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차라리 죽는 게…” 삶에 지친 그대를 위한 주님의 자비
by Greg Morse2022-04-06

당신이 하나님께 당신의 생명을 앗아가 달라고 구한 적이 있다면, 당신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당신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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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년간 나는 죽고 싶어 하는 몇몇 그리스도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나이도 달랐고 민족도 달랐다. 성격도 제각각이었고 죽고 싶어 하는 이유도 달랐다. 그러나 지금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낫다는 결론은 같았다. 


죽음에 대한 숨겨둔 생각을 공개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생각에 크게 관심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시각각 자신에게 닥쳐온 죽음의 공포로부터 도망쳤을 뿐이다. 멈추고 돌아서서 그 괴물을 친구로 환영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제, 다시 말하건대,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남녀들이었다. 그들은 자살의 공포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러한 범죄가 십대 연인 사이의 낭만적인 태도가 아니라 생명의 창조주에 대한 가증스러운 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살을 떠오르게 하는 생각으로 인해 그것이 그들을 생의 다른 출구로 데려가려 할 때, 마음을 쇠잔하게 하고 무자비한 상황 가운데서마저도, 그들은 사탄의 제안에 저항할 줄 알았다. 믿음으로 그들은 전지하신 아버지께서 그들을 집으로 데려가실 때까지 한 발을 다른 한 발에 앞에 놓으며 계속하여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오직 그것을 위해 기도했었다. 


당신이 하나님께 당신의 생명을 앗아가 달라고 구한 적이 있다면, 당신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당신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전에도 그런 간구를 들으신 적이 있다. 각각 다른 이유들로, 다른 시기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각자 다른 구덩이로부터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런 기도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성도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 생에서 그다지 힘들어 할 것 같지 않은 하나님 백성의 지도자들과 영웅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에 사로잡혀 기도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그럼으로써 우리는 혼자가 아님을 상기하게 되고, 더 중요하게는 우리의 친절하고 은혜로운 하나님이 그들이 가장 힘든 자리에 있었을 때 당신의 백성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목격하게 된다. 


욥: 절망하는 아버지


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 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랴.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욥 6:8-9).


나는 죽기를 구하는 비통한 기도가 가장 평범한 기도라고 장담한다. 그 기도들은 노래하는 새들조차 너무 추워서 노래 할 수 없는 인생의 겨울에서 나온다. 


이 땅에서 그와 같은 자가 없는 의로운 사람인 욥(욥 1:8)은, 이제 재 가운데 앉아 피부에는 종기가 돋아 있고, 비난하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채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마음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그의 기도의 파편들은 이전의 삶의 폐허로부터 피어올랐다. 모든 부는 사라졌고, 그의 종들은 죽임을 당했으며, 그리고 더욱이 그의 열 명의 자녀 모두 큰 바람에 무너진 집 아래에 묻히고 말았다.


욥은 슬픔으로 비틀거리며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한다.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욥 3:3). 그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외친다. “어찌하여 고난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죽음을 구하는 것을 더하다가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욥 3:20-22). 죽음은 이제 보석처럼 빛나고 달콤함으로 떠돌아다닌다. 그는 기다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당신도 욥처럼 엄청난 상실을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아마도 당신도 잔해 속에 앉아서 지난날들에 의해 조소를 당하며 사랑을 그리워해 보았을 것이다. 끝나지 않는 어두운 밤을 응시하며 더 이상은 인내할 수 없을 것이다. 희망은 등을 돌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해 보라. 


주님은 욥의 요구를 거절하셨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더 많은 긍휼과 자비와 교제와 회개와 심지어 더 많은 자녀는 인생의 다른 쪽에서 거하고 있었다. 욥은 그의 삶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영화롭게 할 것인지 아직 상상할 수 없었다. 야고보는 욥의 삶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 :11)


어떤 고난당하는 자 중에는 욥의 동화 같은 결말에서 위로를 찾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욥이 새로이 받은 축복은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것의 절반에도 이르지 못한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고 계속해서 그를 신뢰하라. 이 어두운 밤은 당신을 위한 영원한 영광의 무게를 예비하고 있다(고후 4:17). 거기서 상처는 치유되는 것을 넘어 더 나아질 것이다.  


