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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깎아내리려면, 이렇게 하라
by Trevin Wax2022-02-01

탈기독교 사회로 변해 가고 있는 우리 사회이다 보니, 기독교 인간관, 곧 인간성의 복합성을 고려하고, 심지어는 그런 복합성을 기대하기까지 하는 인간 이해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도 놀랄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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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 때로 기억한다. 내가 읽던 NIV 어드벤처 바이블(NIV Adventure Bible)에는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의 목록이 도표로 나열되어 있었는데, 그 도표에는 각 왕의 재위 기간과 행적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그 도표 오른 쪽 칸에는 “선한 왕” “악한 왕” “대체로 선한 왕” “대체로 악한 왕”이라는 평가가 매겨져 있었다. 예를 들어, 아사 왕이 “대체로 선한 왕” 범주에 들었던 것 같다. 아사 왕이 왜 “대체로 선한 왕”이었는지 더 알고 싶은 마음에 나는 성경을 폈고, 그가 어떻게 말년에 주님과의 관계에 실패했는지 알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요즘 우리 사회에서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 4학년 수준의 범주로 퇴행하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 십자군의 열정으로 의를 내세우며 그렇게 할 때도 있다. 


탈기독교 사회로 변해 가고 있는 우리 사회이다 보니, 기독교 인간관, 곧 인간성의 복합성을 고려하고, 심지어는 그런 복합성을 기대하기까지 하는 인간 이해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도 놀랄 일은 아니다. 


이러한 인간 이해 대신에, 우리는 성급하게 사람을 “악한 사람” 또는 “선한 사람”이라는 범주로 나누고, 또 이 범주에 따라 사람을 대한다.


그 결과는 어떤가? 교회에서조차도(우리도 알 때가 됐다), 같은 사람 안에 있는 선한 면과 악한 면을 분별하거나, 어떤 주의주장 안에 옳은 면도 있고 그른 면도 있다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관심과 배려, 다름에 대한 넉넉한 자세가 없다면, 우리 이웃을, 과거의 이웃이든 현재의 이웃이든, 경직된 범주 안에 넣어 일차원적으로 판단하기 쉽다. 그리고 이는 곧 기독교 인간학을 포기하겠다는 자세다. 바로 이런 식으로 말이다. 


1. 사람이나 일을 “흑 아니면 백”으로 가른다.


모든 사회는 기념비를 세우거나 건물에 붙일 이름을 정하면서 어떤 덕목을 기릴 것인지 결정하게 된다. 내가 루마니아에 살 때 거리의 명칭이 바뀌는 것을 종종 보았다. 과거에 특정 개인에게 부여했던 명예가 지금도 적절한지 재평가하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최근 이루어진 역사적 인물에 대한 많은 논의가 사람을 ‘흑 아니면 백’의 양극단으로 나누는 함정에 빠져 버렸다. 런던에 있는 윈스턴 처칠의 동상이 갑자기 위협을 받고 있는 이유도 이것이다. 서구 문명을 나치즘의 위협에서 구해 낸 처칠의 용기는 무시하고, 인종에 대한 그의 태도와 그에 따른 행동이 혐오스럽다는 것이다. 에이브러햄 링컨 또한 노예제 폐지론자로서 그가 보여 준 감수성보다는 연방제에 대한 헌신이 앞선 사람이었으며, 결코 흑인 평등의 투사는 아니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비슷한 성급함은 종교적인 논의에서도 나타난다. 일부 진보적인 그리스도인은 최근 신학을 따르지 않거나 정치적 입장이 자신과 맞지 않는 목회자나 신학자에게서 배우기를 거부한다. 그가 개인적으로 얼마나 경건한 사람인지, 얼마나 성경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신학적인 도움을 주는지는 상관없이 말이다. 반대로 보수적인 그리스도인은 존경받는 성경적인 설교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과거에 인종정의를 주창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서적을 무시해 버리거나 그가 강연하는 콘퍼런스에 대한 불참운동을 벌인다.


신학교 시절 한 교수님이 우리와 다른 진영에 있는 신학자의 책을 몇 권 추천해 주신 적이 있다. 그때 한 학생이 그 신학자는 “악한” 범주에 있는 신학자라면서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그 교수님은 이렇게 답변했다. “나도 자네가 말한 대로 그 신학자가 틀릴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하네. 그리고 그의 견해 일부는 문제가 있지. 그러나 어떤 영역에서 그의 견해는 너무나 유익해서 그의 글을 읽지 않는다면 자네는 빈곤해질 것이네.”


이웃을 깎아내림으로써 스스로를 빈곤하게 만들지 말도록 하자. 성급하게 ‘흑 아니면 백’으로 나누는 것은 분별이 아니라 적대이다. 사실 이것은 거짓에서 참을, 악한 것에서 선을 분별하지 못하게 막는, 의로운 열심을 가장한 매우 끔찍한 자세이다. 어떤 영역에서 누군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폄하할 때, 당신은 이웃을 깎아내리고 당신 자신의 영혼을 빈곤하게 만든다.


