있다면, 그때 그는 물질이라는 땅을 다스리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그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의 참 응답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경제 현실이라는 땅을 다스리고 있기 때문이다.


용서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주기도문에 나타난 용서의 가르침의 핵심은 “내 죄를 용서해 주소서”의 기도가 아니라 “내가 남의 죄를 용서하게 해주소서”의 기도다. 사실 남을 용서하는 것 만큼 어려운 것도 많지 않다. 내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는 쉬운데, 남의 죄를 용서하게 해달라는 것은 정말 어렵다.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해 주신 것에 감격하고 기뻐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남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는 온전한 응답을 받은 것이 아니다. 기도의 진짜 응답은 나를 용서하신 그 사랑의 엄청난 무게와 은혜 때문에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기꺼이 용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다스림을 받아 인간관계라는 복잡한 갈등의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그는 진짜 응답을 받은 것이다. 바로 그의 삶의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은 두 가지다. 첫째는 위로 하늘의 다스림을 받는 것, 둘째는 아래로 땅을 다스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내 삶의 현실을 다스리며 살게 해주소서.’ 이것이 주기도문의 핵심 내용이자, 구약과 신약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 전부에 흐르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산다는 것


종종 ‘믿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신앙생활을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내가 딛고 있는 땅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며 사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모습이다. 이렇게 살게 하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


창세기의 인간 창조 기사를 보자.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을 때, 굉장히 원대한 목적을 가지고 만드셨음을 볼 수 있다. 창조 세계는 어마어마하며, 볼수록 기가 막힌 세계다. 그런데 이 창조 세계가 창조의 절정인 인간을 위하여 봉사하도록 만들었으니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을 닮는 것이었다. 창세기 1:26은 인간 창조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에서 형상과 모양이라는 두 가지 단어가 나온다고 하여 의미를 둘로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성경신학이 발전하면서 이 의미가 보다 뚜렷해졌다. 창조 세계 가운데 하나님은 왕 중의 왕으로 계신다. 그 왕이 자신을 닮은 존재를 만드셨다. 하나님을 대신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땅을 다스릴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을 만드셨다. 즉 인간을 하나님을 대리하는 작은 왕들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고대 사회는 황제를 신의 형상이라고 불렀다. 오직 황제만이 신의 형상이었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는 혁명이었다. 당시는 남성 중심 사회였으니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까지는 생각해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성경은 여자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요즘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시대에는 굉장히 놀라운 이야기였다.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시고, 인간은 하나님이 할당한 일정한 영역을 다스리는 책임을 맡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청지기이다. 인간은 자기의 땅에서 죄에 지배당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 다스리는 왕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어졌다.


다스림을 받아 다스리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왕처럼 살아가는 비결이 무엇일까? 하나님께는 그분보다 높은 존재가 없다. 하나님 위에 왕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인간에게는 왕이 있다.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존재도 인간 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만이 위에 계신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와 능력의 다스림을 받아 삶의 땅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왕 노릇 하도록 만드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대로 사는 것에 달려 있다. 이것을 삶의 현실에 적용해야 한다. 삶이 굉장히 힘들고 고달파, 순간순간 여러 상황과 그 상황이 주는 감정이 우리를 지배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자비와 은혜로 다스려주시기를 기도하면서 다스림을 받게 되면, 어려운 상황과 염려가 밀려올 때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감사할 수 있다. 우리가 그분의 통치 아래 있다면 풍랑이 이는 바다와 같은 삶이라고 해도 그 바다를 딛고 가는 왕처럼 살아갈 수 있다.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계명을 지키는 길


십계명도 살펴보자. 십계명 중에는 ‘하지 말라’는 계명이 많다. 그래서 우리는 십계명을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하는 내용의 계명으로 읽지만, 사실 십계명이 그렇게 쓰인 것은 당시의 사회·문화적 수준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정하다 보니 “거짓말하지 말라”와 같은 부정적인 명령어를 사용했지만, 하나님의 의도는 “거짓말하지 말라”에서 끝나지 않고, “참을 말하되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라”와 같은 적극적인 명령까지 그 속에 포함합니다. “살인하지 말라” 역시 “그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신하라”는 적극적인 명령을 담고 있다. 그래서 십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칼뱅이 십계명 주석을 굉장히 길게 했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의롭게 된 사람이 성화되어갈 때 중요한 도구가 십계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십계명은 소극적 명령에 한정하면 지키기 어렵지 않을 것같이 보이지만 적극적 명령까지 더하면 굉장히 깊어서, 제대로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십계명을 지킬 수 있을까?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가 하나님에 관한 계명이고,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의 여섯 가지 계명이 인간에 관한 계명이다. 처음 네 가지 계명은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신상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어기지 말라”이다. 이 네 가지 계명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다스림이 내게 임하게 하소서, 하나님이 나의 왕이심을 온전히 고백하며 살게 해주소서”라는 뜻이다. 이것은 주기도문 전반부 내용과 같다.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에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종류의 문제가 다 들어있다. 이 계명을 어기지 않고 사는 삶이 곧 바른 삶이다. 즉 삶의 문제에 정복당하지 않고, 오히려 다스리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우리는 내 삶, 내 땅을 다스리며 갈 수 있다.


