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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
by C. S. 루이스2022-06-22

요즘 나오는 책과 옛날 책 중 한 가지만 읽어야 한다면, 나는 옛날 책을 읽으라고 독자에게 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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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연재를 시작하며


이 글은 아타나시우스의 말씀의 성육신의 관하여의 영역판에 부친 C. S. 루이스의 서문을 출판사 죠이북스의 허락을 받아 간추린 것입니다(소제목은 편집자가 임의로 단 것임). 기독교 고전 읽기를 독려하는 C. S. 루이스의 이 글과 함께 앞으로 수회에 걸쳐 매주 주요 기독교 고전을 한 권씩 소개할 예정입니다. 복음과도시 편집자


앞으로 소개할 기독교 고전


• 요한 칼뱅_기독교강요

• 아우구스티누스_고백록

• 조나단 에드워즈_신앙감정론

• C. S. 루이스_순전한 기독교

• J. C. 라일_거룩

• 존 오웬_죄 죽이기

• 존 밀턴_실낙원

• 아타나시우스_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 J. I. 패커_하나님을 아는 지식

• 리처드 십스_상한 갈대  

(글 싣는 순서는 바뀔 수 있습니다.)


어떤 주제를 다루든 옛날 책은 전문가들만 읽어야 하고 아마추어들은 최신 서적들에 만족해야 한다는 이상한 개념이 널리 퍼져 있다. 영문학 교수로서 내가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어떤 평범한 학생이 플라톤주의에 관해 무언가를 알고 싶을 경우 도서관 서가에서 플라톤의 향연(Symposium) 역본을 찾아 읽어 볼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학생은 오히려 그보다 열 배는 더 두꺼운 요즘 책을 읽으려 한다. 온통 “주의”(ism)가 어떻고 그 영향력은 어떻다는 말만 할 뿐 플라톤이 실제 무슨 말을 했는지는 겨우 열두 페이지에 한 번 정도 나오는 지루한 책을 말이다. 그러나 이 정도의 오류는 겸손에서 비롯되는 오류이기 때문에 다소 귀엽다고 할 만하다. 


이 학생은 위대한 철학자로 손꼽히는 사람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없다. 자신은 그럴 만한 자격이 없으며 그 철학자의 책을 읽어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바로 그 위대함 때문에 현대 주석가들의 글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다는 사실을 이 학생이 안다면 좋았을 것이다. 아주 평범한 학생도 플라톤의 말을 다는 아니더라도 상당 부분 이해할 수 있을 테지만, 플라톤주의를 다루는 요즘 책들 중에는 누가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책들이 있다. 그래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내가 지금까지 힘써 온 일 한 가지는, 직접적 지식은 간접적 지식에 비해 더 애써서 획득할 만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대개 더 쉽고 더 기분 좋게 습득할 수도 있다고 젊은이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근래 나온 책들을 더 좋아하고, 옛날 책은 선뜻 집어 들지 못하는 이 잘못된 태도가 가장 만연한 곳은 다름 아닌 신학 영역이다. 목회자나 신학생이 아닌 일반 그리스도인들의 소규모 공부 모임에서는 누가나 바울,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혹은 리차드 후커(Richard Hooker, 1554-1600, 잉글랜드 국교회 성직자)나 조셉 버틀러(Joseph Butler, 1692-1752, 더럼의 주교)가 아니라 니콜라이 베르쟈예프(Nikolai Aleksandrovich Berdyaev, 1874-1948, 러시아의 철학자이자 작가), 자크 마리탱(Jacques Maritain, 1882-1973, 프랑스의 아퀴나스파 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 1892-1971),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Sayers, 1893-1957), 심지어 필자 같은 사람들의 책을 공부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


내가 보기에 이는 본말이 바뀌었다. 물론 나 자신도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일반 독자가 현대 서적을 전혀 읽지 않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하지만 요즘 나오는 책과 옛날 책 중 한 가지만 읽어야 한다면, 나는 옛날 책을 읽으라고 독자에게 권할 것이다. 내가 독자에게 이런 조언을 하는 이유는, 그 독자가 아마추어이고 따라서 최신 책들만 읽는 데 따르는 위험에서 보호받을 가능성이 전문가에 비해 훨씬 적기 때문이다. 최신 서적은 아직 검증이 안 된 상태이고, 아마추어는 그 책이 읽어도 될 만한 책인지 판단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요즘 나오는 책들은 긴 세월에 걸쳐 확립된 기독교 사상의 대계(大系)를 기준으로 검증되어야 하며, 책 속에 감춰진 모든 함축적 의미(그런 의미가 있는지 대개 저자 자신도 생각해 보지 않은)가 밝혀져야 한다. 


