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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포스트모던 문화가 속삭인다
by 최성은2022-02-05

오늘 우리는 출애굽기에서 놀라운 사실을 본다. 4,000년 전에 바로와 모세 사이에 오간 대화에서 오늘날 우리 귀에 속삭이는 유혹의 소리가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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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觀點, view point, perspective) 곧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판단하는 시각에 있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사람은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존재이기에 눈앞에 있는 결과에만 연연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창조주이자 전능자이시기 때문에 그 과정 전체를 중요하게 여기신다. 그런 의미에서, 출애굽기는 과정의 이야기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그 땅을 탈출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과정의 이야기다.  


주전 15세기, 이스라엘이 셋방살이한 이집트 땅에는 다양한 신을 섬기는 다신론 사상이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시는 과정에서 이 땅에 내리신 특단의 조치, 열 가지 재앙은 당시 이집트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과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출애굽기에서 놀라운 사실을 본다. 4,000년 전에 바로와 모세 사이에 오간 대화에서 오늘날 우리 귀에 속삭이는 유혹의 소리가 발견된다.  


지금 이 세상의 문화를 대변하는 거대한 흐름은 포스트모더니즘 문화다.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조직과 철학을 지니고 있는 이 문화를 싸잡아 다 나쁘다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포스트모더니즘 문화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거대한 문화 흐름에 빠져 허우적거려서도 안 되고, 이 파도에 올라타 마냥 즐겨서도 안 된다. 그만큼 이 문화에는 반기독교 요소들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출애굽기로 돌아가서, 바로 앞에 선 모세의 자리에서 오늘의 포스트모더니즘 문화를 분별하는 관점과 지혜를 얻도록 하자. 


“이 땅에서 예배하라” 


하나님이 이집트 땅에 내리신 첫 재앙은 나일강 물이 피로 변하는 것이었다. 이집트에서 나일강은 그들에게 풍요를 가져다주는 다산의 상징이었다. 그들의 자존심이었다. 하나님은 이집트의 첫째 우상을 치심으로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셨다. 출애굽기 8:25은 두 번째 재앙, 개구리 재앙을 당한 뒤 보인 바로의 반응으로 시작한다. 바로는 온 땅을 뒤덮은 개구리 떼를 보고 두려워했다. 그리고 히브리 민족의 지도자 모세를 불러 제안한다(출 8:25).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여기서 우리는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줄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배를 드리되 이집트 땅에서 예배하라는 것이다. 이집트 땅을 벗어나지 말라는 것이다. 그 땅은 어떤 땅인가? 우상숭배가 가득한 땅이다. 온갖 죄와 문화와 잡신이 넘쳐나는 땅이다. 바로의 방점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에 있지 않다. 바로가 방점을 찍은 것은 ‘이 땅에서’이다.     


사탄도 우리에게 똑같이 제안한다. “너희는 이 문화 안에서 너희 하나님을 예배하라.” 오늘 이 시대를 지배하는 소비주의 문화의 재물과 정욕과 탐욕을 누리고 즐기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예배하라! 오늘의 문화 사탄이 우리에게 제안한다. 


“너무 멀리 가지 말라”


바로는 하나씩 타협안을 제시하면서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바로는 히브리 노예들을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을 놓치면 바로 자신의 절대 권력도, 이집트 경제도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이에 바로는 두 번째 제안, 유혹을 시작한다(출 8:28).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하나님을 예배하되 너무 깊이 빠지지는 말라! 이 말이다.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 언제든 나에게 다시 돌아오라는 말이다. 멀리 가지 않으면 옛 생활이 그리울 때 쉽게 돌이킬 수 있으니, 너무 멀리 가지 말라는 유혹이다. 


오늘의 사탄도 우리에게 똑같이 말한다. “하나님을 예배하라. 그렇지만 너무 깊이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말라.”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다. 신앙과 무엇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러니 예배도 적당히, 기도도 적당히, 헌신도 적당히 하라. 그래야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오늘 포스트모더니즘 문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나를 위해 기도하라” 


바로는 심지어 이런 말까지 한다(출 8:28).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다. 바로가 하나님의 심판에 겁을 먹고 회개라도 한 것일까? 물론 아니다. 바로가 기도해 달라고 할 때 염두에 둔 신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다. 바로가 본 하나님은 이집트의 여러 신 중 하나로 여겼을 뿐이다. 또 그렇게 기도하면, 복을 내려 줄, 기복의 신으로 여겼을 뿐이다. 


