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으로

교회

미국 교회의 쇠퇴와 갱신: 주류 교회의 쇠퇴(1-2)
by Tim Keller2022-03-23

기독교는 전혀 다른 종교였고 또 전혀 다른 종교이다. 기독교는 우리 힘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구원은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이 글은 미국 교회의 쇠퇴 원인을 성찰하고 그 미래를 전망하는 팀 켈러 목사의 4부작 중 첫 번째입니다. 


[1-1]

• 서론

• 마지막 번성

• 주류 교단의 쇠퇴

[1-2]

• 미국 주류 교단에 대한 비판들

    켈리의 사회학적 비판

    메이첸의 신학적 비판

    마즈던의 문화적 비평

[1-3]

• 주류 개신교의 쇠퇴: 미국 사회의 분열과 문화적 통합의 종말

• 결론


2부 “복음주의의 쇠퇴”, 3부 “갱신의 길”,  그리고 4부 “갱신을 위한 능력”으로 이어집니다.  



미국 주류 교회에 대한 비판들


켈리의 사회학적 비판


그럼 무엇이 문제였을까? 종교의 매력은 ‘가장 큰 차원의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켈리는 썼다. 이것은 이웃을 돕거나 좋은 일에 자원하는 것과 같이, 규모 면에서는 작지만 진정성을 가진 의미를 말하는 게 아니다. 가장 큰 차원의 의미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감과 희망을 가지고 고통과 죽음에 직면할 수 있게 하며, 또한 장기적인 공동선을 추구하고 그것을 위해 희생할 수 있도록 한다. 그 모든 게 가능한 이유는 다름 아니라 내가 “우주적 목적”의 일부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결과를 낳기에 적합한 것으로 보이는 가장 큰 의미는 종교가 제공하고 또한 종교적으로 검증된 것”뿐이다.[5_Ibid, 43-44.] 


켈리는 보수 교회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실재, 예수님 부활의 진리, 내적 변화를 위한 성령의 능력, 죄 용서를 위한 예수님 죽음의 효능,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같이, 주로 영적 필요와 초자연적인 “최대 규모”의 우주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자유주의 주류 교회는 현대의 세속 사상에 깊이 적응했다. 그들은 기적, 성령으로 거듭남,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 성경의 신뢰성과 같은 개념을 거부했다. 그들은 “상대주의…미지근함…개인주의…”와 같이 켈리가 “사회적 약화의 증거”(Evidences of Social Weakness)라고 규정한 가치를 채택했다. 달리 말해 이런 현상은 점점 약해지는 공동체의 특징이고, 그 결과 하나님 안에서의 믿음, 의미, 용서, 사랑, 영적 성장을 공유하는 삶과 같은 전통적인 기독교적 가치를 중심으로 더 이상 강력하게 결합할 수 없게 되었다.[6_Ibid, 84-85.] 주류 교회는 자아에 대한 치료요법적(therapeutic) 견해를 채택하고, 성과 돈의 사용에 관한 전통적인 기독교의 윤리적 제한을 포기했다. 켈리는 강력한 종교 단체를 위해서 “최소한의 최대”(Minimal Maxims)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신앙에 관해서 진지한 사람들은: 


1. 신앙(faith)을 다른 신념/충성/관행과 혼동하지 않는다. 신앙을 이런 것들과 구분하지도 않고 무분별하게 섞지도 않는다. 또한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신앙이 마치 이런 것들과 비슷한 것처럼 여기거나, 동등한 가치를 가졌다고 보거나, 또는 상호 양립이 가능한 것처럼 위장하지도 않는다. 

2. 신앙 조직으로부터 승인받은 사람들에게 높은 요구를 하며 … 또한 완전히 헌신하지 않은 사람들을 조직에 포함시키거나 조직 안에서 계속 활동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3.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가 표준이나 믿음 또는 행동에서 잘못하는 경우, 그것을 동의하거나 격려하지 않으며, 함께 탐닉하지도 않는다. 

4. 그것[당신의 신앙]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변명하지도 않으며. 또한 신앙이 삶에 아무런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고, 신앙 여부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다른 사람이 함부로 말하도록 허용하지도 않는다.[7_위 책, 121.] 


