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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실’과 ‘너의 사실’: 우리는 과연 진실을 알 수 있는가?
by Samuel James2022-02-21

확실한 건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읽고 무엇을 믿어야 할지 확신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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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뉴스 및 허위 정보의 문제와 더불어 그 해결책을 제시한 조너선 라우시(Jonathan Rauch)의 책 ‘지식의 헌법: 진리 수호’(The Constitution of Knowledge: A Defense of Truth)를 생각하면, 이제는 고전이 된 1997년 영화 ‘맨 인 블랙’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정부 요원 K(토미 리 존스)는 외계 생명체를 은폐하고 통제하는 자신들의 임무를 J 요원(윌 스미스)에게 설명하고 있다. 어느 시점에서 K는 신문 가판대로 J를 데려가더니 타블로이드 더미를 가리킨다. 머리가 세 개 달린 채로 태어난 아이들, 여전히 살아 있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위치타에서 공연을 한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소식을 전하는 그런 선정적 출판물들 말이다. K는 이렇게 말한다. “지구상에서 최고의 조사 보고서지. 뭐, 원하면 뉴욕 타임스도 읽어봐. 운이 좋을 수도 있을 테니까.”   


이것은 단지 절묘하게 구성된 재미있는 대사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이 살고 있는 우주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한 적절한 은유이다. 사실을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객관적인 대답이 있는가? 아니면, 전적으로 그건 당신의 세계관에 달려 있는가? 답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에 관한 논문을 읽고, 또 실제로 아는 사람은 또 다른 논문을 읽고 있지 않은가? 현대 서구 문화에서 이것은 공상과학 여름 블록버스터의 단순한 줄거리가 아니다. 이것은 사회적 위기에 수반되는 질문들이다. 지구로 이주하는 외계인을 관리하는 정부 기관이야 아마도 없겠지만, 확실한 건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읽고 무엇을 믿어야 할지 확신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브루킹스 연구소 선임 연구원이자 잡지 애틀랜틱(Atlantic)의 기고 작가인 조너선 라우시는 이런 사회적 위기가 끝날 때라고 주장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객관적 사실을 확인하고 보호하며 촉진하는 사회적 계약의 회복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런 계약을 형성하고 보호하는 공동체는 “현실 기반 공동체”로 알려져 있으며, 증거에 근거한 사실을 추구하고 전파하는 데 전념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두터운 네트워크이다. 라우치는 이런 공동체가 “지식을 만드는 데에는 옳거나 그른 방법이 있다는 공유된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5). 이러한 현실 기반 공동체로부터 하나의 지식의 헌법(Constitution of Knowledge)이 나오게 되며, 그것은 대중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의 기본 합의가 되는데, 그 결과 대중적 담론에 필요한 조건이 형성된다. 



The Constitution of Knowledge: A Defense of Truth(지식의 헌법)

조너선 라우시



그릇된 정보. 고의적 논쟁, 악의적 선동. 음모. 소셜 미디어를 통한 집단 공격. 캠퍼스의 편협함. 표면적으로만 봐서는 최근 일상 어휘에 추가된 이런 용어 사이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말은 우리를 인식적 위기로 몰고 가고 있다. 사실과 허구를 구별하고 거짓보다 진실을 높이는 미국의 능력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다. 


이 획기적인 책에서 조너선 라우시는 18세기 자유 민주주의와 과학 발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가 “지식의 헌법”이라고 부르는 것, 즉 불일치를 진실로 바꾸기 위에 필요한 사회 시스템을 설명한다. 


지식의 헌법을 설명하고 현실과의 전쟁을 조사함으로써 라우시는 진리의 옹호자라면 무엇을 보호해야 하는지, 왜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제공한다. 라우시의 이 책은 모든 미국인이 러시아만큼 멀리 있는 동시에 휴대폰처럼 바로 곁에 있는 위협으로부터 객관적인 진실을 방어하고 자유로운 탐구를 도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포괄적이고 읽기 쉬운 설명이다.


BROOKINGS INSTITUTION PRESS. 280 PP.


