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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우리는 왜 혼자 있지 못할까?
by Greg Morse2022-02-14

하나님은 한낮에 우물에서 홀로 물을 긷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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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기운이 내 마음을 스친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몇 년 동안 익숙했던 방인데 갑자기 낯설어진다. 정적, 고요함이 모든 것을 부자연스럽게 만든다. 마치 벽에 걸려 있는 사슴머리 박제 같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지만, 미동도 없다.


겨우 고요함에 익숙해졌는데, 사방에서 산만함이 밀려온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기도를 시작한다. “이 도시에서, 저의 삶 가운데서 당신의 이름을 높이소서.” ‘그런데 발은 왜 이렇게 차지?


양말을 신고 돌아와서 다시 무릎을 꿇는다. ‘어디까지 했더라?


그렇지….’ “내 삶 가운데서 당신의 이름을 높이소서, 주님, 그리고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잠깐, 무슨 소리지? 애들인가? 지금 몇 시지? 그럴 리 없는데.’


거실을 내려다보다가, 두서없이 꽂혀 있는 책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거룩’을 다시 한 번 읽어 봐야겠군. 아마존이 책 모서리에 이런 흠집을 내서 배송하다니 또 짜증이 올라오네. 그때 바로 반품했어야 했어. 택배, 택배라, 어제 올 게 있었는데? 뭐였더라.


고독으로부터 도망가다


최근 들어 혼자 있는 게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몇 시간이 지나도 눈에 띄지 않고 보낼 수 있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고독의 공간은 활동으로 가득 찬 삶에 희생되고 말았다. “묵상 시간”(quiet times)이 더 힘들어졌다. 돈 바꾸는 사람들이 이제 나의 기도하는 집에 앉아서 소란스럽게 비둘기와 가축을 흥정하고 있다. 더 나쁜 건, 내가 그들을 불러들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왜 그랬을까?


블레즈 파스칼은 구원받지 못한 세상이 침묵을 싫어하는 이유를 매우 잘 설명한다. “산만함: 죽음과 비참과 무지를 고칠 수 없는 인간은, 행복해지려고, 이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Christianity for Modern Pagans, 170).” 


파스칼은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 그들의 창조주에게서 도망치는 것을,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들 자신에게서도 도망치는 것을 본다.  


이 세상은 분주하게 소용돌이치고, 타락한 인류는 고요함 가운데에서 만나게 되는 불만스러운 생각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쫓아 분주히 움직인다.


이렇게, 인간은 끔찍한 자기인식, 곧 아담의 자손은 시한부 환자라는 반갑지 않은 진실을 회피하려고 소란에 자신을 맡기고, 자신이 피조물로서 죽어가고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또는,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쓸모없는 가지처럼 곧 불에 던져져서 불타버릴 존재라는(요 15:6) 생각을 애써 피하려고 이 생에서 헛된 것들을 분주하게 쌓아올린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자주 말했듯이, 인간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서 조용히 머무르는 법을 모른다는 사실이다”(172). 


침묵을 위협하는 것들


하지만 물론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한낮에 우물에서 홀로 물을 긷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셨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현실을 말씀해 주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기서 또한 생명의 물이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 정적 가운데서 떨기나무가 우리 영혼 앞에서 타올랐고, 우리는 그의 목소리에 깨어지고 치유되기 위해 신을 벗었다.


그리고 이제 이것은 패턴이 되었다: 매일 묵상의 시간(quiet times)에 하나님과 만나는 기회를 가진다. 일기장을 채운다. 말씀을 밑줄이 친다. 하나님께 아뢰며 기도한다. 눈물을 흘린다. 찬양의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천천히 해야 한다. 조심하지 않으면, 유익한 부분, 꼭 필요한 것, 조용한 공간을 잊게 된다. 저 전원의 경건―녹색의, 생명이 있는, 과묵한―이 금속과 기계와 소란의 도시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하나님과 함께 독거(獨居)하고자 하는 내 갈망을 위협하는 세 가지 위험이 있다. 


첫째, 친근한 세상


내 방 바깥의 세상이 두 손을 벌리고 서서 나를 초대할 준비를 하고 있다. 존 번연은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의 여정을 ‘허영의 시장’(Vanity Fair)을 헤쳐 나가는 길로 묘사했다. 그렇다. 내 방 바깥의 세상도 ‘허영의 시장’이다.