모세: 지친 지도자


주님께서 저에게 정말로 이렇게 하셔야 하겠다면, 제발 저를 죽여주십시오(민 11:15).


이 기도는 모세가 백성들과 긴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가 우연히 듣게 되는 모세의 죽기를 구하는 두 번째 기도이다. 첫 번째는 금송아지 우상 반역(출 32:32) 이후 백성들을 위한 중보기도였다. 이제 여기서는 그는 지도자로서 지치고 기진맥진하여 죽기를 구하는 기도를 한다.  


이집트에서 구출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의 고난으로 인한 상처는 아직도 낫고 있는 중이었고 이집트가 여전히 시야 안에 있었을 때 “그들의 불행에 대해” 불평한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이집트에서 생선을 공짜로 먹던 것이 기억에 생생한데, 그 밖에도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눈에 선한데, 이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 만나밖에 없으니, 입맛마저 떨어졌다(민 11:4-6). 


배은망덕함이 그들의 마음을 왜곡시켰다. 그들의 노예시절에 대한 기억은 해산물 뷔페와 함께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그 공짜 기적의 빵은 쓰고 별 맛없는 심심한 음식으로 여겨져 버렸다. 모세는 정말 그들이 이등 요리사에게 정착하기를 기대했을까? 


그 배은망덕한 자들은 모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그들이 이집트를 얼마나 그리하는지 반항적으로 중얼거린다. 모세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부르짖는다. 


저 혼자서는 도저히 이 모든 백성을 짊어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 무겁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정말로 이렇게 하셔야 하겠다면, 그리고 제가 주님의 눈 밖에 나지 않았다면, 제발 저를 죽이셔서, 제가 이 곤경을 당하지 않게 해주십시오(민 11:14-15). 


하나님의 은혜로운 응답을 다시 주목하여 보라. 하나님은 모세를 죽이지 않고 대신에 그의 일을 도와줄 하나님의 영의 부음을 받은 칠십 명의 장로들을 준비해 주신다. 거기에다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고기를 먹이실 것을 약속하신다. 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고기가 그들의 콧구멍에서 나오고 그들이 그것을 지겨워하기 시작할 것이다(민 11:20).  


당신의 연약한 팔로는 지고 갈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마음의 짐으로 인해 지쳐 때때로 죽고 싶다면 모세의 하나님을 보라. 기도로 그에게 기대라. 당신의 긍휼하신 아버지는 당신의 짐을 덜어주고 당신의 팔을 들어 승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실 것이다. 


요나: 분노하는 메신저


주님,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욘 4:3).


무정한 선지자 요나는 사람들이 요나의 이름이 기재된 성경을 읽을 때 많이 당황하게 만든다. 그는 이스라엘의 적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멸망을 당해야 한다고 굳은 결심을 한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가 되는 것을 거절한다. 


하나님은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배를 타고 떠난 후에 그를 새롭게 해 주셨다. 하나님은 바다에 빠진 그를 구출해 주셨다. 하나님은 그가 성 밖에서 성이 불탈 것을 지켜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을 때 그가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그늘을 주셨다. 그러나 요나는 마음에 미움을 버리지 않았다. 그가 니느웨에 심판이 내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요나는 이 일이 매우 못마땅하여, 화가 났다. 그는 주님께 기도하며 아뢰었다. “주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둘러 스페인으로 달아났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욘 4 :1-3).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 한 민족 전체가 멸망하기를 바라는 유혹에 마주한 사람은 거의 없다. 앗수르 사람들은 잔인한 민족이었다. 그들은 요나의 민족에게 잔인했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는 종종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마음으로 죽인다.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우리의 삶은 부패한다. 이에 주님은 다시 참을성 있고 자비롭게, 우리가 햇볕에 타들어가는 동안 그늘을 주시며 응답하신다. 그는 오래 참으시는 아버지로 우리에게 물으신다.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잘하지 못한다. 죽음을 구하는 기도는 어리석다. 회개가 필요하다. 아버지께 가서 그로부터 가장 값없이 거저 받은 그 불가능한 용서를 나도 베풀 수 있도록 도움을 구하라. 당신은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엘리야: 두려워하는 선지자


엘리야는 두려워서 급히 일어나,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여 … 죽기를 간청하며 기도하였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왕상 19:3-4). 