그렇다면 주류 교회의 ‘사명’(mission)은 무엇이었나? 켈리는 주류 교단이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한 다음 그들을 믿음 안에서 세우는 데 초점을 맞추는 대신, 거의 전적으로 정치적 대의에만 집중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고, 이웃을 돌보고,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일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라는 단순한 소명, 즉 교회가 지난 수세기 동안 해왔던 바로 그 소명을 무시했다. 그 대신 주류 교회는 그들 자신을, 달리 말해서 기독교 자체를 특정 정당 또는 특정 사회 정책과 동일시했다. 교회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일은 내팽개쳐지고 자유주의 정당이 잘하는 일이 이제는 현대 교단의 본업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정치적 그리고 신학적으로 자유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켈리는 스스로를 정치 조직으로 전환하는 교회는 계속해서 쇠퇴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보면 민주당과 함께 주류 교회가 저지른 잘못을 반복하지 말라는, 즉 공화당에 동조하지 말라는 보수 교회를 향한 경고가 분명히 있었다. 켈리의 이런 경고는 모든 면에서 거의 완전히 무시되었다. 그는 좌파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고, 그런 그를 보면서 약간의 악의적인 기쁨마저 느꼈을 보수 그리스도인 또한 그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결과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 대부분은 켈리에 대해 거의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메이첸의 신학적 비판


켈리가 글을 쓰기 50년 전에 주류 교회를 향한 전혀 다른 종류의 비판이 출판되었다. 1923년,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은 뉴욕의 주요 출판사(Macmillan)를 통해서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를 출간했다. 프린스턴 신학교의 신약학 교수인 메이첸이 그 글을 썼을 때만 해도 아직까지 수치적 그리고 제도적 쇠퇴가 시작하기 전이었다. 그러니까 50년 후 켈리가 관찰한 것과 비슷한, 사회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당시까지만 해도 분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숫자의 감소나 손실이 없었다. 그럼에도 메이첸은 주류 개신교를 표적으로 삼아 글을 썼다. 현대 세계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주류 개신교가 종교적인 신념과 믿음을 버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역사 속에서 항상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던 가장 위대한 구원 종교가 지금 완전히 다양한 형태의 종교적 신념과 싸우고 있다. 그런데 이는 더 파괴적일 뿐이다. … 왜냐하면 이 종교가 여전히 전통적인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단지 다양한 형태의 운동이다, 그 운동의 뿌리는 … 자연주의에 있다. 자연주의는 기독교의 기원과 관련하여 (일반적인 자연 과정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그 기원에 포함하는 것을 부인한다.[8_J. Gresham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alism, New Edition, Eerdmans, 2009, 2.]


개신교는 현대 과학이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선재와 성육신, 십자가에서의 속죄, 그리고 육체 부활과 같은 역사적으로 유지되는 기독교 신앙의 모든 주요 교리로 요약되는 기독교의 “특수한 것들”(particularities)에 반대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에 대해 메이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유주의 신학자는 종교의 일반 원칙 중 일부를 구출해 내려고(rescue) 노력한다. 그런 과정에서 기독교의 ‘특수한 것들’은 단지 일시적인 상징으로 치부되며, 대신 종교의 일반 원칙이 ‘기독교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된다.”[9_위 책, 5.]


메이첸의 진단은 켈리의 진단보다 훨씬 더 냉소적이다. 메이첸은 이렇게 주장했다. 초자연적이지 않은 기독교를 창조하려는 자유주의의 시도는 “기독교를 기독교로 특징짓는 모든 것에 대한 사실상의 포기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그 뒤에 남은 것은 본질적으로 기독교가 등장하기 전부터 이 세상에 있었던, 뭐라고 딱 정의하기 힘든 종교적 열망의 한 유형에 불과하다”[10_위 책, 6.] 자유주의에 의해 변경된 것은 단순한 ‘수정’ 내지 업데이트가 아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바꾸어버림으로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더 높은 차원의 삶을 갈망하고 더 높은 수준에서 삶을 고양시키는, 다양한 종류의 영감을 주는 이야기로 가득한 종교가 없었던 적은 없다. 이런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다양한 윤리적 실천, 종교적 준수 및 의식의 변화를 통한 자기 구원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전혀 다른 종교였고 또 전혀 다른 종교이다. 기독교는 우리 힘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구원은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구원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삶,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메이첸은 이러한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역사성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기독교에게 남은 게 무엇이든, 그것은 한낱 행위로 인한 의의 종교, 즉 수많은 다른 종교 중 하나로 재창조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똑바로 알고 있었다. 그런 시도는 결국 기독교를 다른 모든 종교와 구별 짓는, 기독교를 기독교로 만드는 핵심을 제거함을 의미한다. 구원에 관한 장에서 메이첸은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 신앙이 진리(즉,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근거한다면, 그리스도인을 구원하는 것은 믿음 자체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 …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성품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얻으려는 노력의 중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단순하게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드린 희생을 받아들인다. 그런 믿음의 결과는 새 생명과 모든 선행이다. 그러나 구원 자체는 하나님의 절대적으로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 자유주의 교회에 만연한 믿음의 개념은 매우 다르다. … 현대 자유주의에 따르면 … 구원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한 우리 자신의 순종으로 얻어지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한 가르침은 율법주의의 승화된 형태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아닌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 여부가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시는가 아닌가의 근거가 된다.[11_위 책. 120-121.]


