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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나는 ‘피차 복종’의 자리에 있는가?
by 정갑신2022-05-02

우리가 피차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존재론적인 이유이고 또 하나는 목적론적인 이유다. 첫째, 존재론적으로 우리는 피차 복종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다. 둘째, 우리는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서로에 대한 환대와 용서와 사랑의 샬롬을 얻기 위해 피차 복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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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그 회복을 위하여]


• 있게 하신 자리_정갑신


가정 공동체의 회복_정갑신

• 나는 ‘피차 복종’의 자리에 있는가?

• 나는 ‘변명을 덮는 순종’의 자리에 있는가?


포용 공동체의 회복_박삼영

• “그리스도를 본받아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라”  

• 교회는 어떻게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가?


공감 공동체의 회복_권성찬

• 교회는 세상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 교회는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생명 공동체의 회복_정민영

• 세상은 교회로부터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 어떤 교회라야 세상이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5월 한 달 동안 매주 이어질 위의 글들은 2021년 1월 예수향남교회 제1차 ‘열린 말씀 집회’의 설교를 간추린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에베소서 5:21-33.

최근 영국 성공회에서 전통적인 교회의 역할과 존재 방식을 반성하는 운동이 일어나 전 세계적으로 말없이 퍼져가는 중이다. 급변하는 세계에서 교회가 자기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말씀에 비추어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기 위해 답을 찾는 시도다. ‘과연, 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구원의 공동체로서, 세상에서 회복된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교회는 개개인 성도들이, 또한 가정이, 그리고 지역교회가 연합된 공동체로서 충실한 모습으로 서 있는가? 아니면, 구태의연한 모습으로 변색되고 탈색되어 방치된 자전거처럼 홀로 낡아가든지 부유하듯 떠다니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적절한 답을 찾으려는 것이다. 교회는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교회는 예수님께서 회복하여 있게 하신 그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교회의 현 상황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가운데 제기한 이런 질문에 대하여, 영국 성공회는 “교회의 새로운 표현”(fresh expressions of church)으로 대답하려 하는 중이다. 이를 위해 마이클 모이나와 롭 피모디는 ‘리프레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1] 


예수님은 당신이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당신이 자유를 누리도록, 당신이 풍성한 삶을 경험하도록, 당신이 본래 창조된 목적대로 평화와 안식, 충만함 등 모든 것을 누리도록, 당신이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르지 않도록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본향으로 인도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 그런데 많은 이들이 바로 여기서 이야기를 멈춥니다. 다시 말해, 복음의 이야기는 끝나고 당신의 이야기만 남는 것입니다(복음이 오직 당신의 이야기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이 당신을 넘어 온 세상의 회복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라는 것에 대해서는 정말 관심이 없습니다_인용자 주). 이것이 정말 복음의 참 모습일까요? 어딘가에서 복음의 본질을 놓친 것은 아닐까요? 바로 당신이 복음의 본질을 놓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가 당신으로 시작해서 당신으로 끝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지 않을까요? 그리고 함께 그 그림을 그리자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초대하신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이 ‘교회의 새로운 표현’ 운동은 영국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였고 존경받는 영성 신학자로 유명한 로완 윌리엄스(Rowan Williams)의 지원과 격려로 훨씬 바람직한 깊이와 균형을 갖춘 운동으로 발전했다. 무엇보다 이 운동의 멘토인 로완 윌리엄스 자신이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 역사상 최초로 비잉글랜드 출신 캔터베리 대주교였다는 점은 매우 상징적이다. 전 세계 성공회의 최고위 성직자로서 램버스 회의(10년마다 열리는 주교회의)를 소집하고 주례하는 캔터베리 대주교는 관례적으로 잉글랜드 출신만 선출했지만, 그는 잉글랜드 사람들이 무시하는 웨일즈 출신이었던 것이다. 이미 그 자신의 역사와 삶을 통해 그와 영국 성공회는 아름다운 복음의 돌파를 경험했던 것이다. 한 가지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새롭고 아름다운 영적 운동이 대형 교회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 몇몇 가정이 중심이 된 작은 공동체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핵심이고, 오늘날 교회가 복음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극대화할 수 있는 매우 의미심장한 출발점이다. 그런 면에서 리프레시 운동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성도들 자신과 교회의 본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결국 이런 질문을 통해 우리는 아내와 남편 혹은 건강한 아내 역할과 남편 역할로 시작되고 유지되고 성장하는 각 가정에서 제대로 된 복음적인 역동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피차 복종하라


에베소서 5:21-33 말씀은 복음 공동체의 가장 근본적이고 현실적인 관계를 이루는 아내와 남편에 대한 가르침이다. 두 사람의 관계로 시작하여 세상의 모든 관계로 확장된다. 두 사람이 복음에 의해 회복되고 복음에 의해 변화되며 복음에 의해 유지될 때 교회를 통해 세상에 그 아름다운 변혁의 삶을 보여줄 수 있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에서 이뤄지는 모든 관계의 중심이기 때문에 아내와 남편의 관계도 결국 교회의 문제다. 따라서 본문은 가정 공동체를 이루는 당사자들이 서로에 대해 어떤 마음과 태도로 대해야 할지를 밝혀 주는 전체에 대한 전제 또는 최종 결론에 해당된다.