2. 사람과 동기를 동일시한다.


이웃을 일차원적으로 깎아내리는 두 번째 간단한 방법은, 사람의 선을 그들의 성품이 아니라 그들의 동기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 논의를 위해 잠시 사람을 간단하게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으로 나누어 사고실험을 해보자.


이렇게 생각해 보라: 선한 사람도 악한 동기에 이끌릴 수 있고, 악한 사람도 선한 동기에 이끌릴 수 있다.


온갖 덕을 베풀며 진정으로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악한 일을 도모하는 일에 전혀 현혹되지 않을까? 반대로, 성령의 열매가 거의 보이지 않는 기회주의자는 선한 일에 전혀 앞장설 수 없는 것일까?


우리 역사에는 선한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심각한 결함이 있는 일에 연루되어 유익보다는 해를 끼친 사례로 가득하다. 반대로 사사로운 이득이나 자신의 이익과 관련하여 (또는 상응하는 이익은 없을지라도 단지 신념 때문에) 그 내면은 죄로 어두울지라도 결국 의로운 동기에 기울어지는 사람도 찾아볼 수 있다.


로버트 카로(Robert Caro)의 대작, 린던 존슨 대통령(Lyndon B. Johnson) 전기를 보고 나서 “이 사람은 대단한 확신을 가진 훌륭한 사람이군”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정치인으로서 의심쩍은 부분이 많다 하더라도 미국인을 위한 시민권의 진보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반대의 사례도 존재한다. 교회 역사를 통틀어 남녀를 불문하고 훌륭한 성품과 위대한 신념을 보여 주고, 정치적으로 신학적으로 반대 진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오류를 키우고 불의에 가담한 경우도 있다.


누군가가 혹 우리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연루되었거나 오류가 있다고 생각되는 신학을 지지하더라도 그가 모범적인 미덕을 보인다면 우리는 그를 존경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과거 영웅들을 이상적으로만 보는 것을 피해야 하는 이유이다. 제아무리 진리의 진보를 이루는 데 쓰임 받은 위대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다른 면에서 오점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3. 선행을 선과, 악행을 악과 동일시한다. 


이웃을 일차원적으로 깎아내리는 간단한 방법은 당신 스스로가 전지전능한 사람인 척하며 다른 사람의 의도와 동기를 판단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인간관은 우리가 얼마나 표면 아래는 보지 못하는 사람인지를 되새겨 준다. 


소설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 준다.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매춘부 팡틴의 행동을 피상적으로 볼 때는 “이 여자는 밤의 여인이야. 나쁜 여자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넓은 관점에서는, 한 젊은 여인의 순진함, 그녀가 겪는 부당함, 소리 없는 절망(그녀는 자신의 딸을 돌보고자 하는 선한 충동 때문에 어둠 속으로 내몰렸다)을 볼 수 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의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드미트리가 자신에게 수치심을 안기고 매우 형편없이 구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곁에 있기 위해 필사적으로 헌신한다. 그녀의 행동을 보며 “자기희생의 표본이군”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드미트리의 동생 이반이 그녀를 꿰뚫어 보고 폭로한 바에 의하면, 그녀가 순교자적 희생양 역할을 자처한 것은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녀는 드미트리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참을성 있고 덕망 있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사랑한 것이다.


기독교의 인간관은 예수님께서 정죄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과 연결된다.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없다. 그저 사람의 행동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행동마저도 사람의 마음을 다 담아 내지 못한다. 일반은총이 있기에, 하나님께 대적하는 사람들일지라도 그의 자녀에게는 좋은 것을 주고자 한다(마 7:11-12). 반대로 죄의 편만성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의로운 사람이라도 그가 고백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삶을 살 때도 있다.


사랑할 것인가 깎아내릴 것인가


예수님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의 열풍이 불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기준을 정작 우리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다. 당신 자신을 한 번 보라. 모순투성이인 데다, 눈에 띄지 않는 방법으로 잘못을 저지르며, 흠이 있고 자주 실패한다. 그렇지만 온갖 복합적인 상황에 둘러싸인 당신을 누군가가 단순히 “선한 사람” 또는 “악한 사람”의 범주에 넣고 판단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존경하는 영웅이든 당신의 논쟁 상대이든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당신이 바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대해야 한다. 다시 말하건대, 당신의 이웃을 깎아내리지 말라. 



원제: 3 Simple Ways to Flatten Your Neighbor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염영란

당신이 존경하는 영웅이든 당신의 논쟁 상대이든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당신이 바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대해야 한다. 다시 말해 당신의 이웃을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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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Trevin Wax

트레빈 왁스는 LifeWay Christian Resources의 신학과 커뮤니케이션학과의 부학장이며 Wheaton College의 외래 교수이고, The Gospel Project의 편집자이다. '디스 이즈 아워 타임', '일그러진 복음', '우리시대의 6가지 우상', 'Gospel Centered Teaching'을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