현실 기반 공동체 


라우시에 따르면, 이런 공동체는 진지한 사고를 추구하는 모든 지적 분야에 존재하며 “현실 기반”이라는 지식 표준에 대한 책임을 자신과 다른 구성원의 작업에 일관되게 적용함으로 진리 추구라는 대의에 기여한다. 이것은 경험주의 회복이라는 계몽주의에 그 직접적인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국 철학자 찰슨 샌더스 피어스(Charles Sanders Peirce)와 그의 “실용주의”에 크게 의존하는 라우시는 가짜 지식을 실제 지식에서부터 구분하는 것이 반증의 원리(principle of  falsification)라고 주장한다. 충분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추론하려는 모든 사람을 궁극적으로 설득할 수 없는 주장은 현실 기반 공동체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현실 기반 네트워크는 생태계처럼 작동한다. 검증된 명제의 생산과 관련해 인간이 그 구성에는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겠지만, 통제는 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현실로 받아들이는, 현재로서는 최선의 실재(reality)이다”(87).


따라서 지식의 헌법은 언론을 보호하고 악의적 행위자를 걸러내며 진리에 대한 특권적 주장을 방지한다. 따라오는 질문은 이것이다. 그럼 그런 현실을 가능하기 위해서 우리는 누구를 믿을 수 있는가? 라우시의 이 책은 현실 기반 공동체에 대한 선언문이다. 라우시의 비전에서 인식론적 왕국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객관성, 오류가능성(fallibilism), 그리고 불일치 및 기타 근본적인 인식론적 주장(commitments)을 고수하고 방어할 책임을 가진다. 


양극화를 넘어선 미래


라우시의 현실 기반 공동체는 진짜 좋은 것을 성취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공동체는 권위를 희석하는 인터넷의 폭정에 단호히 반대하며, 당파적 약속이나 수익성을 노리는 조회수 미끼가 진실을 가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인기와 반직관적인 관점만을 근거로 누군가를 괴롭히고 처벌의 대상으로 만드는 취소 문화(cancel culture)에 대한 최후의 방어선이기도 하다. 


부정적 인식론과 집단 사고에 대한 열정적 주장으로서, 라우시의 이 책은 압도적이고 설득력 있으며, 알고리즘과 엘리트주의를 초월한 미래가 가능하다는 희망을 자극한다. 


지식의 헌법이 다루는 문제는 위기 식별이 아니라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 제안이다. 라우시에게서  건전한 인식론 현장의 본질인 실용주의는 심각한 상상력의 빈곤으로 고통 받고 있다. 그는 진리, 선, 아름다움과 같은 가장 근본적인 질문 또한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그다지 인식하거나 염려하는 것 같지 않은데, 그건 아마도 현실 기반 공동체가 다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실제로 그가 쓰는 “현실 기반”이라는 용어는 잘못된 이름으로 드러나고 있다. 


더욱이, 학력주의(credentialism)와 대중 지식의 문지기로서의 전문가 합의의 중요성에 대한 라우시의 강조는 그를 대중의 신뢰뿐 아니라 제도적 무결성의 위기, 그리고 현재의 사건으로부터도 크게 동떨어진 사람으로 만든다. 


실용주의로는 충분하지 않다


라우시는 현실 기반 공동체의 승리를 독단주의에 대한 경험주의의 승리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현실 기반 공동체의 핵심 가치는 정의(definition) 상 신이 있을 여지뿐 아니라 기적 또는 초월적 사건도 배제한다. 라우시는 이러한 의미를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사실 대 진실이라는 이분법을 제안하며 이를 막으려 한다. 진리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도덕적 실체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진실을 말할” 자유가 있다. 대조적으로 사실은 아홉 가지 인식론적 약속으로 판단할 수 있고 또한 판단되어야 하는 현실에 대한 진술이다. 라우시에 따르면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것은 진리의 영역을 떠나 사실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라우시는 핵심 섹션에서 “지식의 헌법이 공적 지식의 영역에서는 최고가 되어야 하지만 사적 믿음의 영역에서는 그렇지 않다”라고 썼다. 


비유하자면, 미국 헌법은 미국 중앙 정부에 대한 규칙을 설정하지만 가족을 운영하고, 자녀를 가르치고, 커뮤니티를 조직하거나, 우리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규칙은 명시하지 않는다. 헌법은 단지 헌법이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는 본연의 능력을 훼손하지 않고 지지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행동할 것을 요구할 뿐이다…. 같은 방식으로 지식의 헌법은 개인이 여러 종류의 개인적 신념을 자유롭고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는 인식론적 틀을 만든다(115).