21절은 “피차 복종하라”고 먼저 운을 뗀다. 성경은 놀랍게도 복종의 힘과 비밀을 말한다. 여기서 복종은 물론 부담스런 말이다. 이 단어는 비현실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 둘 사이에 그게 안 되면 평화는 영원히 날아간다. 아내가 남편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복종하는 것이 당연했던 고대의 문화적 관습을 뒤집어 남편도 아내에게, 부모도 자녀에게 복종하라고 ‘피차’라는 말을 집어넣은 것은 완전히 혁명적이다. “당신은 왜 맨날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당신이 잘 좀 해봐. 내가 이런 말 좀 안 하게.” “야! 언제까지 이렇게 게을러터지게 살 거야? 넌, 네 미래가 걱정되지도 않니? 언제까지 네 인생을 이렇게 엄마 아빠가 속 터지게 생각해야 하는 거냐, 응?” “제발, 간섭 좀 그만하고 냅둬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게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고 싶단 말예요.” 부부 사이와 부모와 자녀 사이에 상처만 남게 되는 아주 흔한 대화다. 이런 대화가 번번이 반복되는 이유는 ‘피차 복종’이 없기 때문이다.


‘피차 복종’이 없는 이유는 뭘까? 최소한 나는 너보다 옳고, 나는 너에게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다고 피차 확신하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만큼 나보다 더 옳다고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옳으면 내가 더 옳지 너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너한테 그런 말 들을 만큼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차 복종의 관계에서는 최소한 마음 밑바탕에 이런 생각이 깔려 있다. ‘나도 내 생각이 정말 맞는 건지 잘 모르겠으니까,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줄래?’ ‘글쎄, 내가 당신한테 무슨 말이라도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다시 말해, 상대가 나보다 더 옳을 수 있고 나도 상대만큼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이 기본 바탕이 된 상태에서 서로를 향할 때 가능하다. 


‘피차 복종’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성경에 단서가 있다. 에베소서 본문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에서 말하듯이, 우리는 예수님을 진실로 경외할 때만 피차 복종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바로 그런 복종을 온전히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충분히 완전하신 분이시지만 자기 자신이 모든 걸 책임지려하지 않고 아버지께 온전히 맡기신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사랑이다. 하나님께 온전히 맡긴다는 것은 그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따른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그걸 보여주시고 우리는 그 예수님을 통해서 그걸 보고 배운다. 예수님은 가장 처참한 형태의 죽음의 시간까지 전적으로 아버지 말씀을 따라 맡기셨고, 이것이 결국 예수님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에게 위대한 승리를 가져오게 했다. 이 비밀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진실로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고 전적으로 신뢰하며 경외하는 자를 따르고, 자연스럽게 그를 흉내 내게 되어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실로 경외한다면 가정에서 피차 복종하는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예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도 가정에서 여전히 군림하고 통제하려 한다면 그것은 모순이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 내가 말하지 않으면 누가 이런 말 해주겠어?” 이런 종류의 말도 결국은 별 영양가 없는 통제욕구일 뿐이다.


우리가 피차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존재론적인 이유이고 또 하나는 목적론적인 이유다. 첫째, 존재론적으로 우리는 피차 복종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게 우리 존재의 터전이다. 모든 존재는 자기 존재의 터전 위에 제대로 세워질 때, 있게 하신 자리에 제대로 설 때, 우리 존재의 자리인 피차 복종의 자리에 있을 때, 진실로 자유롭고 풍성한 삶을 경험한다. 따라서 자발적으로 피차 복종하는 것을 꺼려하고 자존심 상해하며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 되려는 죄의 본성이다. 삼위 하나님 안에서 복음으로 회복된 자는 누구 위에 군림하고 누구에게 명령함으로 얻는 만족을 매우 부담스럽고 부끄럽게 생각하게 된다. 


둘째, 피차 복종의 존재론적인 이유와 함께 목적론적인 이유도 분명히 있다. 우리는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서로에 대한 환대와 용서와 사랑의 샬롬을 얻기 위해 피차 복종한다. “난 그 인간한테 이젠 더 이상 말 안 해. 그냥 못 본 척하고 지나가는 게 속 편해.” 세월이 가면서 부부지간에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피차 복종이 아닌 피차 포기를 하는 거다. 피차 복종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얼굴은 마음을 열고 나누는 예의바르고 솔직한 대화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솔직한 대화를 나누셨다. 따라서 부부는 서로 할 수 있는 한 조금씩이라도 건강한 대화법을 배우는 게 중요하다. 


