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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죽은 제3의 길, 살아 있는 제3의 길
by Chris Watkin2022-06-04

근대성이 가져온 이원론은 종종 해를 입히고 폭력적이다. 그런 이원론을 거부하는 건 우유부단해서가 아니다. 도리어 기존의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선택지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하기보다는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지 한번 들어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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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길”(the third-way)이 무엇일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전혀 몰랐는데, 얼마 전 “제3의 길-주의”(the third-wayism)이라는 용어가 특정 기독교 사역, 특히  팀 켈러를 비판할 때 사용된다는 것을 알았다.[1] 내가 대충 이해한 바로, 이 말은 지금 사회에 만연한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양자 대결 구도의 정치적 또는 문화적 대안을 거부하고 제3의 다른 접근 방식을 추구하는 입장을 말한다. 


그게 뭔지 알지도 못하는 데 나는 제3의 길을 추구한다고 비난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 경험이 있기에 나는 특히 더 다른 이의 비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제3의 길에 대한 비판에는 일면 귀를 기울일 요소도 있지만, 한편으로 많은 오해와 모순, 순진한 발상들로 가득하기도 하다. 제3의 길이 무엇인지와 더불어 무엇이 아닌지를, 그리고 각종 비판에도 불구하고 왜 그 길이 각종 논쟁에 대한 건전하고 성경적인 접근 방식이라고 내가 생각하는지에 관해서 네 가지 요점을 (또는 권고를) 가지고 설명하겠다. 


1. 제3의 길 주의라고 모든 게 다 같지는 않다 


제3의 길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옳은 점부터 이야기하자. 이 비판에서는 크게 두 가지가 주로 제기된다. 첫째, 항상 중간을 추구하는 제3의 길은 진리가 서로 반대하는 양쪽 진영 사이 어딘가에서 발견된다고 가정하기에 모든 정치적 또는 문화적 불일치에 관한 토론에서 양쪽 모두를 동일하게 취급할 수밖에 없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절충하는” 접근 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중용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지 성경과는 거리가 멀다. 중용과 달리 성경은 분명한 대립(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빌 2:12-13)을 이야기한다. 정통과 이단은 신경 쓰지 않고 양측의 차이만 좁혀 가면 된다는 생각은 단지 잘못된 문화적 참여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아예 배교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제3의 길은 이런 식으로 조잡하게 절충하자는 게 아니다. 제3의 길의 사고방식은 기존의 이념들 사이에 어색하게 끼어들기보다는 성경을 기준으로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모든 주제에 관해서 할 이야기를 제대로 하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성경이 있는 그대로 그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성경과 함께 세속적인 이데올로기와 의미 있는 대화를 가질 수 있다. 


제3의 길에 관해 확인된 두 번째 비판은 스스로 한 수 위라고 생각하며 기존의 모든 입장을 거부하고, 모든 논쟁과 싸움을 초월해 자기네는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신선놀음을 하다 보니 이웃 사랑을 단지 성결의 문제로 축소시키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입장도 절대적으로 지지하지는 않고 대신 모든 입장을 다 깔보는 게 제3의 길이라는 것이다. 이런 비판이 사실이라면, 제3의 길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이런 식의 조잡한 풍자화는 팀 켈러와 같은 사상가가 펼쳐가는 사역의 전부도 또 실체도 아니다. 위조지폐가 있다고 해서 모든 돈을 다 금지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종종 엉터리 제3의 길이 있다 해서 모든 “제3의 길-주의”를 거부해서도 안 된다. 


2. 근대성은 이원론에 의해 체계화된다


더 나은 성경적 제3의 길에 관한 사례를 구축하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 생각에서 시작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현대 서구 문화가 선천적으로 이원론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기호와 사물; 주체와 대상;

 미신과 계몽;

 타율성과 자율성;

 편견과 자유사상;

 전통과 현대.


목록은 더 이어질 수 있다. 우리는 정치와 국제 관계에서도 다음과 같은 이원론의 지배를 받는다.


 제1세계와 제3세계;

 정복자와 피지배자;

 압제자와 피해자;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

 구호 받을 자격이 있는 빈민과 구호 받을 자격이 없는 게으른 빈민.


이 같은 패턴에 따라 미국, 영국, 호주 정치는 좋든 싫든 두 개의 주요 정당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원론 중 그 어느 것도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고 또 어떻게 번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성경 말씀의 풍부함과 복잡성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 근대성이 가져온 이원론은 종종 해를 입히고 폭력적이다. 그런 이원론을 거부하는 건 우유부단해서가 아니다. 도리어 기존의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선택지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하기보다는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지 한번 들어 보자는 것이다. 


3. 제3의 길은 첫 번째 길이다


이와 관련하여 기억해야 할 점은 성경이 현대의 세속 문화가 제시하는 이원론에 단순히 반응하는 수준에서 사후약방문식으로 세 번째 대안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제3의 길”이라는 용어에는 다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다. 현대의 이원론은 훨씬 더 복잡한 성경적 실재를 축소시킬 뿐 아니라 부분적으로 왜곡한다. 