언약궤, 하나님의 통치 의자


구약에는 언약궤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이스라엘 진영의 정중앙에 성막이 있었고, 성막 제일 안쪽의 지성소 안에 언약궤가 있었다. 언약궤는 아카시 나무로 만든 상자인데, 이 속에 십계명을 넣어두었다. 지성소 안에 놓인 이 언약궤는 무엇을 의미할까?

 

언약궤라는 상자를 보면, 그 위에 권능의 천사를 상징하는 날개 넷이 세워져 있다. 역대상 28:2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이에 다윗 왕이 일어나 이르되 나의 형제들, 나의 백성들아 내 말을 들으라. 나는 여호와의 언약궤 곧 우리 하나님의 발판을 봉헌할 성전을 지을 마음이 있어.” 다윗이 성전을 짓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성전 지을 준비를 하는데, 그 이유가 하나님의 발판인 언약궤를 봉헌하고 싶어서이다. 보통 왕의 의자가 높기 때문에 왕의 다리를 두는 발판을 둔다. 그런데 그 발판이 바로 언약궤다. 언약궤가 발판이라면 언약궤 위에 세워진 네 갈래의 날개는 왕이 앉은 의자의 다리에 해당된다. 즉 언약궤 위에 하나님이 앉아 계신 왕좌가 있다는 뜻이다.


언약궤는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언약궤를 발판 삼아 하나님이 왕좌에 앉아 계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왕좌에 앉아서 무엇을 하시는가? 그 의자에 앉아 쉬는 것이 아니라, 통치하신다. 지성소에 언약궤가 있다는 것은 지성소에 하나님의 통치 의자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즉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하나님이 왕으로 통치하고 계심을 보여준다. 성전의 언약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라. 그럴 때 너희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 이것이 바로 지성소 속에 언약궤를 둔 의미이다. 


이스라엘은 전쟁에 나갈 때 가끔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나갔다. 언약궤를 하나님의 이동용 왕좌로 만든 것이다. 레위인의 어깨에 메인 언약궤는 백성을 승리로 이끄는 하나님의 이동용 지휘소가 된 것이다. 이런 의미를 지닌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영 가운데에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잘 받을수록 그들은 전쟁에서 이기며 강한 백성이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적 선한 영향력을 온 세계에 뻗칠 수 있는 제사장 민족이 된 것이다.


사울과 다윗 이야기


언약궤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빼앗긴 상태였다. 블레셋과 싸우다가 패배하자 엘리의 두 아들은 언약궤가 자신들을 이기게 만들어 줄 것이라 생각하고 가지고 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또다시 패하고 언약궤를 빼앗긴다. 사실 언약궤는 요술상자가 아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의미인데,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언약궤 자체를 요술방망이처럼 믿고 나갔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이 언약궤를 빼앗기도록 하셨다. 이후 사울이 왕이 되었지만 그는 언약궤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것은 그가 자기 위에 계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통치하려고 했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한번은 전쟁을 하고 돌아오는데, 백성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 한마디에 질투심이 화살처럼 사울의 가슴에 꽂혔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 않았던 그는 결국 질투심의 지배를 받아 쓰러지고 말았다. 대단한 것에 지배받았으면 또 모르겠는데, 왕이라는 자가 고작 질투심에 지배를 받은 것이다. 그렇게 보면 사울은 겉은 왕인데, 실제로는 평생 종으로 살았다. 실제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위대하게 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겉으로는 굉장히 잘 사는 것같이 보여도 대부분 욕심이나 경쟁심이나 시기심의 지배를 받아 살아가게 된다. 그러다가 인격적 성숙도 변화도 없이 인생이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다윗은 어떻게 했는가? 왕이 되자마자 그가 행한 첫 번째 국가적 시책이 언약궤를 가져오고, 언약궤를 위한 성전을 봉헌하려는 것이었다. 언약궤를 찾아오려고 했다는 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한 사모함이 있었다는 뜻이다. 사실 그는 이전부터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며 살았다. 다윗은 어려운 상황에 많이 처했다. 이럴 때 대다수의 인간은 그 상황이 주는 수많은 부정적 감정의 지배를 받기가 매우 쉽다. 한 인간이 삶의 최고의 경지와 최저의 경지 가운데 일어나는 수많은 종류의 감정의 파도를 어떻게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을까? 그가 지은 수많은 시편이 보여주듯이 다윗은 그 감정을 영적인 시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상황과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다윗이 썼던 시편들은 다윗이 여러 외적 상황, 내적 감정들과 싸워 이겨 얻은 영적 전리품에 해당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았기 때문에 그 절망의 감정까지도 다스릴 수 있었다. 질투에 지배당했던 사울의 모습과 얼마나 다른가! 다윗은 진작부터 하나님 나라의 원리대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주기도문의 가르침은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다.