바울은 32절에서 피차 복종의 비밀을 이렇게 말한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태도에 대해 쭉 말씀하다가 갑자기 그것이 그리스도와 교회 간의 비밀이라고 말씀한다. 일차적으로는 남편이신 예수님이 아내인 교회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주셨기 때문이고, 아내인 교회는 남편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목숨처럼 여길 때 비로소 진정한 생명을 지킬 수 있다는 거다. 그런데 예수님은 교회를 자기 몸이라고 하셨지 가정을 자기 몸이라고 하시지 않았다. 남편과 아내는 그리스도가 교회에게 하시듯 또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사랑과 존경의 방식으로 피차 복종함으로 교회가 되는 거다. 부부는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처럼 내 생명을 기꺼이 내줌으로 그의 생명을 살리고, 살아난 생명은 그 감격으로 자기 생명을 기꺼이 바침으로 서로를 살리고, 더 나아가 이웃과 세상을 살리는 비밀을 알고 실행하는 교회가 되는 거다. 세상은 바로 그 힘이 목마르게 필요하다. 가정과 교회와 세상이 불가분리의 관계로 네트워크를 이루는 거다.


인도의 불가촉천민 달리트(dalit)가 사는 마을이 있다. 이들은 정부가 아무리 땅을 할당해 주어도 사회 문화적으로 달리트는 땅을 가질 수 없다는 뿌리 깊은 편견 때문에 실제로 자기 땅에 농사짓는 일을 상상조차 못한다. 그래서 벽돌공장에서 벽돌을 굽고, 날품팔이하고, 카펫을 만들어 팔며 하루 한두 끼 겨우 먹으며 산다. 그런데 이 불가촉천민 바로 옆 마을에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로 구성된 카스트 축에 끼지 못하는 하층민 OBC(Other Backward Cast)가 산다. 이들은 자기들도 최하층이면서 자기들보다 조금 더 아래로 여겨지는 달리트에 대해 엄청난 우월감을 가지고서 그들을 핍박한다. 이웃지간에 어차피 흐르는 강물을 같이 써야 하는데도, OBC는 달리트는 땅과 강물을 소유할 수 없다는 전통적인 사회문화적 관습에 따른 편견을 내세우면서 달리트가 강에서 물고기를 잡지 못하도록 한다. 한번은 달리트 마을에서 한 사람이 몰래 물고기를 잡다가 OBC 사람들에게 발각되었는데, OBC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의 집을 다 태워버렸다. 달리트는 저항조차 못하고 당할 뿐이었으며, 정부에 고발을 해도 도무지 해결될 기미가 없다. 달리트에게는 쓰레기 버릴 땅도 없어 쓰레기더미에 묻혀 살고, 아이가 아파도 병원에 갈 돈도 없어 수많은 아이들이 병명조차 모른 채 죽어나간다. 인도 정부는 카스트 제도를 인정하지 않지만 사회문화적 습관이 헌법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작동되다 보니 어쩔 수 없다. 오직 피차 복종의 정신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어느 정도의 변화가 시작될 수 있지만 그조차도 불가능한 것이, 힌두교는 이 부당하고 서글픈 습관을 고치기는커녕 더 강력하게 유지시키고 있고, 윤회를 꿈꾸는 불교에도 그런 습관을 개선할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위해 사랑으로 복종하심으로 우리 안에서 피차 복종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변화를 도모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선교사가 들어간 인도의 한 마을은 OBC 마을과 달리트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학교를 짓는 중이다. 달리트가 손댄 물은 절대 마시지 않던 OBC 마을 사람들도 이젠 공동 우물을 파고 같이 사용한다고 한다. 그들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피차 복종의 복음을 깨달아 더욱 놀라운 변화를 계속 만들어 가길 기도한다.


33절을 보자. “남편은 각각 자기 아내를 사랑하되 자기 몸 사랑하듯 사랑해야 한다. 아내는 남편을 존경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벌써 무엇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부터 피곤하고 무겁게 느낀다. 맞는 말인 줄은 알지만 결국은 순종하는 게 불가능한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과 그 사랑을 깨닫고 경외하는 게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아내를 내 몸 이상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남편을 마음껏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거다. 예수님을 지극히 경외할 때 우린 무엇보다 자신이 누군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시면 안 될 만큼 내 죄가 얼마나 극심하다는 걸 깨닫게 되면, 내가 그토록 주장하고 싶어 하는 의와 공로는 나에게나 자랑할 만한 것이지 타인에게는 피곤하고 쓸모없는 잡다한 쓰레기와 누더기에 불과한지를 알게 된다. 그럴 때 비로소 상대의 존귀함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내의 눈에 남편을 존경해야 할 이유들이 보이고, 남편의 눈에 아내가 존경스럽고 사랑스럽게 보인다.


