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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는다는 것은
by John Piper2022-03-27

우리가 합법적인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녀의 경험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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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파이퍼 목사의 팟캐스트 Ask Pastor John에피소드 1743 “What Does It Mean to Cry, ‘Abba, Father’?”를 녹취한 글입니다.



바울의 응용신학에 대한 가장 심오한 가르침 중 하나이면서도 자주 간과되었던 질문을 제가 목사님께 드리면서 한 주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얼마 전 설명해 주셨던 내용이 아직 제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Desiring God의 리더십 팀 모임에서 항상 시작할 때 하시던 대로 우리를 인도하셨었지요. 우리는 모여서 계획과 희망을 이야기하고 결정을 내리기 전에 우리의 마음을 집중하기 위해서 헌신과 함께 기도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번 우리 리더십 팀 모임에서 목사님은 갈라디아서 4:6-7로 성경공부를 이끄셨습니다. 굉장히 경건한 시간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는다는 것에 대해 설명하셨을 때 거기 있던 사람들 모두 큰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끝내시자마자, 저는 이랬지요. “와, 이건 녹음해서 APJ(Ask Pastor John; 파이퍼 목사님께 물어보세요)의 청취자들과 함께 공유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을 다시 듣게 되었습니다. “아빠! 아버지!” 이것은 정확하게 어떤 경험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요? 이 “아빠! 아버지!”라는 외침은 나 자신의 외침인가요? 아니면 성령께서 내 안에서 나를 통해 부르짖으시는 건가요? 설명해 주세요. 그리고 이 본문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들에게도 적용되는 건가요? 어떻게요? 저희를 위해 이 모든 것을 팟캐스트에서 설명해 주시기 원합니다.

몇 년 동안 내가 발견한 것은 기독교 희락주의자가 되는 것, 즉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감을 느낄 때 하나님께서 가장 영광을 받으신다고 믿는 사람이 되는 이것이 나에게 경험 신학을 갈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현재의 삶, 영원히 사는 것 등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이 내 삶 주위에 부유하는 신학에 대해 불만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나는 성경을 읽을 때 그 내용이 몹시 신학적이거나 또는 경험적 표현이 강할 때 매우 경계합니다.


내면의, 체험적 현실


몇 달 전에 나를 사로잡은 구절이 하나 있는데, 갈라디아서 4:4-6입니다. 이 본문을 읽고 네 부분으로 나눈 다음, 여러분이 궁금해 하시는 내용에 대해 몇 가지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부분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여기에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삶, 곧 율법 아래에서 율법을 완성하신 완벽하신 삶이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두 번째 부분으로 이어집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구속의 대가를 지불하셔서 죄와 사망의 종살이, 율법에 얽매인 종살이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일종의 합법적 거래가 일어났고,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공의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충족하시고 당신 자신에게 백성을 사 주셨습니다.


세 번째는 이렇게 계속됩니다.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그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셨습니다. 그 법적 구속의 효과, 지불된 대가는 이제 하나님이 합법적으로 자신을 위한 백성을 소유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백성을 사셨습니다. 그들은 법적으로 이제 그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양자 삼으셨고, 그들을 위해 필요한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제 마지막 6절입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그래서 합법적 거래가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앞서 설명한 세 구절의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신학을 강렬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육신과 구속, 양자됨을 보장하는 십자가 위의 합법적인 거래를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외부에 있는 역사적인 것입니다. 이건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건 다릅니다. 이제 영적 경험의 장소이자 지각의 경험, 애정의 경험을 느끼는 우리의 마음은 시야에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합법적인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녀의 경험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우리 마음속에 임재하며 우리의 마음속에서 부르짖습니다. “아빠! 아버지!”


모든 그리스도인의 외침


이제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깨우침을 주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난 그걸 경험했었나? 난 진짜인가?”라고 말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바울은 앞서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26)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적어도 세 가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에베소서 1:5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둘째 (우리가 방금 읽은) 갈라디아서 4:5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합니다. 셋째로 갈라디아서 3:26은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말합니다.


예정은 마음속의 경험이 아닙니다. 구원은 마음속의 경험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마음속의 경험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에 보내셔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고 바울이 말한 진의입니다. 


이 경험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봅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만약 그런 경험이 당신을 자극하였는데도 “내가 언제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으며 성령을 받았는지 기억이 안 나”라고 말한다면, 자, 한번 잘 들어 보세요. 적어도 어떤 면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 중 일부는 실제로 우리가 겪은 이러한 경험과 관련하여 너무 형편없는 교육을 받았거나 전혀 배우지 않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몰랐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그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았어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우리에게 일어난 일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경험을 이해하는 방법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바울은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을 목회자와 같은 소수의 특별한 그리스도인에게만 보내셔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신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모든 자녀에게 그렇게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외치게 하신다


그렇다면 그건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 아들의 영이 우리 마음속에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이 경험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로마서 8:15-16에서 매우 유사한 병행구절을 가져오겠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갈라디아서 4:6에서 바울은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8:15에서는 바울은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럼,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것인가요? 아니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에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것인가요?


