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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복음을 지킬 것인가,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by 김정우2021-12-21

좋은 영적 공동체라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음을 우리는 늘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특별히 지도자의 ‘외식’이 미치는 영향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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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 라틴어 문자 그대로는 ‘좋아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뜻인데, ‘외교상 기피하는 인물’이라는 외교 용어로 사용된다. 유대인에게는 이방인이 ‘페르소나 논 그라타’ 곧 기피 인물이었다. “주여,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게 하신 것에 대해 감사하나이다.” 유대인 남자는 아침에 일어나면 늘 이렇게 기도했다. 


베드로가 안디옥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방인 신자들과 식탁 교제도 가졌다. 베드로는 더 이상 과거의 베드로가 아니었다. 백부장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기 전후로 바울을 나눌 수 있다면, 이제 그는 이후의 베드로였다. 더 이상 이방인을 불결하게 여기지 않게 된 베드로였다. 자연히 그는 이방인 그리스인의 중심지인 그곳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어울려 함께 먹고 마셨다. 어쩌다가 한번 그렇게 했던 것이 아니었다.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갈 2:12). ‘먹다’라는 헬라어 동사는 미완료형이다. 헬라어 문법에서 계속적인 행동을 뜻할 때 사용하는 동사형이다. 베드로는 이방인과 함께 먹는 것에 익숙했고,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으며, 그래서 이방인들과 ‘계속’ 식탁 교제의 자리를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온 할례 받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들이닥쳤다. 베드로는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하고 있는 그 식사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떠났다. 안타깝게도, 베드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의식했다. 그에게는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베드로는 할례자들의 비난을 두려워했고, 또 그들과의 갈등도 원치 않았다.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다녀온 후 할례자들에게서 받았던 비난이 생각났는지도 모른다(행 11:2). 베드로는 비난받는 것이 싫었을 것이다. 인정받는 사도로 남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내 설교를 듣고 회심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자신의 명성에 조금이라도 흠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베드로, 교회의 반석으로 남길 원했을 것이다. 


이방인과 한자리에서 식사하는 것이 본심으로는 더 이상 거리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베드로는 여전히 자기 밖에 있는 눈, 자신을 바라보는 유대인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는 복음의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베드로는 그 진리를 따라 행하지 못했다. 존 스토트는 안디옥에서 베드로가 보인 이 행동을 이렇게 설명했다. “여종을 두려워하여 주님을 부인했던 바로 그 베드로가 이제는 할례주의자들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복음의 진리를 믿었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한순간에 외식하는 유대인 게바, 유대인의 가면(페르소나)을 쓴 베드로가 튀어 나오고 말았다.


더욱 심각한 사태는 지도자 베드로의 행동이 끼친 파급 효과였다. 다른 유대인들도 베드로를 따라 외식했고, 심지어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넘어갔다. 그 자리에 황망히 남게 되었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심정을 또 어떠했을까. 칼뱅은 베드로의 외식이 미친 영향을 세 가지로 풀이했다. “첫째,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중간 벽을 다시 세움으로 둘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인식이 심겼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빛을 흐리게 함으로 사람이 만든 규례와 인습에 더 주목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셋째, 유대인들의 마음을 더 굳게 하여 그릇된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


무슨 일을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복음의 진리 앞에 솔직하게 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말이나 행동이 미칠 영향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보다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이 훨씬 쉽다. 좋은 영적 공동체를 세우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세워진 좋은 영적 공동체라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음을 우리는 늘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특별히 지도자의 ‘외식’이 미치는 영향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 대 관계


이제 사도 바울이 그렇게 행동한 베드로를 “대면하여”(갈 2:11) “모든 자 앞에서”(갈 2:14) 책망한다. 