사실 우리 모두는 본래부터 배우자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그런 방식으로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사랑과 존경의 교환이 일어나고 마음 깊은 평화가 경험되어야 한다. 남편은 아내를 향해 사랑으로 복종하고 아내는 남편을 향해 복종으로 사랑하는 거다. 그 평화가 넘치게 될 때 가정 안에 마음의 여백 곧 여유로운 마음의 공간이 커져 간다. 그리고 그 공간에 이웃의 어려움과 세상의 이슈들을 초대해서 더 현실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실천들을 감당할 힘이 일어나게 되는 거다.


아내의 복종


먼저 아내에게는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은 잘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에게 “잘해야 돼!”라고 강요함으로 김을 빼는 것처럼 들린다. 당시의 모든 아내는 복종을 요구받기도 전에 복종해야 하는 문화에 길들여져 있었고, 이미 복종할 수밖에 없는 사회문화의 압력과 습관 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대다수 아내는 별 생각 없이 혹은 어쩔 수 없이 남편에게 복종했을 거고, 독립적 존재의식이 있는 자매는 노예처럼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삶에 불만을 품고 결코 바꿀 수 없는 자신의 운명 때문에 비탄해 했을 거다. 그래서 혹 도망치는 아내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세상에 ‘복음’이 들어왔다. 복음은 아내만 남편에게 복종할 게 아니라 남편도 아내에게 사랑으로 복종하라고 가르쳤다. 여자도 남자 못지않게 교회 일꾼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심지어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인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모두 여자였다는 엄청난 사실을 증언했다. 더 나아가, 여자와 남자, 종과 주인, 빈자와 부자의 구분보다 그를 ‘사람’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러니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이 교회로 몰리는 게 당연했다. 물론 그만큼 문제가 생길 여지도 많다. 왜냐하면 복음은 위대하지만 위대한 복음을 받아들이는 우리는 너무나 불완전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유가 아무리 위대해도 자유를 얻은 사람은 자기가 얻어 누리는 자유를 타인도 누리게 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자기 자유를 더 확장하려는 욕심으로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기 마련이다. 받은 선물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도록 하지 않고 자신만의 권리가 되도록 묶어 두는 죄의 본능이 워낙 강하다. 선물이 권리가 되는 모든 곳에서는 썩은 냄새가 나고 세상은 환멸로 덮인다. 마찬가지로 교회로 몰려드는 여인들도 복음이 주는 신세계의 영광을 누리게 되자, 그 선물을 권리로 바꾸어 자유를 말하면서 무질서한 혼란이 빚어지곤 했다. 


에베소 교회가 대표적이다. 그 교회 안에는 예수님을 앞세워 은연중 남편으로부터 독립하려 하거나 남편의 권위를 업신여기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는 남편으로 하여금 복음과 교회를 적대적으로 느끼게 할 뿐이다. 결코 복음적이고 선교적인 삶이 아니다. 바울은 복음전도에 방해가 되는 그런 선동적 분위기를 억제할 필요를 느끼고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권면을 해야 했을지 모른다. 다시 말해, 상황적인 권면과 명령이었던 거다. 예를 들어,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했다. 이것은 만고불편의 원칙이 아니라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서 있었던 어떤 무질서한 상황과 관련이 있다. 자기권리 의식이 과격하게 고양된 자매끼리 어떤 싸움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고, 그 싸움이 크게 번질 수도 있어서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절제하고 자중하라고 강하게 권면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에베소 교회 아내에게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권하는 말도 그 시대에서는 최선의 상황적 말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대가 바뀌면 완전히 폐기해야 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 시대에 비추어 보다 적절하게 성경 전체의 문맥에 따라 해석해야만 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바울이 우리 시대로 들어와 우리 시대의 아내들에게 말한다면, 아내들이여 남편을 너무 무시하지 말고 사람대접 좀 해라!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변수와 상수가 있다. 복종하라는 말씀은 모든 시대에 문자 그대로 적용해야 할 말이라기보다는 시대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필요가 있는 변수 같은 말씀이다. 하지만 변수를 지켜 주는 상수가 있다. 바로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이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주께 하듯 하라. 이 말씀은 모든 시대 모든 상황에 적절한 영원토록 유효한 말씀이다. 그런데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은 남편에게 복종하려면 최소한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거라는 절대적인 조건에 관한 말씀이라기보다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을 기꺼이 수행할 수 있으려면 주께 하듯 하면 된다는 순종의 비밀에 관한 말씀이다. 종종 하는 말이지만, 나는 사람을 믿을 수 없지만, 그 사람을 사랑하시고 그를 향한 계획을 가지시고 그 사람을 끝내 합당한 길로 인도하시며 그에게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은 믿을 수 있다. 그리고 믿음으로, 주님이 그 사람을 믿는 방식으로 그를 대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현실 속의 아내는 현실 속의 남편에게 온전히 마음을 다 실어 복종할 수가 없다.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자기 밖에 모르고, 자기 고집 꺾을 줄 모르고, 사는 모습은 구질구질하면서도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줄 아는 남편의 꼴을 볼 때, 무시하고 싶은 마음을 도무지 접을 수가 없다. 하지만 주님 앞에 제대로 서서 주님을 확실히 믿으면 좀 달라지기 시작한다. 주님을 확실히 믿을 때 맺는 열매는 그 남편이나 나나 별 차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거다. 나에게 임한 주님의 은혜가 남편에게도 동일하게 임했다는 사실을 각성하는 거다. 주님이 남편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남편이 진실로 변화를 시작할 수 있으려면 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기 이전에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신 주님께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다. 그 과정에서 내 눈에 남편이 어떻게 보이든지 예수님은 그 남편을 여전히 붙들고 이끌어 가시는 중이라는 걸 깨닫고 주님 말씀에 의지해서 남편을 향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나는 남편이 아니라 주님을 상대하는 거다. 남편에게 복종하는 게 아니라 주님께 복종하는 거다. 남편을 존경하는 게 아니라 주님을 존경하는 거다.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어느 순간 나에게 남편을 존경하게 하시고 기꺼이 기쁨으로 복종하게 하신다. 복음이 어느새 내 마음의 몸집과 맷집을 그렇게 키우신 거다. 


