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으로

������

교회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by 김형익2022-05-12

공동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을 공동체로 창조하셨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신앙의 성숙은 오래도록 내 마음을 떠나지 않은 주제이다. 지난 30여년을 선교사와 목회자로 살아오면서 나는 복음을 위한 헌신이나 신앙생활을 해 온 세월이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누이 보아 왔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율법은 사람의 외적 태도와 행동양식은 변화시킬 수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성숙은 안에서 밖으로의(inside out) 변화이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사람을 안에서 밖으로 온전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 이 은혜가 말씀과 기도와 성례(예배)라는 통상적인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하지만 이것만 말하면 충분한 것일까?  


말씀과 기도와 성례(예배)는 홀로 하는 행위로만 규정되지 않는다. 이 은혜의 수단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 받은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반응이기도 하다. 신자는 함께하는 영적 공동체에 살아갈 때 건강하게 성장한다. 신자에게 영적 공동체인 교회는 물고기가 살아가는 환경이고 방식인 물과 같다. 신자가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공동체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공동체로 존재하신다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임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로 계시는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공동체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서로 영광을 돌리는 관계로 존재하셨다(요 17:1, 5). 잠언 8:30-31은 이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여기서 의인화된 화자인 지혜는 성자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 말씀에 의하면, 천지 창조의 때에 성자께서는 성부 곁에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성부의 기뻐하시는 대상이 되셨고 또한 성부 하나님을 즐거워하셨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은 서로를 무한히 기뻐하시고 영원토록 즐거워하심으로써 서로 영광을 돌리고 계셨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은 이 기쁨 충만한 교제를 통해서 완전한 영광을 영원토록 누리고 계셨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그 기쁨 충만한 완전한 교제를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사랑의 영이신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 즉 성부와 성자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 안에서 형언할 수 없는 교제를 통해 서로 안에서, 서로와 함께, 서로를 통해서 영원토록 영광을 누리신다. 이것이 삼위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방식이다. 삼위 하나님은 공동체로 존재하신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세 위격은 각각 고유하게 구별되시지만 동일한 신성의 본질을 가지신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권능과 영광에서 조금의 차등이 없는 동등하신 하나님이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의 글 ‘하나님의 천지창조 목적’(A Dissertation Concerning 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the World)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동기는 삼위 하나님 안에서 흘러넘치는 기쁨이었다고 말한다.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교제 속에서 영원토록 흘러넘치는 기쁨과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나누어 주실 대상, 흘려보내실 존재를 창조하기를 원하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의 꽃인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만이 하나님과 쌍방으로 소통할 수 있는 존재다. 그리고 하나님은 첫 사람에게 삼위 안의 교제를 통해 흘러넘치는 기쁨을 나누어 주셨다. 인간은 그 기쁨에 겨워하고 행복을 누림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맛보고 그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과 대요리문답 1문답이 각각 다룬 주제이다. 


하나님은 공동체를 창조하셨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공동체로 존재하신다. 공동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드셨을 때, 처음으로 ‘좋지 않다’고 하신 것은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었다(창 2:18).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서 취하신 갈빗대로 하와를 만들어 주셨을 뿐 아니라 두 사람을 부부로 살도록 축복해 주셨다. “남자가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하와 창조는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에서 흠을 발견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이미 하나님의 작정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것이었음을 보여준다(창 1:28). 공동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을 공동체로 창조하셨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기쁨을 누리며, 성령 안에서 부부의 교제를 통해서 그 기쁨을 더 풍성히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죄를 범하는 순간,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공동체였다. 범죄한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과 소외를 경험하는 존재가 되었고(창 3:8), 아담은 자신의 범죄를 하나님이 주셔서 자신과 함께 공동체로 살아가게 하신 여자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책임지지 않는 비겁하고 저열한 망가진 남성성을 드러냈으며(창 3:12), 하와는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는 말씀을 통해 부부관계의 하나됨이 깨어지고 부부 사이에 갈등과 고통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죄인이 피할 수 없는 운명적 예언을 들었다(창 3:16). 이렇게 범죄와 함께 삼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공동체는 깨어져 버리고 말았다.

      

공동체를 재창조하시는 하나님


많은 그리스도인은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죽을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인생을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천국으로 인도하려는 것이었다고 믿는다.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과 주님의 마지막 기도를 보면 그것들은 그 이상의 무언가를 우리에게 말해 준다. 먼저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을 생각해 보자. 주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하셨다. 새 계명의 핵심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곧 교회다. 서로 사랑의 기준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다. 또 요한복음 17장의 주님의 마지막 기도는 어떤가?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1-23). 

이 기도는 주님의 마음속에 끝까지 자리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된 공동체인 교회다. 하나됨의 기준이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하나되심이라고 주님은 이 기도에서 세 번이나 반복하여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 죄를 대속하시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주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잃어버린 공동체를 다시 세우시려고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이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목숨을 주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요, 성부와 성자 하나님이 하나되심 같이 하나된 공동체이다. 


교회로 살아가기


이렇게 공동체로 계시는 삼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로 잃어버린 공동체를 다시 세워 주셨다. 우리는 주님의 시각으로 교회를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이 주신 새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수고를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이 드리신 기도로 기도할 수 있다. 비록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일과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하나되심을 반영하는 공동체가 되는 일에서 많은 실패를 경험하겠지만, 희망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 안에서 목숨을 내어놓으신 일 덕분에 우리는 매일 깨어지는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께 용납됨을 경험하며, 날마다 다시 형제를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 신자의 삶의 방식인 공동체를 떠난 신앙의 성숙은 결코 온전할 수 없다. 정교회 신학자 존 지지울러스의 말대로, “교회는 실존 양식(mode of existence)이고 존재 방식(a way of being)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는 오직 인격적 관계성과 인격적 사랑을 통해서 알려진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공동체로 계시는 삼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로 잃어버린 공동체를 다시 세워 주셨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김형익

김형익 목사는 건국대에서 역사와 철학을, 총신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인도네시아 선교사, GP(Global Partners)선교회 한국 대표 등을 거쳐 지금은 광주의 벧샬롬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 ‘율법과 복음’, ‘참신앙과 거짓신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