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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복음은 ‘대중적’인가?
by 김형익2022-06-13

가치중립적 의미로 복음이 대중적이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그렇다’이다. 복음은 만인에게 선포되어야 하는 좋은 소식이기에 대중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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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대중적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먼저 ‘대중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대중적’의 의미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수많은 사람의 무리를 중심으로 한 것’이라고 풀이한다. 이 말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popular”인데, 국립국어원 한국어-영어학습사전은 ‘대중을 중심으로 한’ 또는 ‘대중의 취향에 맞는’이라고 풀이한다. 이 영단어는 정치의 영역으로 확장되면, 대중주의(populism) 또는 대중주의자(populist)라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용어들은 일부 엘리트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 전체를 동등하게 대변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한 가치중립적이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인기영합주의라는 부정적 뉘앙스, 즉 오로지 정권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한 목적을 위해 대중의 인기에 기대고 영합하는 정치 행위나 정치인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곤 한다. 이렇게 ‘대중적’이라는 말은 얼마든지 가치중립적이면서도 부정적 뉘앙스를 가진 말로 사용될 수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다시 “복음은 대중적인가?”라고 묻는다면 당신의 대답은 무엇인가?


가치중립적 의미로 복음이 대중적이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그렇다’이다. 복음은 만인에게 선포되어야 하는(막 16:15) 좋은 소식이기에 대중적이다. 만일 ‘대중적’이라는 단어의 부정적 용례를 알고 오해될 위험성을 피하려고 한다면, ‘복음은 대중적이다’라는 표현보다는 ‘복음은 보편적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을 추천할 수도 있겠다. 복음은 모든 민족, 모든 죄인에게 선포되어야 하는 좋은 소식이고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말씀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다(딤전 1:15).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복음은 보편적이다(딤전 2:4). 


설교는 대중적인가?


여기서 내가 던지고 싶은 또 하나의 질문이 있다. “설교는 대중적인가?” 오래 전 일이다. 미국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시작하고 두어 달이 지나던 즈음 내게 설교와 관련하여 한 가지 요청을 한 분이 있었다. 그분의 요청은 “대중적인 설교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요청을 한 분은 바로 그 영단어 “popular”를 사용했다. “좀 ‘popular’한 설교를 해주십시오.” 그렇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단어 자체는 부정적 가치를 전달하지 않는다. 대중적 설교에 대한 그의 요청은 설교가 대중적일수록 교회가 성장할 테니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설교를 해 달라는 의미였다. 그가 요청한 ‘대중적 설교’는 보다 많은 사람(대중)이 좋아하고 반응할 수 있는 설교였다. 이런 의미를 전제하고 다시 한 번 묻겠다. 설교는 대중적인가? 그저 쉽게 ‘대중적 설교는 틀렸다’고 단정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서도 ‘대중적 설교’는 부정적 가치를 지니는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설교는 그 성격상 대중적이다.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는 복음이 대중적인 만큼 (혹은 보편적인 만큼) 대중적이어야 한다. 설교가 교회와 예배의 맥락에서 전해질 때 그 설교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지만, 설교가 언제나 하나님 백성의 예배의 맥락에서만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18세기 존과 찰스 웨슬리 형제와 조지 휫필드가 기존의 틀을 깨고 들판과 광산에서 설교를 했을 때, 그것은 반제도적 시도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들의 설교는 사도행전 2장에서 보는 사도 베드로의 설교나 사도행전 17장에서 보는 사도 바울의 설교에 가까운 설교였다. 베드로는 정확한 장소를 누가가 지목하고 있지는 않지만 예루살렘의 한 넓은 거리에서 (아마도 성전이 가까운 곳에서) 설교를 했을 것이고, 바울은 아테네의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설교를 했다. 사실, 설교가 대중적일 수 있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을 꼽으라면 우리 시대의 빌리 그래함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1973년 서구의 기독교 국가도 아닌 대한민국의 여의도 광장에 100만 명을 모을 수 있는 인물이었고, 그는 그 ‘대중’에게 설교를 했다.

 

들려지는 설교를 하는 것은 설교자의 정당한 수고이다 


설교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모두를 향해서 선포되어야 한다. 설교가 보편적 (혹은 대중적) 복음을 그 내용(contents)으로 전하는 것이라면 설교는 대중적이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복음의 진리일지라도 듣는 사람들이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없는 방식으로 전해진다면 그것은 오로지 설교자의 책임이다. 설교는 그 내용만큼이나 전달(delivery)도 중요하고, 설교자는 내용을 준비하는 것만큼이나 전달의 방식을 위해서도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이 나팔 소리로 백성들에게 신호를 보내던 전통에 근거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고전 14:8). 보편적 복음의 진리는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정교하고 분명한 방식으로 설교되어야 한다. 나는 바른 복음을 전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나머지, 설교가 대중적으로 전달되어야 한다는 점의 중요성을 축소하거나 간과하는 사례를 우려한다. 바른 복음은 보편적 복음이고, 그 보편적 복음은 가능한 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선포되고 설교되어야만 한다. 들려지는 설교를 하기 위해 고민하고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은 설교자의 정당한 책임이다. 