성경은 아내들에게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셨다. 다른 남편에게 복종하면 안 된다. 다른 남편에게 복종하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현빈 같은 연예인에게 감동해서 박수치고 소리치는 것까지는 애교로 봐줄 수 있겠지만, 내 남편처럼 꼴 보기 싫은 모습들이 하나도 없는 어떤 이상적인 남자를 날마다 꿈꾸고 그 기준으로 자꾸 자기 남편을 바라보면 절대로 자기 남편을 존경할 수 없다. 내 남편과는 다르게 친절하게 들어주는 남자, 내 남편과는 다르게 따뜻하게 말하고 한 없이 관대해 보이는 남자, 내 남편과는 다르게 겸손하고 아내 귀한 줄 아는 남자를 상상하고 기대할 수는 있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그런 비현실적인 남자는 세상에 없다. 그런 그림을 마음에 담은 채 매번 남편을 상대하는 한 아내들은 절대, 결코, 영원히 자기 남편에게 건강한 방식으로 복종하는 게 불가능하다. 아내 마음에서 어엿이 괜찮은 남편도 평생 지질한 남편이 된다. 하지만 예수님 사랑이 진실로 깨달아지고 그 사랑의 강렬한 빛 앞에서 내 존재의 누추함과 비루함이 확연히 깨달아지면 내 남편의 소중한 면모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자발적 순종이 가능해지기 시작한다. 


아내가 남편을 무시하지 않고 남편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남편이 곧 아내 자신이기 때문이다. 23절을 보자.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나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성경은 명백히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말은 군림하고 호령하고 통제하고 지배한다는 의미에서의 머리가 아니라 몸에 붙어 몸과 뗄 수 없게 연합된 의미에서의 머리라는 뜻이다. 머리는 몸에게 명령하기보다는 몸을 배려하고, 몸이 행함으로 몸과 머리 모두에게 유익한 것에 대해 몸과 대화하고 몸에게 권면한다. 몸에게 명령만 하는 머리는 일중독자다. 그런 머리는 결국 몸을 망가뜨려 머리 자신도 상하게 만든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시다. 하지만 명령하고 통제하고 군림하는 머리가 아니라 자기를 자발적인 사랑으로 목숨까지 내주셔서 그 사랑이 움직이게 하고 그 은혜의 감격이 몸을 역동적으로 활동하게 하는 머리시다. 머리는 몸 위에 있기보다 몸과 함께 있다. 그것을 고린도전서 11:3은 이렇게 표현했다.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여자의 머리는 남자다. 그런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머리가 하나님이신 것과 같다. 그럼,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시기 때문에 예수님 위에 군림하시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자신을 내주시는 사랑으로 완전히 연합하신다는 면에서 머리와 몸의 관계를 설명하는 거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에 순종하신 게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기꺼이 복종하셨다. 그렇게 해도 될 만큼 아버지 사랑이 순결하고 풍성하고 아름답고 겸손하시기 때문이다. 사랑과 복종은 너무나 아름답게 결합되어 있다.


이 지극히 아름다운 사랑과 복종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나타난다. 교회는 억지로 명령에 불복종하면 큰일 나기 때문에 예수님께 복종하는 공동체가 아니다. 자기를 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겨워 더 내드리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하고, 더 순종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며, 자발적으로 기꺼이 행복하게 순종하는 예수님의 신부다. 성경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래야 한다고 하신다. 물론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날마다 새롭게 기억함으로, 그 은혜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감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순종하다보니 어느새 조금씩 남편과 그런 아름다운 연합의 관계를 이루어가게 될 거라는 말씀이다. 시간이 필요하다. 버티고 견디는 시간이 필요하다. 회복의 시간은 어느새 찾아온다. 


