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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금지는 여자에게 좋은 일이다
by Anna Lynne Frazier2022-07-16

임신은 결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매우 드물고 슬픈 상황을 제외하고는 결코 이 삶과 저 삶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그런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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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방대법원은 지난 6월 24일 ‘도브스 대 잭슨 여성건강기구’(Dobbs v. Jackson Women’s Health Organization)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림으로써 그동안 미국에서 낙태권을 법적으로 보장해 온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무효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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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할 상황을 애초에 만들지 말아야 하겠지만 그래도 꼭 필요한 경우라면 낙태라는 선택권이 있으면 좋겠다는 게 한때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고 낙태에 대한 내 생각은 즉시 바뀌었다. 우리를 잘 아시고(시 139:13-18), 그분의 형상대로 만드신(창 1:27)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 이상, 나는 낙태를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낙태를 찬성하는 쪽이었다. 낙태에 관한 내 개인적인 견해는 바뀌었지만 다른 여자에게까지 내 견해를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 자신의 선택을 한 것이고, 그들은 그들 자신의 선택을 하면 된다고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영어 교수가 프레데릭 더글라스의 회고록 미국 노예, 프레드릭 더글라스 삶에 관한 이야기를 과제로 내주었다. 그 책에서 더글라스는 자기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큰 절망을 준 이들은 다름 아니라 개인적으로 노예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굳이 남부 지역 노예제도에 저항하지는 않는, 남과 북의 접경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들 중에는 법을 따른다는 핑계로 탈출한 노예를 노예주에게 돌려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추론은 이것이다: 나야 노예도 사람이라고 믿지만 내 이웃은 노예가 자기 소유물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나야 결코 노예를 소유할 일 없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내 믿음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이 말이 나를 때렸다. 노예 주인의 법적 권리를 중시한다는 핑계를 대는 노예제도 폐지론자와 내가 하나 다를 바 없었다. 


바로 그 순간에 나는 낙태 찬성론자에서 낙태 반대론자로 바뀌었다. 


낙태는 반(反)여성적이다


나는 낙태 합법 판결을 뒤집은 이번 연방대법원의 결정에 똑똑하고 사려 깊은 많은 여성이 애도하는 이유가 그 결정을 여성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 자신이 여자이기에 낙태가 여자에게 좋다는 생각은 매우 불쾌하다. 합법화된 낙태가 여자에게 해로운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1. 낙태 지지자는 여자에게 가장 좋은 건 남자처럼 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우리 사회는 사실상 남자에 의해 형성된다. 대부분의 사회 기관을 설립한 게 남자이기에 모든 관점은 다 남자 중심이다. 지금까지 미국에서 일어난 모든 여성 권리 투쟁은 여자에게도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달라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런 관점은 법적 보호, 권한 부여, 노동력 접근과 관련해서는 아주 유용한 기준이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남성이 가진 것을 얻으려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면 남자 중심으로 구조화된 사회를 더 영속시키는 부작용을 가져온다. 달리 말해서 여성만이 가지는 고유한 특징이 이바지하는 여성의 가치를 경시함으로써 남성과 동등하게 사회를 형성할 수 있는 여성의 능력을 약화한다. 


여자인 우리가 오로지 남자의 관점에 근거해서 무엇이 좋고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사랑스러운지를 정의할 때, 우리는 결국 본질적으로 여성적인 부분을 간과하고 평가절하하게 된다.


여자도 성공하려면 남자와 같아야 한다고 믿는 세상에서는 계획하지 않은 임신에 대처하는 최선의 선택은 중단이다. 그러니까 낙태도 얼마든지 좋은 방법으로 보일 수 있다. 계획에도 없는 아빠가 되지 않으려는 남자는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는데, 왜 여자는 그러면 안 된다는 거지? 게다가 출산을 사회적, 직업적, 경제적 희생을 감수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느끼게 만드는 세상에서, 낙태는 오히려 권장해야 할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수준의 사회에 만족하지 않는다. 여자가 남자와 똑같이 가치를 인정받고 성공하고 또 행복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태어나기도 전에 죽여도 된다는 세상, 설사 낳았다고 해도 경쟁하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버려도 된다는 세상의 의견에 나는 결코 찬성할 수 없다. 또한 여자가 출산과 모성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아니라 남자처럼 되려면 극복해야 할 책임과 부담으로 보는 생각에도 도무지 찬성할 수 없다. 


나는 그런 세상이 싫다. 그런 세상을 보면서 통곡한다.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는 싸우고 싶다. 


2. 낙태 찬성은 여성을 아기와 싸우게 만든다. 