‘대중주의적’ 설교의 유혹


하지만, 여기에는 언제나 사탄이 설교자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쳐놓은 덫이 있다는 사실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교회 성장의 욕구는 종종 정당함을 넘어 많은 목회자-설교자에게는 유혹의 미끼가 되곤 한다. 교회를 개척하고 자립할 수 있을 만큼의 교인들로 구성되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걸린다. 사실 이것은 시간의 문제만도 아니다. 개척교회가 아니더라도 성장이 지연되거나 지체될 때 목사는 대중주의적 설교의 유혹을 받는다. 여기서 나는 대중주의적 설교의 ‘유혹’이라고 말했다. 이 유혹은 설교의 전달 방식이 아니라 설교의 내용인 복음의 진리를 대중영합적으로 비틀고 싶은 마음 속에서 힘을 얻는다. 그렇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복음은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진리이고(딤전 1:15), 만민에게 전파되어야 할 좋은 소식이기에 대중적이다. 그러나 대중주의적 설교의 유혹이 설교자의 내면에서 힘을 얻을 때에는, 불변하는 보편적 복음의 내용을 ‘모든 사람이 좋아하고 믿을 만한 복음’으로 비틀고 왜곡하는 일이 일어난다. 교회 성장의 욕구에 못 이겨 이런 방식의 ‘대중적’ 설교를 하게 되는 순간, 목사는 진리의 매춘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진리의 매춘 행위를 통해 성장한 교회의 화대를 받아 누리게 되면, 따라오는 것은 교회가 사탄의 회당으로 변질되는 일이다.


복음은 보편적이지만 ‘대중주의적’일 수는 없다


실수는 대중적 복음의 성격을 ‘대중주의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일어난다. 보편적 복음은 그 본질상 언제나 대중을 둘로 가르는 역할을 한다.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신약의 사도들, 심지어 예수님의 설교는 모두 대중적이었지만, 언제나 대중을 둘로 가르는 결과를 낳았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중적 설교가 교회의 성장을 가져온다는 신화는 에덴동산에서 하와에게 접근했던 뱀의 거짓말과 맥을 같이 한다. 그리고 물탄 메시지와 복음을 전했던 구약의 거짓 선지자들과 신약의 거짓 사도들, 거짓 교사들에게 깔려 있는 전제였다.


보편적 복음의 진리를 설교했을 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장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교회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어떤 인물에게는 비범한 설교의 은사를 주셨다는 사실도 안다. 고대 교회에서 황금 입으로 불렸던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나 18세기의 조지 휫필드, 19세기의 찰스 스펄전, 20세기의 마틴 로이드존스와 같은 이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비범한 능력을 지닌 대중적 설교자였다. 그들은 복음의 진리를 조금도 비틀지 않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대중이 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전했다. 우리 시대에는 존 맥아더와 존 파이퍼, 팀 켈러와 같은 분을 들 수도 있겠다. 이들의 교회는 모두 보편적 복음 설교의 결과로 외적 성장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들의 설교는 대중의 취향에 맞추려는 대중주의적 설교는 아니었다. 반면, 우리는 아더 핑크나 윌리엄 스틸 같은 분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아더 핑크는 동일한 보편적 복음의 진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강단이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었다. 윌리엄 스틸도 동일한 복음을 일평생 한 강단에서 전했지만 교회는 성장하지 않았다. 


보편적 복음의 진리를 타협 없이 전하되, 대중에게 들리는 방식으로 설교하기 위해 수고하는 것은 설교자의 책임이고 몫이다. 그리고 교회의 외적 성장이라는 결과는 하나님께서 주권 가운데 주시는 은혜다.

대중주의적 설교의 유혹이 설교자의 내면에서 힘을 얻을 때에는, 불변하는 보편적 복음의 내용을 ‘모든 사람이 좋아하고 믿을 만한 복음’으로 비틀고 왜곡하는 일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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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형익

김형익 목사는 건국대에서 역사와 철학을, 총신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인도네시아 선교사, GP(Global Partners)선교회 한국 대표 등을 거쳐 지금은 광주의 벧샬롬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 ‘율법과 복음’, ‘참신앙과 거짓신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