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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예수님을 노래하는 시편들

시편이 그리스도를 고대하는 방식들

by Greg Lanier2022-07-18

시편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상황에서도 노래할 수 있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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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황이든 저마다 어울리는 노래가 있다. 어떤 노래는 춤추는 데 어울리고, 어떤 노래는 공부할 때 좋다. 어떤 노래는 길을 걸을 때 어울리고, 어떤 노래는 훌륭한 영화를 더 멋진 영화로 만든다. 어떤 노래는 감사드린 다음에 틀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감사하는 마음이 더욱 커진다.


시편도 마찬가지다. 시편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상황에서도 노래할 수 있게 해 준다. 축하할 때도, 비탄에 젖어서도, 희망을 품고서도. 그리고 이 찬송의 책은 심지어 예수님의 삶을 노래하는 목록이기도 하다.


시편 150편의 시 가운데 40편이 넘는 시가 신약성경 곳곳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100군데가 넘는다. 이렇게 사용된 곳에서 신약 기자는 각 시편을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묘사할 때 적용한다. 어떤 시편은 이런 식으로 반복해서 사용되고(가령 시편 2편110편), 또 어떤 시편은 뜻밖의 이면에 가깝다(가령 요한복음 13:18에 들어 있는 시편 41:9). 신약성경이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서 시편을 사용하는 세 가지 방식이 여기 있다.


1. 예언으로 사용되는 시편


신약성경 기자가 시편을 예수님의 삶에서 일어난 어떤 일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으로 제시할 때가 있다. 예수님에 관한 예언을 생각할 때 사람들이 대부분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예수님의 동정녀 수태 예언(마태복음 1:23이 참조하는 이사야 7:14),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불리는 예수님(사도행전 3:22이 참조하는 신명기 18:15), 그리고 주님 앞서 오는 세례요한에 대한 예언(마가복음 1:1-3이 참조하는 말라기 3:1)이다. 


우리는 보통 노래를 예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신약성경 기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예언의 중요한 사례가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사용하는 시편 16편이다. 베드로는 다윗이―“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실 것”(시 16:8-11)이라는 소망을 품고서 하나님께 매달릴 때―이 시에서 가리켜 말하고 있는 ‘나’는 그 자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자신이 아니라, 다윗은 “예언자이므로” 이 시편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내다보고 말했다”는 것이다(행 2:25-31). 


다른 사례를 보자. 요한은 예수님이 “쇠 지팡이로” 열방을 “다스리실 것”이라고 예언된 왕이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에서 시편 2:9을 넌지시 말한다(계 2:27; 19:15). 


모든 시편이 이렇게 할까? 아니다. 다만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이 몇몇 시편을 예수님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2. 패턴으로 사용되는 시편


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은 시편을 읽으면서 그 시인에게서 처음 일어났고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삶에서 반복된 패턴을 묘사한다. 예를 들어, 시편 118:22에서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은 미래의 돌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겪으신 반대가 시편의 시인이 수 세기 전에 겪었던 것과 얼마나 같은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구절을 몇 번씩 반복해서 사용한다(마태복음 21:42; 사도행전 4:11; 베드로전서 2:7). 


마찬가지로 시편 22편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노래하는 사운드트랙이 된다. 시편 22:7에서 군중의 조롱과 모욕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서 다시 일어난다(마태복음 27:39-40). 시편 22:15에서 시인의 바싹 마른 입은 예수님에게 갈증을 일으키는 그 입이다(요한복음 19:28). 시인의 옷을 비웃듯이 나눠 가지는 일은 로마 병사들에게서 그대로 재연된다(마태복음 27:35). 블루스처럼 연주되고 있는 시인의 비극은 예수님의 수난의 비극을 묘사하는 대본이다. 


3. 프로소폰으로 사용되는 시편


마지막으로, 신약성경은 시편을 예수님이 직접 부르시는 노래로 다룬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프로소폰(prosopon)이라는 그리스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단어에는 “얼굴” 또는 더 적절한 뜻으로는 “페르소나”(persona)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몇 군데 경이로운 곳에서 시편이 마치 예수님이 그 시편에 있는 페르소나인 것처럼 해석되고 있다. 


예수니은 적어도 두 번 이 문을 직접 여신다. 


누가복음 20:42-43에서 예수님은 다윗이 시편 110:1에서 두 명의 다른 “주”를 가리키고 있다고 설명하신다: “다윗이 친히 시편에서 말하기를 ‘주님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시인 다윗이 이 시의 “나”이다. 그러므로 “내 주”는 누구이겠는가? 예수님은 놀랍게도 자신을 두 번째 주, 곧 다윗의 주와 동일시하신다. 이는 곧 이 시편은 영원하신 아버지와 선재하신 아들 사이의 대화라는 의미이다. 아들은 태어나시기 수 세기 전에 이미 이 시편 안에 계시며, 아버지로부터 약속을 받으신다. 


또한, 시편 22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입술로 시인의 말을 쏟아내신다. 마지막 숨을 쉬시면서 예수님은 외치신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예수님은 그 시편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신다. 시인의 고통은 자신의 고통이다.


신약성경의 어떤 기자들은 예수님이 이끄시는 길을 따른다. 요한은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라는 시편 69:9의 “나”가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제자들이 알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요한복음 2:17). 동일한 시편을 가리키면서 바울은 예수님이 시인과 더불어 “주님을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떨어졌다”고 선언하신다고 기록하고 있다(로마서 15:3). 이 노래는 예수님이 직접 자신의 고통에 대해 울부짖는 노래다. 


히브리서도 프로소폰 방식을 확실하게 사용한다. 히브리서 10:5-9은 예수님이 직접, 세상에 오실 때, 아버지께 시편 40:6-8의 말로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주님은 … 나에게 입히실 몸을 마련하셨습니다. …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5, 8에서 아버지는 시편으로 아들에게 말씀하신다. 시편 2:7은 예수님께 말씀하시는 아버지를 기록하고 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그리고 시편 45:6-7은 아들에게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선언이다. “오 하나님, 하나님의 보좌는 영원무궁토록 견고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예수님은 다양한 시편들에서 “나”로도 “당신”으로도 페르소폰 곧 페르소나의 자리에 계신다. 이러한 구절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천동지할 진리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 구절들은 예수님의 영원한 아들되심, 하늘의 주되심, 성육신, 그리고 수난을 노래하는 자전적 목록이다. 


시편을 그리스도론으로 접근하는 이러한 세 가지 범주는 우리가 성경을 더욱 풍성하게 읽을 수 있도록 돕는다. 우리는 시편이 어떻게 예수님을 다윗의 집에 나신 왕이요 언약을 지키시는 이로 예언하며 고대하는지 묵상할 수 있다. 우리는 시편을 하나님의 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이라는 패턴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시편에서 예수님의 페르소폰을 볼 수 있으며, 그러한 시편을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강력한 증언으로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시편은 예수님의 삶을 노래하는 목록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교회에서 성도들과 더불어 예수님과 함께 노래할 때는(히브리서 2:12), 우리의 삶을 노래하는 목록이기도 하다. 


원제: Listen to Jesus’s Playlist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김은홍

시편을 그리스도론으로 접근하는 이러한 세 가지 범주는 우리가 성경을 더욱 풍성하게 읽을 수 있도록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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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Greg Lanier

그렉 래니어(PhD, Cambridge).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Orlando, Florida)의 부교수로, 그리고 River Oaks Church(PCA)의 부목사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