남편의 복종


아내가 남편에게 또한 남편이 아내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복음적인 태도인가 하는 문제를 다룰 때 아내들에게 요청하는 건 석 절에 불과하지만, 남편들에게 요청하는 건 무려 일곱 절이나 된다. 아내들에게는 단지 복종하라, 복종해야 할 이유는 이거다 말한다. 반면에 남편들에게는 아내를 사랑하라는 명령과 더불어 그렇게 사랑해야 하는 이유, 아내를 사랑하는 방식과 범위, 그리고 아내를 사랑하는 삶이 주는 은혜까지 세세하게 다룬다. 25절은 “남편들아”하고 시작하는 말씀은 한 사람의 남편인 입장에서 적잖이 부담스럽다. 정직해야 할 텐데 과연 제대로 정직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앞선다. 이 말씀을 주신 상황은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이 대단히 어색하고 낯선 시대였다. 게다가 복음적으로 사랑하라는 말은 좀 더 힘들고 버거운 명령이었을 게 분명하다. 반면에 우리 시대는 상대적으로 아내 사랑이라는 주제가 낯선 주제는 아니다. 물론 아내를 제대로 사랑하느냐의 문제는 여전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시대에 아내 사랑을 말한다면,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를 물어야 한다. 어떤 조건과 상태의 사랑이냐? 누가 나에게 아내를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즉시 사랑한다고 말할 거다. 사실이다. 하지만 아내가 내 대답에 전적으로 동의할 것인지는 의문이다. 아마도 아내는 내 생각과 다를 가능성이 많다.


아내로부터 종종 지적당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난 아내가 아프면 싫다. 하지만 아내가 아파서 싫은 건지 아내가 아프면 나에게 맞춰줄 수 없기 때문에 싫은 건지는 구분하기 어렵다. 난 아내가 풀 죽어 있으면 싫다. 아내가 염려되어서 싫은 건지, 아내가 내 기분에 안 맞추어도 되는 권리를 가졌기 때문에 싫은 건지는 알기 어렵다. 거의 드문 일이지만 일 년에 한두 차례 내가 출근할 때 아내가 마중 나오지 않거나 퇴근할 때 아내가 반기지 않으면 마음이 상한다. 아내가 밥 차려줄 생각 안 하고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으면 대견해 보이기보다 불편하고 서운해진다. 아내가 웃을 때가 좋고, 나를 환대해 줄 때가 좋고, 아내가 나를 인정해 줄 때가 좋다. 아니 그럴 때만 좋다. 결국 아내가 내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 모든 상황을 싫어하는 거다. 내가 매우 이기적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정말 이러고도 내가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건지 의심스럽다. 아내가 매우 정상적인 경우에도 이 정도면 부정적인 문제가 있는 아내들은 어떠하겠는가?