낙태 찬성자가 흔히 하는 주장의 하나가 낙태 반대자는 산모가 아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생명 지지자”라는 말이다. 누군가 원치 않는 임신을 했을 때 엄마 편을 들지 아기 편을 들지 선택하라고 낙태 찬성자들은 요구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사고는 임산부에게 너 자신 아니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삶 중에서 양자택일하라고 강요하는, 엄청난 부담을 안겨줄 뿐 아니라 잘못된 이분법이기도 하다. 


엄마 대 아기라는 대결 구도는 엄마와 아기라는 기적적 관계를 부자연스럽게 뒤틀어 버린 비극적인 결과물이다. 적대적 관계와는 거리가 먼 엄마와 아기는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유대 관계를 보여준다. 몇 가지를 살펴보자. 최대 9개월 동안 이 두 존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 그 후에 두 사람 다 각각 개인으로서 성장하고 투쟁하고 또 성공하기 위한 일생을 갖게 된다. 


임신은 결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매우 드물고 슬픈 상황을 제외하고는 결코 이 삶과 저 삶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그런 게 아니다. 엄마와 아기에게는 둘 다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애초에 엄마의 자궁 밖에서 살 기회조차 주지 않고 아기를 죽인다면,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3. 낙태 지지는 여성의 죽음을 허용하는 것이다.


아기의 대략 절반이 여자이다. 이것은 낙태로 인해 파괴된 아기 중 적어도 절반이 여자로 성장할 어린 소녀라는 것을 의미한다. 매년 수백만의 소녀를 살해하면서, 어떻게 여성에게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여전히 존재하는 남녀 차별을 고려할 때, 선택적 낙태로 인한 소녀의 죽음은 전 세계적으로 따진다면 50퍼센트보다 훨씬 더 높을 것이다.


출생 시 성별 비율(SRB, 여성 100명당 남성 출생 수)을 추적한 연구에 따르면, (초음파 같은) 산전 진단 도구와 합법화된 의료 낙태가 더욱 널리 보급된 1970년대 이후 불균형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일반적인 SRB는 여성 100명당 남성 105명 정도이다. SRB가 가장 높은 국가는 아시아와 북아프리카 국가이며, 그중 많은 국가에서는 아들에 대한 문화적 선호도가 높다. 이런 지역에서는 여자 100명당 남자 121명이고, 일부 지역은 무려 130명 이상에 이른다. 문제 지역(특히 중국과 인도)의 많은 인구를 감안할 때, 이러한 불균형이 드러내는 사실은 선택적 낙태로 인해 사망하는 여성의 숫자가 매년 무려 수백만 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메시지 전투


우리는 지금 다른 아기는 말할 것도 없고 설사 내 아기라도 죽이는 게 지금 처한 어려운 상황에서 탈출하는 가장 편리한 방법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망가진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손을 내밀고 이렇게 말하기를 거부한다. “낙태는 필수지요. 낙태 없이 여자가 어떻게 제대로 경쟁하겠어요?”


낙태 합법을 금지한 대법원의 판단은 여자에게 좋은 일이다. 자궁에서 아이의 생명을 끝내는 것이 여자를 돕는 선택이라는 거짓말을 거부하는 데 이 결정이 이바지할 수 있기를 나는 간절히 바란다. 


현재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낙태가 불법이지만 여전히 많은 주와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합법이다. 법정 투쟁은 계속될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은 또한 낙태를 둘러싼 메시지 싸움에도 전념해야 한다. 여자와 아기에게 가장 좋은 길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더욱 진실하고 더욱 영구적인 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남자와 하나 다를 것 없는 같은 사람으로서 제공하는 가치가 아니라 오로지 여자만이 고유하게 제공하는 가치를 인정하고, 기뻐하고, 또 존중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 여자는 싸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출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써나가야 한다. 그리고 여성의 권한 부여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재고해야 한다. 설혹 여자가 원치 않는 임신을 하는 경우를 만나더라도 자신의 삶이 계속되려면 반드시 아기를 죽여야만 한다는 사악한 방정식이 결코 발을 붙일 수 없는 사회를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 아기를 가졌다 하더라도, 임신을 놓고 낙태라는 타협으로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여성으로서의 부르심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기꺼이 생명을 끌어안는 선택을 우리 여자는 하게 될 것이다. 




원제: Why Overturning Roe Is Good for Women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매년 수백만의 소녀를 살해하면서 어떻게 여성에게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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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Anna Lynne Frazier

아나 린 프레이져(MDiv and MA/EM,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는 The Crossing 의 디지털 컨텐츠 매니저이다. Ten Minute Bible Talks Trugh over Tribe에 글을 쓰는 기고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