내가 “분주함”이라고 불렀던 것 가운데 어떤 것―경력 쌓기, 배우자 찾기, 행복 추구하기―을 예수님은 “세상의 걱정거리” “부의 속임수” “다른 것들에 대한 욕망”에 빠지는 것이라고 부르셨다. 이러한 것들이 나의 삶에서 말씀을 가로막으려고 위협할 때, 내 삶의 선물들마저도 가시가 되어 버린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들이란 달리 이런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그 밖에 다른 일의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막 4:18-19).

극심한 박해의 손아귀만이 하나님의 진리를 가로막는 것이 아니다. 아메리칸 드림과 같은 부드러운 손길도 그렇게 한다.  


나는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요한일서 2:15).

이 말씀 앞에 마주서야 할 때도 있다. 


간음하는 사람들이여, 세상과 벗함이 하나님과 등지는 일임을 알지 못합니까?(약 4:4).

이 말씀에 나를 비추어 봐야 할 때도 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해서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고(딤후 4:10).

그리고 나는 항상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시 90:14).

둘째, 얄팍해져 가는 영혼


내가 세상을 갈망할 때, 내가 너무 바빠서 하나님과 단둘이 있을 수 없을 때, 내 주머니 속의 세상이 성경의 세상보다 나를 더 끌어당길 때, 내 영혼은 “너무 많은 빵에 바른 버터처럼” 얄팍해지고 만다.


나의 약해진 갈망은 나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내 전화기로 향하게 한다. 나는 요나를 따라 테크놀로지의 다시스로 간다. 그리고 여러 번 항해를 하다 보면 출항은 할수록 쉬워지고 예전처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은 갈수록 어려워진다. 내 영혼은, 무언가를 잡으려고, 나를 즐겁게 해 주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얻으려고 조바심을 낸다. 짭조름한 간식에 손이 가면 갈수록, 진수성찬을 음미하지 못하게 된다.


셋째, 시들어 버린 믿음


은혜의 수단에서 멀어지면 신앙이 상처를 입는다. 묵상의 방에 돌아오니, 이런 의심이 올라온다. “이게 전부 사실일까?” 이런 생각에 맞서, 나는 믿음의 방패를 들고 처음의 불편함을 견뎌내야 한다.


차가운 발을 따뜻하게 하면서, 나는 기도를 이어간다. “주님, 오늘 저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저에게 죄 지은 자를 제가 용서해 준 것 같이, 저의 산만하고, 무지하고, 세속적인 많은 잘못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네 기도를 듣고 있다고 확신해?’ 이런 생각이 올라온다. ‘시간마다, 날마다, 해마다 기도해 봤자 아무 소용없을 거야, 전부 사실이 아니라면.’ 


“주님,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산만해지지 않게 지켜 주시고, 다만 이런 것들과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그 묵상의 방에서, 나는 차가운 세상에서 다시 아버지 앞으로 돌아온다. 


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간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는 나의 믿음을 점검하는 시간이다(히 11:6). 


하나님이 계시지 않거나 우리를 만나주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소중한 시간을 꿈과 그림자에 낭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차단하고 의심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을 찾을 때, 우리는 이렇게 외친다.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과 함께하길 원합니다.”


다시 돌아오겠는가?


우리의 생명이신(골 3:4) 그분이 우리를 바쁘고 시끄러운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실까? 엘리야에게 그리하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그리하신다.  


크고 강한 바람이 주님 앞에서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바람 속에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바람이 지나가고 난 뒤에 지진이 일었지만, 그 지진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가고 난 뒤에 불이 났지만, 그 불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불이 난 뒤에,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왕상 19:11-12).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음성, 세미한 침묵”(a voice, a thin silence)으로 당신을 드러내셨다. 하나님은 천둥을, 찢어지는 바람을, 지진을, 활활 타오르는 불을 마다하시고, 조용한 방에서 당신의 말씀과 영으로 우리에게 속삭이시는 것을 좋아하신다. 우리가 기도의 골방에 홀로 앉아 세상과 세상의 산만함을 차단하고, 우리와 만나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과 다시 앉을 수 있을까?



원제: Desperate for Distraction: Why We’re Bad at Being Alone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장명근

하나님은 천둥을, 찢어지는 바람을, 지진을, 활활 타오르는 불을 마다하시고, 조용한 방에서 당신의 말씀과 영으로 우리에게 속삭이시는 것을 좋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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