우리는 여기서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을 진정 증명할 수 있다(약 5:17). 이 순간은 바로 엘리야의 전성기 직후에 온 것임을 주목하라. 이 하나님의 선지자는 아합과 바알의 선지자 오백 명과 대결하여 승리했다. 하나님은 참 선지자가 그들 가운데 행하고 있음을 보이시려고 온 이스라엘 앞에 불을 비같이 내리신다. 


그리고는 그는 그들 사이로 도망한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사백오십 명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은 이세벨은 엘리야도 죽이겠다고 맹세한다. 그러자 “엘리야는 두려워서 급히 일어나,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한다”(왕상 19:3). 쫓기고 있는 이 선지자는 광야에 숨어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잠을 자려고 하다가 깨어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주님,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당신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죽기를 위해 기도하는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이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눅 12:24). 이것을 넘어 엘리야의 이야기는 우리가 선을 행하는 동안 종종 명백하게 우리의 신실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기 위해 우리의 지난해, 지난주, 또는 우리의 어제를 살펴보게 한다.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엘리야를 불쌍히 여기신다. 하나님은 그를 불러서 일으키시고, 광야에서 신선한 음식을 마련해 그에게 먹이시며 앞으로 가야할 여정을 위해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신다(왕상 19:5-8). 또한 죽음의 위협을 당하고 죽기를 기도하지만 결코 죽지 않는다(왕하 2:11-12) 하신다. 엘리야 선지자를 향해 미소 지으시는 하나님의 친절함을 또한 주목하여 보라.


바울: 죽기를 열망하는 사도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빌 1:23). 


죽기를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주된 응답은 아버지의 긍휼함이다. 


당신이 요나와 같이 하나님의 다른 사람들을 향한 자비하심을 업신여기는 사람이든지, 모세와 같이 무거운 마음의 짐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든지, 엘리야와 같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치든지, 또는 욥처럼 재난에서 놓이기를 사모하든지, 당신의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생각하라. 하나님은 욥 자신을 새롭게 하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도록 만나 주셨고, 모세에게는 칠십 명의 도울 자를, 요나에는 그늘이 되어 주는 식물을, 엘리야에게는 앞으로 가야할 여정을 위한 음식과 마실 것과 함께 만나 주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 자신이, 당신의 아들이 이루신 일과 성령의 재창조의 일을 통하여, 죽음을 우리를 위한 간절한 소망으로 바꾸신다. 그렇지 않으신가? 죽음이라는 저 원수가 우리가 다시 만들어진 저 세상으로 우리를 옮겨놓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죽기를 위해 기도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마지막 원수에 대한 구속적 관점을 보여준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보람된 일이면, 내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빌 1:21-23). 


우리도 또한 돌아서서, 하나님의 완벽한 시간대에 그 괴물과 직면할 수도 있고,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화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우리는 또한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픈 건전한 갈망이 있다. 우리는 또한 속으로 탄식하며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시는(롬 8:23)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는 또한 “마라나타”라고 기도하며 이 세상의 새로운 시작을 갈망하기 때문에 세상의 마지막 밤을 기다린다. 


우리는 죽기 위해 죽는 것도, 단순히 고난을 피하기 위해 죽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잠 저쪽 편(the other side of sleep)에 계시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영원한 삶을 갈망한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지금도 그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 점점 더 맛보아 가는 삶이다.  



원제: Lord, let me die: Mercy for Those Tired of Living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서은성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고 계속해서 그를 신뢰하라. 이 어두운 밤은 당신을 위한 영원한 영광의 무게를 예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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