그런데 25절은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면서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기를 내주신 것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내 이기적인 본능을 완전히 거스르는 말씀이다. 아내를 사랑하는 게 성장 배경이나 기질에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는 쉽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쉽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아내를 사랑하는 게 쉽고 어려움은 남편에게 달려있는 건 아니다. 남편이 아무리 성격이 좋고 인품이 뛰어나도 아내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으면, 인내하고 견딜 수는 있어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아내가 남편이 기대하고 원하는 수준으로 변화된다는 것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 더구나 아내가 남편의 기대 수준에 맞추어 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라면 엄밀한 의미에서 그건 사랑이라기보다는 아내의 변화와 높아진 수준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상대적으로 비교하자면, 모든 사회, 경제, 문화의 측면에서 아내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던 시대에 남편들보다는 아내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이런 가치전복적인 말씀을 주신 것은 가히 엄청난 혁명이 틀림없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을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에는 아내의 변화 여부나 아내가 남편의 기대 수준에 맞느냐의 여부에 대한 조건적인 요소란 없다. 아내가 변하지 않았어도 아내의 수준이 남편이 생각하는 것에 미치지 않아도 사랑하는 게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거다. 오늘 내 감정이나 내 상황보다 무조건적 약속에 따른 사랑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성공회 신학자이자 저명한 기독교윤리학자 스텐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는 비폭력 기독교 평화주의, 공공 윤리, 정치신학 분야에서 탁월한 책들을 남겼다. 그런데 그의 아내 앤은 일생 동안 매우 심각한 조울증 환자였다. 앤의 어머니는 결벽증 같은 정신병 증상과 결과를 통제하려는 집착이 강했는데, 앤은 그런 어머니에 대한 저항으로 결국 어머니도 포기했고 어머니가 강요하는 교회도 버렸다. 어머니의 그런 증세는 바람피우는 자기 남편과도 무관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결국 심장병으로 죽게 되어 바람피운 남편에 대한 복수를 완성했다. 그리고 앤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부터 미쳤고, 어머니에 대한 분노로 자기 남편 스텐리를 상대했다. 매일 늦게 자고 아주 늦게 일어났고 하나뿐인 아들은 방치했다. 남편이 잘해 주려 하면 할수록 분노로 대응했다.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면서 예술가에게는 자유가 필요하다는 말로 다른 남자와의 성관계를 고집했고 환시와 환청을 반복했다. 남편 스텐리의 동료 교수에게까지 엄청나게 집착하면서 스토킹을 했다. 그 동료 교수가 너무 힘들어서 스텐리에게 힘들다고 하소연할 정도였다. 아내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으면서, 모든 책임을 남편에게 떠넘기고 남편 핑계만 댔다. 스텐리 자신도 조울증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내를 돕다 닳아버렸습니다. 조울증 환자인 아내와 살면서 미칠 듯이 고독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결국 사망했다. 하지만 스텐리는 끝까지 아내 곁을 지켰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와 함께 하루하루를 견디며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가 그토록 참혹한 부부관계 속에서도 최고의 신학자로 섬길 수 있었던 비밀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신학자로 성숙해 갈수록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달아 갑니다. 나는 극단적인 고통을 통해, 단지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중일 뿐입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담백하게 선 자의 모습이고, 그 모습이 그를 끝내 지켜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스텐리 하우어워스의 사례는 매우 특수하지만 남편들이 자기 아내를 바라볼 때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다소 자기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면들이 엿보일 수도 있다. 영 맘에 들지 않는 습관이나 도무지 맞추기 어려워 포기하고 만 기질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아내를 예수께서 자기 몸을 내주어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다. 수행 불가능한 명령이다. 이 말씀은 아내들에게 주어졌던 말씀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까지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가 하는 사랑의 수준에 대한 요청이 아니라 사랑할 만한 조건이 없는 아내도 사랑할 수 있는 비밀에 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남편들에게는 오직 예수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내주신 사랑을 깨닫고 그 길을 따름으로만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는 방식으로 사랑할 가능성이 생긴다고 말씀하는 거다. 


그러면, 예수님은 교회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남편들은 대개 마음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본인의 어색함이나 하기 싫은 행동을 변명하기 쉽다. 밥 한 끼 먹고 어디 같이 놀러가는 걸로 관계회복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내들은 대개 훨씬 더 사소한 면들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 잘 들어주는 거다. 남편들이 가장 하기 어려워하는 거다. 하지만 아내를 사랑하려면 힘들어도 아내에게 맞추어야 한다. 그게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신 방식이다. 예수님은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해서 거룩하게 하셨다. 자기 손에 물을 묻혔고 자기 몸에서 피가 쏟아지기까지 그렇게 하셨다. 티나 주름 잡힌 것 없이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자기를 죽음에 내주셨다. 말씀으로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세례를 말한다. 세례는 죽음이다. 교회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자기 죽음을 통과하게 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어 생명력 가득한 삶을 살게 하신 거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남편들에게도 자기죽음을 불사하는 사랑만이 아내로 하여금 자기죽음을 통과하게 하여 새신랑의 새신부로 살게 하는 여정이 되는 거라고 말씀하시는 셈이다. 우리는 죽음의 순간이 코앞에 있어 그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쉽게 상처받고 삐지고 원한을 품고 의심과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히던 심령이 성령께서 이끄시는 여유와 관대함으로 바뀐다. 어차피 죽을 그날의 죽음을 당겨와 오늘 죽으라는 거다.


이 사실이 남편들로 하여금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다. 예수님은 교회가 예뻐서, 맘에 들어서, 사랑할 만한 조건을 충분히 갖춰서 사랑하신 게 아니다. 교회는 그야말로 허물투성이, 상처투성이, 연약함투성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문제들에 개의치 않으시고 그냥 사랑하신다. 교회의 어떠함이 사랑 여부를 결정하게 하지 않으시고 예수님 자신의 충만한 사랑이 모든 조건을 넘어 사랑하게 하는 유일한 조건이 되게 하신다. 남편들은 무엇보다 예수님의 그런 사랑의 대상인 교회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 이렇게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남자들은 대개 성공, 영광, 승리, 인정받음, 명예 같은 주제들에 대해 여자들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더 민감하다. 여자보다 강하다는 의식 때문에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승자 원칙에 뿌리 깊게 길들여졌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일들은 사실 진정한 성공, 진정한 영광, 진정한 승리, 진정한 인정받음, 진정한 명예를 위한 최고의 조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하다. 따라서 남자들은 두 번만 방향을 바꾸면 된다. 자기가 늘 구하던 그것들의 진짜 원형을 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된다. 그리고 그것들을 추구하는 열망의 수혜자를 자기로부터 아내로 돌리면 된다. 추구하던 것을 계속 추구하되 진짜를 추구하고, 자신을 향하던 방향을 아내를 향해 바꾸기만 하면 되는 거다.