오늘 이 시대의 문화 역시 철저히 종교 다원주의를 표방한다. “너희 종교를 인정할 터이니 우리 종교도 인정하라.”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는 배타주의일 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유일하게 그들의 관용주의에서 배제하는 종교가 있다. 유일신 종교가 그것이다. 또한 ‘관용’을 절대가치로 부르짖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은혜를 독점하는 기독교의 신을 배격한다. 인간 주도의 신앙 곧 복을 빌면 신은 복을 내려야 마땅하다고 믿는 기복신앙을 추종하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신을 속 좁은 신으로 모독한다. 


“너만 열심히 믿어라”


계속되는 재앙의 심판 속에서 바로는 굴복과 배신을 반복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통해 여덟 번째, 메뚜기 재앙으로 이집트의 남은 모든 것을 다 쓸어버리겠다고 선포하셨다. 이제 참다못해 바로의 신하들도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 주자고 바로에게 읍소하고 항의할 지경이다. 바로는 신하들의 말을 듣고 마음이 다시 조금 흔들린다. 그리고 다시 거래를 시작한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꼬드긴다. 바로는 다 알면서도 “그런데 갈 사람은 누구누구냐?”라고 묻는다. 모세가 대답한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절기를 지켜야 하므로, 어린 아이와 노인들을 비롯하여, 우리의 아들과 딸을 다 데리고 가야 하며, 우리의 양과 소도 몰고 가야 합니다.”


모세는 바로가 어떤 의도로 갈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모세의 대답에는 단호함이 배어 있다. 사실 모세는 바로의 질문의 의도를 꿰뚫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는 전부를 드리는 것이지 무엇을 뒤에 남기고 타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는 전심으로 드리고, 어떤 것도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본심을 간파당한 바로는 바로 호통을 친다. “그래, 어디 다 데리고 가 봐라! 너희와 함께 있는 너희의 주가 나를 감동시켜서 너희와 너희 아이들을 함께 보내게 할 것 같으냐? 어림도 없다! 너희가 지금 속으로 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제 바로는 들켜버린 본심을 드러낸다(출 10:11, 새번역). 


“그렇게는 안 된다! 가려면 너희 장정들이나 가서, 너희의 주에게 예배를 드려라. 너희가 처음부터 바란 것이 그것이 아니더냐?” 


조금이라도 보내지 않으려는 바로의 심보를 볼 수 있다. 바로의 이와 같은 유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혹과 정확히 일치한다. “너만 열심히 믿어라.” “너의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말라.” “너희 자녀와 배우자에게는 다 각자의 인생이 있고, 개인의 믿음이니 간섭하지 말라.”


“다 드리지는 말라” 


또다시 강퍅해진 바로의 선언에 하나님은 아홉 번째 재앙을 내리셨다. 밤낮으로 칠흑같이 어두워지는 재앙이었다. 성경은 이 재앙이 일어나는 과정을 모두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바로의 마음이 얼마나 강퍅했는지,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의 죄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얼마나 치열한 영적 전쟁을 통해서 이루어졌는지 보여 준다. 이 재앙이 일어난 뒤 바로는 다시 협상을 시도한다(출 10:24).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계속해서 유혹하고, 변질시키려 하고, 어떻게든 협상하려고 하는 사탄의 전형적인 계략이 드러난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모두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니까 사탄이 이제는 소유물로 우리를 유혹한다. “소유물은 다 놔두고 가라.” 이 말은 곧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가족도 함께 교회에 나가는 것은 좋지만,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다 드리지는 말라는 것이다. 이에 모세는 바로에게 담대하게 말한다(출 10:25).

 

“왕이라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드릴 제사와 번제들을 우리에게 주어야 한다.”


바로 당신이 이집트의 왕이라도, 이 세상의 통치자라 할지라도,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니 여호와께 드릴 번제물을 내놓아야 한다고 모세는 말한다. 


끝나지 않은 속삭임, 그리고 이길 힘


우리는 이 시대를 장악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의 유혹 앞에서, 우리도 모세처럼 정확하게 그 유혹의 실체를 간파하고 그에 맞서 강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할 수 있을까? 무엇이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오염되지 않고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할까? 세상의 강력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모세와 같은 믿음으로 걸어 나갈 수 있는 동력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파리 떼 재앙이 이집트 온 땅을 덮쳤을 때, 하나님은 고센 땅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그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강조하신 단어가 있다. 바로 ‘백성’과 ‘구별’이다.