이미 언급했듯이 메이첸은 아직 수치적 또는 제도적 쇠퇴의 징후가 전혀 없을 때 이 글을 썼다. 그리고 그의 비판에는 그러한 쇠퇴에 대한 예측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출석 숫자 또는 헌금의 변화와 관계없이 메이첸은 기독교 안에서 나타나는 여러 변화가 교회의 실제 삶과 사명에 치명적이라고 믿었다.[12_위 책, 150-151. 이 책 끝에서 메이첸은 미래에 교회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겠다고 인정했다. 메이첸은 2세기에 이교사상이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 역사(이 싸움에서는 교부들에 의해 승리를 거두었다)와 중세교회의 타락을 지목한다. 메이첸은 몇 가지를 고려해 보면 교회들의 신학에 매우 큰 변화가 예상될 것이라고 암시는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는 추측하지 않았다.]


여러 면에서 (아주 큰 관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류 기독교의 쇠퇴에 대한 켈리의 분석이 메이첸의 분석과 일치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메이첸은 교회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되는 것들(main things)을 포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켈리는 거기에 동의한다. 켈리는 사회학적으로 사람들을 “가장 큰 의미”에 연결하는 것에 대해 말했고, 메이첸은 신학적으로 사람들을 하나님과 살아 숨 쉬는 관계에서 연결하는 것에 대해 말했다.


교회는 세속 조직이 훨씬 더 잘할 수 있는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사회봉사 기관 또는 정치적 로비 단체가 되어갔다. 그런 교회가 쇠퇴한 것도 당연하다. 주류 교회는 세속 문화와 단체가 줄 수 없는 무엇을 주는 능력을 점점 상실해 갔다. 그 결과 세상이 주지 못하는 것은 이제 교회도 줄 수 없게 되었다.[13_메이첸에게 공평하게 말하자면, 켈리와는 달리, 메이첸은 교회가 역사적 교리를 폐기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제도적 교회의 자멸을 초래할 선택일 뿐만 아니라 잘못된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배신이었고, 그 이유만으로도 반대해야 하는 것이다.] 포용과 정의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길은 다양하다. 굳이 그런 목표 때문에 일요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교회에 가야 할까? 


마즈던의 문화적 비평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나도록 명확하지 않은 주류 쇠퇴의 마지막 이유가 있다. 역사학자 조지 마즈던(George Marsden)은 ‘미국 계몽주의의 황혼’(The Twilight of the American Enlightenment)에서 개신교 주류가 세속 세계가 추구하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도덕적 합의와 동맹을 맺었다고 주장한다. 그 합의가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 주류 개신교도 따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군사 및 경제 강국으로 부상했다. 미국의 인구 또한 소득과 은행 계좌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증가했다. 이 모든 것은 “미국적 가치”의 승리처럼 보였다. 마치 미국이 공유하는 도덕 표준 속에는 통일성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는 현재의 ‘문화 전쟁’과 같은 것이 없었다. 도덕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겉보기에 통일되고 낙관적이었던 1950년대에도 우리에겐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강한 의심의 기류가 어떤 형태로든 우리 속에 숨어 있었다고 마즈던은 기록한다. 저명한 지식인들은 물질주의와 대중문화가 미국인들을 순응주의자로 만들고, 거대한 기계 안에서 움직이는 톱니바퀴로 전락시킨다고 비난했다.[14_마즈던은 이 문제는 ‘미국 계몽주의의 황혼’의 제1장에서 다루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전례 없는 번영이 미국인들을 “경제 기계 안에서 움직이는 톱니바퀴”로, 다시 말하면,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하는 인격이 제거된 존재로 바꾸어 놓았다고 확신했다. “고도로 조직화된 상업 사회와 소비주의”가 우리의 “진정한 인간성”을 갉아먹고 있었다(42). 에리히 프롬(Eric Fromm), 윌리엄 화이트(William Whyte)를 비롯한 여러 저자들은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순응주의의 해독제는 개인의 자유, 곧 진정한 인간, 스스로 결정하는 인간, 그리고 스스로 충족하는 인간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31).] 당시 많은 대중 지식인들이 찾은 대답은 최대한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 진정성 있고 자기 결정적이며 스스로 충족하는 사람이 될 것으로 보았다.[15_위 책, 86쪽. 그 시대에 가장 유명했던 대중 지성인들 거운데 다수는 철학자가 아니라, Gordon Allport, Carl Rogers, B.F. Skinner, Erving Goffman, Rollo May 같은 심리학자였다. 이들 사이에 차이점이 많이 있지만, 이들은 기본 사상을 공유했는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전통, 곧 사람은 비합리적 죄책감, 공포, 전통적 공동체와 권위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만큼 성숙하고 건강해진다는 사상이 그것이다. 이러한 기본 사상에 이들은 농후한, 특히나 미국적인, 낙관주의, 곧 인간 존재는 그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완전한 자유가 주어지면 스스로를 더 나은 존재로 형성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할 것이라는 사상을 첨가했다.] 