현대 서적은 다수의 다른 최신 책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여덟 시에 시작된 대화에 열한 시쯤 끼어들면 대개 대화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중간에 끼어든 사람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던진 몇 마디 말이 폭소를 낳기도 하고 짜증을 불러일으키기도 할 것이며, 그러면 그 사람은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할 것이다. 물론 좌중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 사람이 끼어들기 전에 나눈 대화가 그 사람의 그 말 몇 마디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최신 서적 속의 특이할 것 없어 보이는 문장들이 사실은 다른 어떤 책을 겨냥한 말일 수 있다. 그래서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알았다면 격분해서 거부했을 말을 자기도 모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유일한 안전장치는 당대의 논쟁들을 올바른 관점에서 보게 해주는 명백하고 기본적인 기독교 신앙의 표준(리차드 백스터는 이를 가리켜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라고 했다)을 아는 것이다. 그런 표준은 오직 오래된 책들에서만 얻을 수 있다. 바람직한 규칙이라면, 최신 서적을 읽고 나서는 옛날 책을 한 권 읽고, 그런 다음에야 최신 서적을 또 한 권 읽는 것이다. 이것이 너무 버겁다면, 최신 서적을 세 권 읽을 때 오래된 책을 적어도 한 권은 읽어야 한다.


각 시대마다 나름의 관점이 있다. 이 관점은 어떤 진리를 특히 잘 파악하기도 하고 어떤 오류를 특히 잘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 시대의 특징적 오류를 바로잡아 줄 책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책은 곧 오래된 책들을 뜻한다. 당대의 저자들은 당대의 관점을 어느 정도 공유한다. 필자처럼 그 관점에 심히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과거에 벌어진 논쟁들을 읽을 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논쟁을 벌이는 양측 모두 지금의 우리라면 절대적으로 부인할 내용들을 상당 부분 아무 이의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양측은 자신들이 더할 수 없이 상반되는 입장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이들은 상당히 많은 공통의 가설로써 은밀히 내내 결속되어 있었다. 이 가설로써 이들은 자기들끼리는 연합했고, 전후(前後) 시대의 이론들과는 맞서 싸웠다. 


최신 서적들만으로는 당대의 맹점을 바로 잡을 수 없다 


20세기의 특징적 맹점(후대 사람들은 이 맹점에 관해 이렇게 물을 것이다. “옛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지요?”)은 우리가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지점에 있으며, 이 맹점과 관련해서는 히틀러와 루즈벨트 대통령 간에도, H. G. 웰스와 칼 바르트 사이에서도 아무 문제없이 의견이 일치된다. 누구도 이 맹점을 완전히 피해 갈 수 없으며, 최신 서적만 읽을 경우 이 맹점이 강화될 것이 확실하고, 이에 대한 경계심도 약화될 것이다. 최신 서적이 맞는 말을 할 경우, 이는 우리가 이미 반쯤은 알고 있는 진리를 말해 주는 것일 뿐이다. 반대로 틀린 말을 할 경우, 이는 이미 위험할 정도로 잘못되어 있는 우리의 오류를 심화시킬 것이다. 이를 완화할 유일한 대책은 우리의 지성을 통해 수세기의 깨끗한 해풍(風)이 계속 불어오게 하는 것뿐이며, 이는 오래된 책들을 읽음으로써만 가능하다. 


물론 과거에 어떤 마법 같은 게 있지는 않다. 옛날 사람들이 지금 사람들에 비해 더 똑똑하지도 않았다. 옛 사람들도 우리처럼 실수를 저질렀다. 하지만 우리와 같은 실수는 아니었다. 우리도 이미 오류를 저지르고 있으므로 우리가 옛 사람들보다 낫다고 우쭐할 일도 없고, 옛 사람들의 오류는 이제 다 드러나서 누구나 알 수 있기에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지도 않는다. 하나보다 둘이 낫다고 하는 것은 어느 한쪽이 무오(無)하기 때문이 아니라 둘 다 한 방향으로 잘못 갈 리는 없기 때문이다. 확신컨대, 미래에 나올 책들이 과거에 나온 책들만큼 탁월하게 우리의 오류를 바로잡아 줄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미래에 나올 책들은 우리 손에 넣을 수 없다.


내 경우, 영문학을 연구하다가 거의 우연에 가깝게 기독교 고전을 읽게 되었다. 리차드 후커,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1593-1633), 토마스 트러헌(Thomas Traherne, 1637-1674), 에드워드 테일러(Edward Taylor, 1645-1729), 존 버니언(John Bunyan, 1628-1688) 같은 사람들의 작품을 읽은 것은 이들 자체가 위대한 영문학 작가들이기 때문이고, 보이티우스(Boethius, 480-525),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 단테 (Dante, 1265-1321) 같은 사람들의 작품을 읽은 것은 이들이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조지 맥도널드 (George Macdonald, 1824-1905)는 내 나이 열여섯 살 때 알게 된 작가로, 그의 기독교 신앙을 무시하려고 오랜 세월 애쓰기는 했지만 그에 대한 내 충성심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알다시피, 이들은 교파도 다르고 환경과 시대도 각양각색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 사람들의 작품을 읽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기독교 세계의 분열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이 분열상은 이 작가 몇몇이 자신의 글로 아주 격렬히 표현했다. ‘기독교’는 아주 많은 의미를 지닌 단어여서 실제로는 아무 의미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현대 서적만 읽는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자신이 속한 세기에서 한 걸음 벗어 나옴으로써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모든 의심을 초월해서 깨달을 수 있다. 수 세대의 세월을 배경으로 판단해 볼 때 순전한 기독교는 교파를 초월한 무미건조하고 명백한 명제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자기모순이 없고 다함없는 어떤 것임이 드러난다. 