이어지는 로마서 8:16이 우리에게 답을 줍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우리는 우리 안에서 마치 우리가 그 경험과는 분리되어 “아빠! 아버지! 아빠! 아버지!”라고 외치는 것을 지켜본 후 우리가 그것을 좋아하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를 사로잡아 그에게 소리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자녀에게 우리의 영과 함께 증언하시는 그의 영을 통해 우리의 마음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목소리를 내도록 하십니다. 이것은 받아들임의 목소리, 애정의 목소리, 기쁨의 목소리입니다. 다음과 같은 목소리이지요. “나에게는 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는 나를 위해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그는 나를 양자 삼으셨습니다. 그는 나를 돌보십니다. 그는 나를 원하십니다. 그는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는 나를 보호하십니다. 그는 나를 채워 주십니다. 그는 나를 그분의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께서 외치신 ‘아빠’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는 표현에서 ‘부르짖다’라는 단어는 탄식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제 말은, 영어에서 부르짖다(cry)라는 단어는 종종 눈물 흘리다(weep)란 단어를 연상시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의 외침입니다. 복음을 들었던 아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마 21:15)라고 외쳤을 때 사용했던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들은 소리 질렀고, 그것이 우리가 여기서 ‘부르짖다’라는 단어를 이해해야 하는 방식입니다. 우는 것이 아니라, “호산나! 아버지! 아빠! 제가 당신의 자녀라는 게 믿을 수 없군요!”라며 외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 부르짖음의 의미입니다. ‘아빠’(abba)는 예수께서 마가복음 14:36에서 아버지께 말씀하실 때 직접 사용하신 아람어입니다. 바울은 이 아람어를 헬라어로 바꾸기로 했을 때 (이 단어는 헬라어가 아닙니다) 그는 이것을 ‘abba’ 그대로 가져옵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우리가 예수님과 동일한 경험을 하고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셨고,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성령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를 향한 동일한 경험을 맛보게 하셔서 초대교회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집안의 맏형과 같이 느끼도록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경험은 하나님의 영이 깃든 자녀들의 내면의 목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피로 사신 아버지의 보살핌의 영적 시각과 그리스도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달콤함을 영적으로 맛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에 관한 체험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과 함께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는 성자의 영입니다.


이제, 제가 예전에 이 말씀을 대할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관련 구절을 하나 더 보여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7:37-39에서 예수님은 일어나 외치시기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하시고,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덧붙이십니다. 그래서 믿음은 목마른 영혼이 예수께 나와 생수를 마시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4:14에서 말씀하시기를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물은 샘이 될 것이며, 영원히 스스로 재생산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요한복음 7:38에서 “아니다, 샘보다 더한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이것은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 하나님의 성자의 영,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영, 즉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전능하신 아버지가 되시는 광경과 맛에 관한 경험입니다.


갈등하는 성도들에게


토니, “갈등하는 성도들에게 이것은 어떻게 적용되는가”라고 물으셨지요? 이렇게 해도 될까요?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제자들이 아버지로서 하나님의 사랑의 제공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우려고 하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예수님은 이 제자들을 설득하고 계십니다. “네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내게로 오라, 나를 믿으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너의 아버지가 되실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6:30)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구절을 가지고 갈등하는 분들에게 도전합니다. 제 말은, “존 파이퍼가 이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저는 제 믿음이 그가 방금 말한 것을 반영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라는 것 외에 어려움은 또 뭐가 있을까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하실 때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가거라, 난 너희들과 더 할 얘기가 없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지요. 대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믿어야 할 여덟 가지 이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믿음이 작은 자라고 부르시고, 그들에게 계속 ‘내 말을 들어라. 내 말 좀 들어봐. 내가 새에 대해 말해 볼게. 백합에 대해 말해 보자’라고 설득하십니다. 그를 아버지라고 믿어야 할 여덟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갈등하는 모든 성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합니다. 깨닫도록 하세요. 성경을 통해 배워야지 다른 방법으로는 배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끝까지 읽어 보지 않으면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 성경적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진정으로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 모를 테니까요.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모든 감정을 성경적으로 이해하십시오. 여러분 스스로는 그것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도 못합니다. 성령께서 내면에서 여러분을 자극하실 때, 여러분은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으셨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가 그 경이로움을 깨닫게 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인내하시며 기다리십니다.


원제: What Does It Mean to Cry, ‘Abba, Father’?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장명근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으셨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가 그 경이로움을 깨닫게 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인내하시며 기다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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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John Piper

존 파이퍼는 desiringGod.org의 창립자이며, Bethlehem College & Seminary의 총장으로 33년 동안 미네소타에 위치한 Bethlehem Baptist Church의 담임목사로 섬겼다. 대표작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라’가 있으며, 최근 저술한 ‘내가 바울을 사랑하는 30가지 이유’​ 외에 5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