그러나 자유는 문자 그대로, 점점 더 자신이 자신에게 법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자율성’으로 정의되어 갔다. 역사적으로 인간이 추구하는 성취와 의미는 자신의 행복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아보다 집단의 공동선을 더 중요시하는 관계와 역할을 통해 가족과 공동체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에 이르는 기간에 데이비드 리스먼(David Riesman)의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 같은 베스트셀러 책들이 꾸준히 쏟아져 나왔고, 이런 책은 하나같이 가족이나 지역의 ‘하위 공동체’가 자신의 가치와 목적을 지시하지 못하도록, 미국인은 보다 더 진정성 있고 자기 결정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사람이 이래라저래라 하는 도덕적 처방을 버리고, 스스로 나 자신의 도덕적 처방을 발견할 때에만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주장이었다.[16_See Marsden, chapter 2, “Freedom in the Lonely Crowd”, 21-42.] “자유”라는 용어는 거의 전적으로 ‘부정적인’ 용어가 되어 갔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로부터 벗어날 때에만 자유가 자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즈던은 이렇게 묻는다. “우리를 구속하는(restrictive) 전통이나 기대치에서 벗어났다고 치자, 그럼 인간 번영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으로 대체되었는가?”[17_위 책, 42.]


사실상 미국에서 경종을 울린 유일한 주요 문화계 인물은 저명한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이었다.[18_이 맥락에서 리프먼이 메이첸의 기독교와 자유주의를 높게 평가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게 좋을 것 같다. 또한 많은 존경을 받는 문학자이지만 미국 지성계에서는 실제로 주목 받는 인물이 아니었던 C. S. 루이스는 1943년에 The Abolition of Man을 썼는데, 이 책에서 그는 리프먼의 비판뿐 아니라 알리시데어 매킨토시와 후대의 찰스 테일러의 비판까지도 예견했다. 이들은 모두 세속 사회는 그 도덕적 이상들을 위한 적접한 기초나 원천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 비판을 최근에는 Christian Smith가 Atheist Overreach(Oxford, 2018)에서 탁월하게 다시 거론했다. 스미스는 전통이든 계시든 자연법이든 이런 것 안에 있는 기초 없이는, 무신론자/세속주의자들은 왜 한 묶음의 의 도덕 감정들이 또 다른 묶음의 도덕 감정들보다 우선하는지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할 수 없으며, 중대한 희생을 수반할 때조차도 도덕원칙들을 따르는 실제적인 동기를 제시할 수도 없다고 설명한다. 이 논증의 또 다른 고전적 제시는 다음을 볼 것. Arthur Allen Leff “Unspeakable Ethics, Unnatural Law” Duke Law Journal, December, 1979.]


리프먼은 세속적 자유주의 체제의 중심에 있었던 비종교적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1955년에 그는 자신의 동료들을 실망시킨 마지막 책, ‘공공철학 에세이’(Essays in the Public Philosophy)를 썼다. “리프먼이 동료로부터 이단 취급까지 받으며 욕을 먹은 이유는 전통적(inherited) 원칙에 기초해 대중적 합의를 구축해 온 그의 자유주의 동료들이 전통적 원칙을 파괴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그 전통 위에서 뭔가를 쌓고 있다는 리프먼의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19_위 책, 44.] 