하나님의 성품에서 발견하는 공의와 자비가 드러나는 사례를 들어 보자. 하나님은 공의로우신가? 끝까지 그러하시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가? 주를 찬양하라. 그러하시다. 그의 크신 긍휼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셨다. 사도 요한이 간결하게 표현한 것처럼, 하나님은 반은 공의이고 반은 은혜가 아니라, “은혜와 진리가 충만”(요 1:14)하시다. G. K. 체스터턴은 성경이 말하는 급진적인 “제3의 길”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우리는 두 개의 합성이나 타협을 원하지 않고 절정에 이른 그 두 가지를 모두 원한다는 것, 말하자면, 사랑과 분노가 모두 붙타는 상태를 원한다. … 이 조합의 아이디어가 지정 정통신학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굳이 독자에게 상기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정통신학은 그리스도가 요정처럼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동떨어진 존재가 아닐 뿐더러, 켄다우로스처럼 반쪽은 인간, 반쪽은 동물의 존재도 아니고, 100퍼센트 사람인 동시에 100퍼센트 하나님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2]


두 가지 다 에너지의 정점에 있다. 이것이 성경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 문화에서 하나님의 속성이 어떻게 갈라지고, 그 결과 같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어떤 분열을 일으키는지 한번 살펴보라. 하나는 자비와 이해에 바탕을 둔 형벌 제도이고 또 하나는 정의와 형벌에 기반을 둔 형벌 제도이다. 


우리가 정의와 자비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추구한다면, 그건 오늘날 서로 다른 현대 주장의 차이를 줄이자는 게 아니다. 도리어 풍부하기 이를 데 없는 성경의 그림을 현대의 세속적 모델이 쪼개서 왜곡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수많은 이단처럼,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낼 능력이 없는 그들은 진리의 일부를 취하여 마치 전체 진리인 양 만들어낼 뿐이다. 하나님의 성품 속 풍부한 복잡성은 제3의 길이 아니라 첫 번째(창 1:1)이며, 이런 하나님의 길을 공개 담론에서 제기하는 것은 새로운 제3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이데올로기가 잘못된 방향으로 떨어져 나온 원래의 첫 번째 길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4. 신학은 정치와 다르다


이런 저런 세속적 이데올로기 문제에서 성경을 직접 적용하지 않는 모습을 책임의 포기, 즉 중요한 사회적 또는 정치적 문제에서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과 정치를 혼동하는 것이다. 신학적 참여는 다음 질문을 던진다. 성경의 복잡한 진리, 그러니까 창조, 타락, 구속, 완성에 대한 포괄적인 이야기와 그에 관한 모든 세부 사항이 현대의 존재론과 인식론, 그리고 정치가 만들어내는 각종 범주 및 구조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그러나 정치적 현실이 다루는 질문은 전혀 다르다. 이런 것이 가장 큰 질문이다. 다음 선거에서 누구에게 투표할까?


신학적 측면에서 먼저 생각하면, 하나님과 인류와 사회와 세계에 대한 실로 완전한 관점을 제시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반영한 정당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한 정당에 투표하고 또 심지어는 선거 운동까지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정치적 비전과 용어는 결코 그 정당의 의제에 포함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또한 나는 그 정당이 성경에 반대되는 입장을 취할 때 지적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성경을 단지 제3의 길이라고 주장한다 해서 내가 정치적으로 열정적이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오히려 내가 누구누구의 정치적 푸들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 줄 것이다. 


권고: 단지 한두 사람의 글에 제자훈련 또는 사역을 걸지 말라


이 글에 나온 비난은 주로 팀 켈러의 사역에 대한 것이다. 켈러는 스스로 인정했다시피 일종의 화해자이다. 진짜 논쟁을 즐기는 사역자들은 따로 있다. 그러나 괜찮다. 어차피 교회는 다양성을 필요로 한다. 21세기에 “나는 켈러를 따른다”라고 해서 1세기에 있었던 “나는 아볼로를 따른다”나 “나는 게바를 따른다”보다 사정이 더 나아진 것은 아니다. 팀 켈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하는 일꾼”(고전 3:5)의 한 사람일 뿐이다. 누구라도 그 사람의 사역이 이룬 성공 또는 문화적 통찰을 유일한 길로 취급한다면, 그 잘못은 그 사람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따르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팀 켈러의 독서는 광범위하고 다종다양하다. 그는 단지 한 사상가나 한 패러다임을 따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팀 켈러 또는 다른 사람과 관련해서도 이원론에 빠지지 말자.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내가 기독교적 성장과 이해력을 키우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켈러주의자’(Kellerist)가 되지 않음으로써 그의 모범을 따르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이게 “제3의 길”이라면, 나는 기꺼이 거기에 등록하겠다. 



[주]

1. 가장 최근의 예는 다음과 같다. James R. Wood, “How I evolved on Tim Keller,” First Things, 5/6/22.  

https://www.firstthings.com/web-exclusives/2022/05/how-i-evolved-on-tim-keller

일찍이 제3의 길은 논한 글은 다음 글을 보라. Chad Hall, “Third Way Faith,” Christianity Today, 10 October 2008. 

https://www.christianitytoday.com/pastors/2008/october-online-only/third-way-faith.html.


2. Chesterton, Orthodoxy, 296. [역주: G.K.체스터턴의 정통(아바서원), 208쪽에서 인용]


원제: The Third Way is Dead. Long Live the Third Way!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그건 오늘날 서로 다른 현대 주장의 차이를 줄이자는 게 아니다. 도리어 풍부하기 이를 데 없는 성경의 그림을 현대의 세속적 모델이 쪼개서 왜곡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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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Chris Watkin

크리스 왓킨은 Monash University의 인문학부 호주 연구 위원회 미래 연구원으로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올해 가을 존더반에서 그의 책 ‘성경적 비판 이론(Biblical Critical Theory)’이 출간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