다양한 고전들 속에서 기독교의 놀라운 일치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내가 겪어 봐서 아는 사실이다. 아직 기독교를 싫어하던 시절, 나는 마치 너무도 익숙한 냄새처럼 거의 불변하는 어떤 것을 알아보는 법을 배웠는데, 그것을 이제 청교도 버니언의 작품에서, 국교도 후커의 작품에서,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파인 단테의 작품에서 만났다. 그것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Francois de Sales, 1567-1622)의 글에도 (달콤하고 꽃 같은 형태로 존재했고, 에드먼드 스펜서(Edmund Spenser, 1552-1599)와 아이작 월튼(Izaak Walton, 1593-1683)의 작품에도(장중하고 꾸밈없는 형태로 존재했다. 그것은 파스칼과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 1709-1784)의 작품에도 (냉혹하지만 단호한 형태로) 존재했고, 시인 헨리 본(Henry Vaughan, 1622-1695)과 야콥 뵈메(Jakob Bohme, 1575-1624, 독일의 신지학 작가)와 트러헌의 작품에도 온화하고 놀랍고 낙원의 향취를 지닌 형태로 녹아들어 있었다. 18세기의 도회적이고 냉철한 풍조 가운데서도 방심할 수 없었다. 윌리엄 로(William Law, 1686-1761)와 조셉 버틀러(Joseph Butler, 1692-1752)는 그 길을 가로막고 있는 두 마리 사자였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이른바 ‘이교 신앙’(Paganism)도 이를 막지는 못했다. 이는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곳, 요정의 여왕(The Faerie Queene, 에드먼드 스펜서가 쓴 12권짜리 장시)과 아카디아(Arcadia, 필립 시드니가 쓴 목가풍의 연애시) 한가운데서도 숨어서 기다렸다. 물론 형태는 다양했다. 하지만 본질은 전혀 오해의 여지가 없을 만큼 똑같았다. 생명이 되게끔 하지 않는 한 이 향기는 우리에게 죽음이며, 이 피할 수 없는 향기를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죽음의 바람이

저기 먼 나라에서 불어온다

(A. E. 하우스먼의 시 ‘내 맘속으로 죽음의 바람이’에서_옮긴이)


기독교 세계의 분열에 대해서는 모두 슬퍼하고 부끄러워하는 게 옳다. 그리고 기독교의 틀 안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은 그 분열 때문에 너무 쉽게 낙심할 수도 있다. 분열은 나쁘지만, 이런 사람들은 기독교의 틀 밖에서는 분열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지 못한다. 기독교의 틀 밖에서 볼 때, 그 모든 분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온존(溫存)하는 것은 엄청나게 경이로운 일치성(unity)인 듯하다(실제로 그러하듯). 이것은 내가 틀 밖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안다. 그리고 우리의 원수들도 이 사실을 잘 안다.


그 일치성은 자기가 속한 시대에서 한 걸음만 밖으로 나가 보면 누구라도 확인할 수 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 일치성은 우리가 지금까지 상상해 온 것 이상이다. 일단 이 일치성을 잘 이해하고, 그런 다음 이를 과감히 말할 수 있게 될 경우,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사실은 버니언의 말을 풀어 옮기고 있는데 로마가톨릭교도로 여겨지기도 하고, 아퀴나스를 인용하고 있는데 범신론자로 오해받기도 하는 등 말이다. 이는 우리가 이제 시대와 시대 사이에 가로놓인 높은 수준의 구름다리 위에 올라섰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이 구름다리는 골짜기에서 보면 아주 높게 보이고, 산에서 보면 아주 낮게 보이며, 늪에 비하면 아주 좁아 보이고, 양 떼가 다니는 길에 비하면 아주 넓어 보인다.

아직 기독교를 싫어하던 시절, 나는 마치 너무도 익숙한 냄새처럼 거의 불변하는 어떤 것을 알아보는 법을 배웠는데, 그것을 이제 청교도 버니언의 작품에서, 국교도 후커의 작품에서,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파인 단테의 작품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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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C. S. 루이스

1898-1963.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불린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순전한 기독교, 고통의 문제, 예기치 못한 기쁨, 천국과 지옥의 이혼, 헤아려 본 슬픔, 시편 사색, 네 가지 사랑, 인간 폐지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