이스라엘 역사


이스라엘 역사도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보여주는 텍스트에 해당한다. 우리가 많은 민족 중 하필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이 이 민족의 역사를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는 도구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역사가 우리에게 참 중요하다. 구약은 이스라엘의 역사다. 그런데 다양한 역사 중에서 원형 역사가 있다. 신·구약의 여러 역사적 사건들은 결국 이 원형 역사가 여러 형태로 변주되면서 계속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이 40일간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것도,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신 것도 전부 이스라엘 역사라는 틀 안에서 반복된다. 이스라엘 역사라는 하나의 작은 이야기에서 더 큰 본질적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인류의 역사, 전 우주적 역사까지 나선형으로 확장되어가는데, 그 원형이 이스라엘 역사인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는 세 가지 단계로 구분된다. 첫 번째 단계는 이집트에서의 역사다. 그다음은 광야에서의 역사, 또 하나는 가나안에서의 역사다. 이집트에서의 역사는 파라오의 지배를 받는 역사다. 잘못된 왕의 지배를 받는 역사다. 많은 사람이 자기를 포함한 하나님 아닌 존재에 지배받아 영적 의미에서 사실상 노예로 살고 있다. 죄의 노예요 죽음의 노예다. 성경이 인간을 ‘죄의 종’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으로 인간이 사실상 이집트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집트에서의 역사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어났던 한 번의 구체적 역사이지만 영적으로는 온 세대를 통틀어 인간을 이해하는, 인간을 바라보는 하나의 렌즈가 된다. 두 번째는 광야에서의 역사다. 출애굽 했음에도 불구하고 방황한다. 누가 주인인가? 여전히 자아가 주인이다. 자아가 주인이 되어 방황하는 역사가 광야의 역사다.


세 번째는 가나안에서의 역사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 말에는 하나님의 수사학이 들어있다. 가나안은 역설적으로 가장 타락하고 가장 어둡고 가장 절망적인 곳이었다. 당시 하나님이 가나안을 약속의 땅으로 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을 방황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간표였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잘못으로 40년을 방황한 셈인데, 가나안의 측면에서 보면 가나안 땅이 견딜 수 없어 토해내고 싶을 만큼 가나안 원주민들의 죄가 관영하는, 이른바 임계점에 이를 때를 기다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고 마침내 가나안을 정복하던 바로 그때가 정확하게 가나안 땅이 더 이상 가나안 백성의 죄악을 견디지 못하고 토해내는 때이다. 하나님의 우주적 역사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방황이 필요해서 40년을 방황시켰다. 가나안은 가나안대로 죄가 관영할 때를 보다가 두 가지가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했는데,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놓은 후 들어와서 살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가나안 땅은 말 그대로 죄가 가장 관영한 곳이다. 가장 어두운 곳에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들어간다. 하나님의 백성이 들어가면 가나안이라는 가장 어두운 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장 이상적인 곳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죄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땅이 토하고 싶어 할 만큼 어둡고 지옥 같았던 곳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이 들어가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지금 어느 땅에 머무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어느 땅에 머물든지 누가 통치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가나안 땅은 주기도문이 성취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가나안이라는 미움, 원망, 갈등, 음란, 폭력의 문화 속에서도 영향을 받거나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오히려 주변을 한 사람씩 변화시키고 바꾸어나가는 사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그 사람의 땅에 임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 나라 원리가 바로 이렇게 성경 속에서 여러 사건을 통해 연결된다.


이 글은 하나님 나라 복음(새물결플러스)에 실린 정현구 목사의 “주기도문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복음”의 일부를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다시 엮은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가르침은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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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현구

정현구 목사는 부산대와 서울대학원 영문과를 거쳐 고신대신대원(신학)과 예일대와 밴드빌트 대학(기독교사상사)에서 수학했으며, 서울영동교회 담임목사와 기윤실 공동대표, 희년선교회 이사장, 복음과도시 이사 등으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광야에서 삶을 배우다’, ‘다스림을 받아야 다스릴 수 있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