바로 여기에 라우시 접근 방식이 갖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첫 번째 문제는 그의 방식이 이미 과거에 시도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의 과학과 종교에 관한 유명한 주장인 “비중첩 교도권”(non-overlapping magisterial, 역자 주: 종교는 ‘왜’라는 질문에, 과학은 ‘무엇’과 ‘어떻게’라는 질문에 각각 대답을 주는 고유의 영역을 갖고 있다는 제이 굴드의 핵심 사상 중 하나)을 접한 사람이라면, 현실 기반 공동체에 대한 라우시의 비전에서 동일한 느낌을 받아야 한다. 무신론을 주장하지만 상대적으로 존경받는 굴드의 책 ‘시대의 암석: 충만한 생명 속의 과학과 종교’(Rocks of Ages: Science and Religion in Fullness of Life)은 1999년에 출판되었다. 그의 주장은 과연 얼마나 설득력 있는가? 그로부터 7년 후인 2006년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을 출간했다. 이 책은 개인 차원으로 믿는 종교적 신앙까지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그 어떤 다른 책보다 큰 영향을 끼쳤다. 


굴드와 라우시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도킨스가 이해하는 것은 종교적 계시라는 주장이 결코 삶에서 동떨어져 어느 경건한 구석에 갇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도킨스는 종교를 지적 삶의 주변부로 격하하려는 노력은 아무리 미소를 지으면서 하려고 해도 될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라우시의 사실 대 진실 이분법은 철학적으로도 건전하지 않지만 정치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 미국 헌법이 그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종류의 개인적인 신념”을 허용한다는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가 이렇게 말한 건 헌법이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수용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알려주기를 거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분명히 사실이 아니다. 정치 시스템은 단순히 효율성의 네트워크가 아니다. 정치 시스템은 인간의 타고난 타락에 대한 확신을 반영하고 있으며(권력 분립을 하는 이유), 악을 통제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으며(강제적 법 집행 메커니즘이 필요한 이유), 또한 공정성과 공평성의 선함도 인지하고 있다(법원의 존재 이유). 또한 미국의 경우에 모든 인간 속에 신의 형상이 있다고 확신한다(생명, 자유, 행복에 대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주장하는 이유). 그러나 이러한 믿음 중 그 어느 것도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다. 그것들은 철학적이고 종교적이며, 라우시 자신의 인식론적 범주에 따르면 지식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학력주의로는 충분하지 않다


라우시 주장의 두 번째 큰 문제는 현실 기반 공동체가 비현실에 굴복할 가능성에 대해 이상하게 침묵한다는 점이다. 라우시의 이 책 대부분이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 쓰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럼에도 책 속에 지난 2년 동안 공중 보건 공무원이 시민을 이끌거나 계몽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방식에 대한 의미 있는 논의가 없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수많은 논평가들이 지적했듯이, 팬데믹은 라우시가 자주 찬양하는 제도와 학력주의의 실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학력주의 형태의 공공 지식 시장이 궁극적으로 자체 수정이 가능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이 옳을 수 있겠지만, 그러한 자체 수정의 비용은 그의 생각에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현실 잊기


‘맨 인 블랙’은 반전으로 끝난다. 비밀과 고독 속에서 보낸 세월에 지친 K 요원은 J 요원에게 기억을 지워달라고 요청한다. 그에게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을 잊는 것이다. 나는 서구 사회가 기억을 지우고 싶은 이 K 요원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의 자율성과 표현적 개인주의 감각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를 더 큰 존재에 우리 존재를 묶게 하는 현실에 관한 모든 것을 잊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잃어버린 기억은 대체되어야 한다. 결국 내가 아는 사실과 당신이 아는 사실의 차이가 빚어내는 인식론적 위기는 세속화의 불가피한 결과이다.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진리 상태에 관해 경고를 했다는 점에서 조너선 라우시는 바른 일을 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현실 기반 공동체는 실용주의자의 기계 같은 것이다. 현대 사회와 진실에 대한 확고한 신뢰 사이에 서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어떤 과학적 또는 기술 관료적 전략도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며, 또한 전문 분야에 관한 대중의 신뢰 상실이 단지 도널드 트럼프나 트위터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도덕적 추론 방법의 실용적 부재는 지식 헌법이 정작 진리 제공자 없이 진리를 찾기 위한 또 하나의 장황한 시도로 끝나지나 않을까 우려하게 한다. 



원제: My Facts Versus Your Facts: Can We Really Know Truth? (Review: ‘The Constitution of Knowledge’ by Jonathan Rauch)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결국 내가 아는 사실과 당신이 아는 사실의 차이가 빚어내는 인식론적 위기는 세속화의 불가피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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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Samuel James

사무엘 제임스는 크로스웨이 출판사 편집자이며, Insights에 글을 기고하는 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