애니메이션 뮤지컬 드라마 ‘이집트 왕자’(Prince of Egypt)가 크게 히트 쳤을 때 유행했던 성경 구절이 있다. “나의 백성을 가게 하라”(출 5:1, Let my people go)이다. 여기서 ‘백성’은 하나님이 즐겨 쓰시는 단어다.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노예로 살았던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선언 가운데 나온 말이다. ‘나의 백성, 나의 자녀, 나의 가족’이라는 말이다.


‘구별’이라는 단어에는 ‘거룩’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히브리어 ‘카다쉬’는 사실 ‘거룩하게 하다’ ‘성결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그러나 원래는 ‘분리하게 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세상과 구별된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다. 죄와 구별된, 곧 죄와 분리된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다. “그들은 나의 백성이다”라는 하나님의 선포요 고백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별된 백성으로 삼으시고 재앙으로부터 보호하시는 주체는 이집트의 수많은 신도 아니고 바로 같은 권세도 아니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 곧 구별된 백성의 가장 큰 복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고센 땅에는 파리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신 일도 아니다. 가나안을 점령하게 하신 일도 아니다. 구별된 백성이 갖는 가장 큰 복은 그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이끌어 가시고 진행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이 하나님만 고백하는 일방적인 사랑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너는 이제부터 내 백성이야. 내 가족이야. 내 형제야”라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십니다”라는 우리의 고백도 있어야 한다. 이런 고백이 있다면 지금의 내 상황이 이집트이건 고센 땅이건 광야이건 가나안이건 전혀 상관없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와 동행하시는 지금의 과정을 중요하게 보시기 때문이다.


복의 결과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따라오는 것이다. 우리는 늘 결과를 보기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 결과를 이미 십자가에서 가장 강력하게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친히 십자가 달려 죽음을 겪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경험할 부활의 역사를 보여 주셨다. 더 이상 어떤 기적도, 어떤 결과도 필요 없다.

 

우리가 지금 고센 땅이 아닌 그 옆 땅에 있었다면 그 땅이 축복의 땅이 되었을 것이다. 고센 땅이라 복이 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 있었기 때문에 그 땅이 복을 받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하셨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복이 되었다는 사

실이다.


오늘날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이 일의 결과나 자신이 원하는 복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가장 큰 복은 나를 구원하시고 구별되게 하시며 복 주시는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 자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집트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질병 없이 만수무강하여도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파리 재앙이고, 메뚜기 재앙이고, 흑암의 재앙이다.


하나님은 “그 사람 내 백성이야. 내 아들이야. 내 딸이야. 건들지 마”라고 말하기를 즐겨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을 즐겨하고 있는가? 지금 내가 나의 하나님 때문에 구별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장 기뻐하고 있는가? 사탄은 이집트의 바로처럼 자신이 사로잡은 사람들을 어떻게든 풀어 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모세처럼 강하게 나아가면 사탄은 우리에게도 타협안을 제시할 것이다.  


“좀 나중에 가. 꼭 지금 하나님 앞에 예배드려야 하나?” 

“하나님을 만날 기회는 언제든지 다시 있어. 일단 인생을 즐겨.”

"예배드리고 바로 다시 이집트로 와. 하나님과 세상을 충분히 동시에 섬길 수 있어.”

“꼭 기독교의 하나님만 섬겨야 해? 다른 신들도 같이 믿으면 더 좋잖아.”

“아이들과 아내들은 놔두고 가. 하나님께 다 드릴 필요 없어. 나중을 위해 조금 남겨 놔야지.”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마. 속 좁은 사람처럼 굴지 마.”



우리는 이 시대를 장악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의 유혹 앞에서, 우리도 모세처럼 정확하게 그 유혹의 실체를 간파하고 그에 맞서 강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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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최성은

최성은 목사(PhD,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는 지구촌교회 담임목사이며, 지구촌미니스트리네트워크(GMN) 대표 및 (사)지구촌사회복지재단 대표이사로 섬기고 있다. 한국교회의 복음화 운동과 복음 생태계 마련을 위해 한국로잔위원회와 TGC코리아ㆍCTC코리아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 저서인 '뉴노멀 시대의 그리스도인'을 비롯하여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