리프먼은 진보적인 미국 가치(그것을 완전히 실행하든 아니든), 즉 모든 사람의 평등한 존엄성, 양심, 사상 및 표현의 자유, 동의에 의한 정부, 과학과 이성에 대한 신뢰 등등이 과학의 결과(deliverance)가 아니라고 비난했다. 원래 이러한 미국의 사상은 초월적 도덕 표준, 즉 우리 모두가 진심으로 인정할 수 있는 더 높은 “보편적 질서”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유신론자가 아닌 리프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그러나 그는 객관적인 도덕 질서, 달리 말해서 문화 또는 개인의 사적 감정에 의해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 일련의 기준을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한, 공적이고 공유 가능한 사회 질서에 대한 기반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좋은 것, 옳은 것, 참된 것이 개인의 ‘발명’이고 ‘선택’에 달리게 된다면, 우리는 예의(civility)라는 전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20_Marsden, 47에서 인용.] 그가 의미하는 바는, 여태 아무도 그런 기반 위에서 사회적 공동생활을 만들려고 시도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떤 법은 정의롭지만 어떤 법은 부당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다수결로? 그렇다면 다수가 소수를 박해하고 심지어 파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독일에 대해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21_See Marsden, chapter 3, “Enlightenment’s End? Building Without Foundations”, 43-67.]


우리가 원래 가졌던 “미국적 가치”가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과, 고대인처럼 “자연법”을 믿었던 계몽주의 사상가 사이의 합의에서 비롯되었다는 리프먼의 말은 옳다. 그건 다름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성찰을 통해 식별할 수 있는 우주의 초월적이고 도덕적인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55년, 미국의 현대 자유주의 기득권은 이런 리프먼에게 경악했다. 그의 책은 부정적 평가를 받았고, 하나님과 자연법에 대한 믿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위험하고 완전히 불필요하다는 주장이 뒤를 이었다. 신념을 테스트하는 데에는 “비독단적, 상대주의적, 실용주의적” 방식이 가장 사랑받았다. 우리의 가치는 인간에게 가장 유익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것에 달려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 주장은 결코 하나님과 우주 질서에 그 뿌리를 두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주류 기독교의 중요한 대중 지식인 라인홀트 니버(Reinhold Niebuhr)조차도 리프먼의 책을 거부했다.[22_위 책, 53.]


니버는 메이첸의 예측대로 신앙을 세속 과학에 적용했다. 현대 개신교 신자인 “우리”는 더 이상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리는 … 자연 질서를 파괴하는 ‘기적’이 계시적 사건의 사실성을 증명한다고 믿지 않는다”라고 그는 썼다.[23_위 책, 118.] 성경에는 현대의 세속 사람들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있고, 그래서 자유주의 개신교도는 그것을 거부했다. 즉 진리의 기준은 초자연적 계시가 아니라 세속적 실천 이성이었다. 성경은 세속적이고 현대적 관점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결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속적이고 현대적 관점은 성경 내용 중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결정한다. 그래서 니버는 종교나 자연법으로 돌아가라는 리프먼의 요청이 잘못되었고 불필요하다는 다른 비평가들과 의견을 같이 했다. 합리적인 사람은 민주주의, 인권, 개인의 자유에 대한 헌신이야말로 가장 합리적이라는 데에 기꺼이 동의한다. 


그러나 마즈던이 묻는 것처럼 (그리고 메이첸이 수십 년 전에 주장한 바와 같이) 당시 교회는 도대체 무슨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는가? 


그런 전략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이것이다. 니버는 자신의 입장을 기독교 유산이 가진 공적 역할을 보존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신앙의 주관화는 신앙을 전적으로 선택적 대상이며 없어도 되는 것으로 만들었다. … 신학을 무시하고 니버가 제안하는 인간 한계라는 관점에서 기독교를 단지 심오한 통찰력의 한 방편으로만 바라보게 만들었다.[24_위 책, 119.] 


미국 교회의 쇠퇴와 갱신: 주류 교회의 쇠퇴(1-3): 주류 개신교의 쇠퇴: 미국 사회의 분열과 문화적 통합의 종말로 이어집니다. 

원제: The Decline and Renewal of the American Church: Part 1-The Decline of the Mainline

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

번역: 무제

성경은 세속적이고 현대적 관점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결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속적이고 현대적 관점은 성경 내용 중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결정한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Tim Keller

팀 켈러(1950-2023)는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MDiv)와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DMin)에서 수학했으며, 뉴욕 맨하탄 Redeemer Presbyterian Church의 초대 목사로 섬겼다. City to City와 Faith & Work, The Gospel Coalition을 설립하여 교회 개척, 복음 갱신, 복음 연합에 큰 역할을 했으며,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와 ‘팀 켈러의 센터처치’ 등 다수의 책과 수많은 컨퍼런스 강연과 설교를 통하여 복음적 변증가로 자리매김하며 전 세계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울림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