이를 위해 아주 흥미로운 표현이 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남편들에게 예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동시에 자기 몸을 사랑하듯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신다(28-29절). 그렇다면 이 말씀은 남편들이 자기 몸 사랑하는 수준은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는 수준과 같다는 거다. 남편들의 속내를 꼬집은 말씀이다. 그러니까 남편들이 아내를 사랑할 때 예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을 순식간에 명확하게 깨닫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그냥 자기 몸 돌보듯이 아내를 돌보면 된다. 그런데 이게 말은 쉬워도 막상 실천하려면 어렵다. 생각하는 것과 사는 것은 완전히 딴판이다. 목사들이 특히 조심해야 한다. 나도 말로는 언제 죽어도 후회 없다고 말할 때가 있는데 그게 어느 정도는 사실이고 또 스스로는 먹고 마시는 것에 별 관심이 없기 때문에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단 밥 먹는 시간이 지나면 무척 힘들어 한다. 밥 먹기 한참 전에도 뭘 먹을까 하는 게 큰 관심사다. 무엇보다 일단 몸에 좋다고 하는 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무척 열심히 꾸준히 먹는다. 다른 좋은 습관을 위해 발휘하는 의지보다는 몸을 위해서 발휘하는 의지가 훨씬 더 강하고 지속적이다. 따라서 남편들이 아내를 사랑하기 위해 방향을 트는 일은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기 위해 방향을 트는 것보다는 훨씬 더 간단하다. 아내들은 자기 남편에게 맞추는 일이 이미 일상이 되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진심으로 더 깊이 제대로 사랑하는 게 어렵다. 반면에 남편들은 자기 몸 위하는 것처럼만 하면 된다.


그런데 실제로 아내가 남편 자신의 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었다고 하셨다. 우리는 예수님 몸으로 연결된 한 몸이다(30절). 따라서 모든 남편은 태초의 고백을 회복해야 한다. 태초에 아담은 잠에서 깨어 이전에는 없던 존재 곧 하와가 자기 옆에 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고백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이쉬(남자)에서 취했으니 이샤(여자)라 하리라”(창 2:23). 곧 ‘너와 나는 한 몸이로구나, 너는 곧 나로구나, 내가 곧 너 안에, 너는 곧 내 안에 있는 것이로구나!’라는 고백이었다. 그것은 아내의 존재에 대한 고백인 동시에 자기존재에 대한 고백이었다. 다시 말해, 내 아내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하는 건 곧 나 자신을 누구로 생각하느냐 하는 고백과 같다. 그 고백을 회복하면 모든 게 쉬워진다. 하지만 남자는 어느새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면서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모든 결과를 자신이 통제하려는 죄의 본능을 따랐다. 그것은 아내들도 마찬가지다. 그에 따라 통제하고 조정하는 존재가 되려고 힘을 갈망하게 됐다. 오직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태어나 그 세상에 익숙하게 길들여진 것이다. 그래서 나보다 약한 존재를 사랑과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내 힘 아래 복종해야 할 존재로 여겼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죄의 본능을 거스르고 하나님 본래의 질서를 회복하는 복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다. 가장 강한 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낮추신 복음의 질서에 우리 자신을 맞출 때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샬롬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남자를 태생적인 근력에 있어서 여자보다 더 강하게 만드셨다. 그에 따라 남자가 여자 위에 군림하려고 할 여지가 많다는 걸 미리 아셨다. 여자가 남자에게가 아니라 남자가 여자에게 맞추라는 거였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자시 앞에 오게 하고 엎드리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아니다. 오히려 강한 자가 자기 환경을 떠나서 약한 자에게로 가야 한다. 자기 집 곧 자기가 마음껏 군림하고 자기 방식이 통하는 모든 환경, 자기를 옳다고 인정해 주는 모든 공간, 자기 생각과 습관을 확립해 준 공간을 홀연히 떠나서 아내에게로 가야 하는 거다. 그래야만 비로소 공평한 상호 존중과 피차 복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에는 적지 않은 가정 안에서 아내가 더 강자처럼 보일 때도 있다. 어떤 경우에도 대원칙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맞추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교회다. 힘 있는 자가 발언의 수위를 낮추고, 연약한 자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는 곳이다. 그리고 그 실행 에너지가 바로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가정에서 습관이 잘못 든 사

어떤 경우에도 대원칙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맞추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교회다. 힘 있는 자가 발언의 수위를 낮추고, 연약한 자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는 곳이다. 그리고 그 실행 에너지가 바로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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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갑신

정갑신 목사는 예수향남교회의 담임목사로 총신대 신학과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원,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했다. 2009년 8월 예수향남교회를 개척한 후 예수향남기독학교 이사장직을 겸하고 있으며, (사)복음과도시 이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대답하는 공동체’, ‘사람을 사람으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