베드로와 바울을 비교해 보자. 누가 믿음의 선배요 교회의 선임인가? 베드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베드로를 향해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것도 대면하여 공개적으로! 유대인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최고 지도자를 공개적으로 면박했으니 인간관계의 파국은 물론이고 교회의 질서를 훼손했다는 조직의 역공에 부닥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에게 이것은 ‘참된 복음’ 대 ‘다른 복음’의 투쟁, 본질이 걸린 문제였다.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침묵하거나 흘려버릴 사안이 아니었다. 인간관계, 사회 질서, 교회위계를 고려하여 판단할 문제가 아니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비위도 맞추고, 안디옥 교회의 지지도 유지하려면, 다른 사도들(전부 선배다)과 좋게좋게 지내는 게 좋은, 좋은 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름 받았지만, 사도 공동체의 인정과 신임과 지지도 중요했던 바울 아닌가. 긴장하고 대립할 수 있는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 공동체 및 그 공동체의 “기둥들”과 “친교의 악수”까지 나눈 마당에(갈 2:9), 여기서 눈 한번 질끈 감아 주면 “좋게” “융통성 있게”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매몰 비용의 오류”(sunk Cost Fallacy)라는 경제학 용어가 있다. 나쁜 방향으로 흘러갈 걸 뻔히 알면서도 잘못된 결정을 되돌리지 못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지금까지 투자한 시간과 노력, 들인 비용이 아깝기 때문이다. 바울은 어떤 것을 묻어두고 갈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어느 쪽을 포기할 것인가? 예루살렘 공동체와 그간 쌓은 친교 관계를 위험에 빠트릴 것인가? 아니면, 이방인에게 전한 복음의 진리를 훼손할 것인가? 


바울은 과감히 전자를 묻어 버리는 쪽의 위험을 택한다. 사람들을 좋게 하는 쪽을 택하지 않았다. 복음의 진리를 지키는 쪽을 택했다. 하나님께 좋은 쪽을 택했다. 나중에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그랬듯이, 안디옥에서도 바울은 동일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갈 1:10).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가 왜곡되는 것만은 가볍게 넘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베드로와의 사이에서 있었던 오래 전 일을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이 편지에서 꺼내 놓는 것도 동일한 이유였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다니요!”(갈 1:6). 갈라디아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도, 베드로가 보인 행동의 변화도 바울에게는 ‘사소한 차이’가 아니었다. 


‘속삭이는 사람들’이라는 말이 있다. 역사학자이자 런던대학교 교수인 올랜도 파이지스(Orlando Figes)가 저술한 <속삭이는 사회>(교양인 역간)에 나오는 표현이다. 스탈린 통치 하에 살던 소련의 평범한 개인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살아남기 위해 침묵해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고난과 희생을 두려워해서 언제나 속삭이는 데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이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자칫 복음을 살짝 옆으로 밀쳐 내고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다. “다른 복음”에 침묵할 수 있다. 사역도 그런 식으로 할 수 있고, 친교도 그런 식으로 하는 걸 오히려 권장할 수도 있다. 문제가 없는 것처럼 지나는 것은 화평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를 피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다.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것은 사사로운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 베드로가 미워서 책망한 것이 아니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책망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두 경우 모두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쉽게 할 수 없는 방식을 결행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갈 4:16). 바울은 일시적인 관계의 단절이 발생하더라고 복음의 진리를 지키는 쪽을 택했고, 그것만이 허물어진 관계를 제대로 회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복음 외에는 허물어진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사도 바울은 확신했다. 다른 모든 시도는 그저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복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데 실상 이런 모순에 빠지는 게 우리다.     


에필로그 


이후의 전개가 놀랍다. 베드로는 바울의 책망을 받아들였다. 바울의 진심을 헤아렸기 때문이다. 시간이 꽤 흐르고 베드로는 바울을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벧후 3:15)라 부른다. 자신에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 사람으로 바울을 내내 기억하고 있었다면 베드로는 그를 “형제”라 부르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존 파이퍼의 말을 빌리면, “복음과 더불어 다시 사랑에 빠지면” 관계는 무너지지 않는다.  

복음 외에는 허물어진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사도 바울은 확신했다. 다른 모든 시도는 그저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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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정우

김정우 목사는 동산교회(서울 신림동) 2대 목사로 섬기고 있다. 연세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B.A.)을 공부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미국 미시간주 칼빈 신학대학원에서 신약학과 기독교윤리학을 전공했고,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 낙스 칼리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TGC코리아와 CTC코리아 이사로 한국 교회의 내일을 위해 섬김을 다하고 있다. 저서로 <갈라디아서를 처방합니다>(두란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