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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함의 힘
by 김형익2021-12-16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에게 정복당한 포로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승리하는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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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한 인간이 힘과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약함보다는 강함을 추구한다. 실패보다는 성공을 추구한다. 온갖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세상의 정치와 경제는 결국 힘과 권력을 추구하는 본성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복음은 이런 자연인의 성향을 구속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받은 신자는 자연인의 성향을 거슬러 살기 시작한다. 그래서 복음은 역설이다. 거스르는 삶, 역생(逆生)이다. 힘과 권력을 추구하는 자연인의 성향에서 구속받은 신자는 이제 약함과 실패에 기뻐한다. 약함과 실패를 오히려 자랑하는 기이함을 드러낸다. 이것은 세상의 눈에는 낯설기만 한 것이다. 이 일은 “우리는 신자니까 이제부터는 약함을 자랑해야 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 신자들은 이 일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에게 일어나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복음의 약함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에서 표적을 중시하는 유대인이나 지혜를 숭상하는 헬라인에게 복음은 거리끼고 미련한 것이라고 말한다. 유대인은 우주적이든 사회적이든 정치적이든 증명하는 표적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도 메시아 되시는 표적을 그토록 끈질기게 요구했다. 고대 헬라철학은 헬라인이 얼마나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인지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복음은 그들이 생각하는 근거 위에서 주어지지 않았기에, 그들에게는 거리끼고 미련한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복음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주일 뿐 아니라 만유의 주요 통치자로 믿기 때문이다. 


복음은 처음부터 그리스-로마 세계의 가치관에 적합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힘과 권력, 승리와 성공을 원하는 세상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승산이 없는 일이다. 심지어 바울 사도는 자신의 수고로 세워진 고린도 교회에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여 지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전 2:3)고 말한다. 당대의 카리스마 있는 전문적 선생들처럼 회중을 압도하는 방식으로 행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는 자신의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승부를 보려고 하지 않는 대신 성령의 능력을 의지했다(고전 2:4-5). 성령의 능력은 자신이 가진 능력 여하에 좌우되지 않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날 때 인간 능력의 크고 작음은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 능력을 자랑하지도, 능력 없음으로 주눅 들지도 않는다. 


승리주의 성경오독


복음은 힘과 권력, 승리와 성공을 바라는 이들에게는 미련해 보인다. 더구나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교회가 세상의 권력과 가까워지고 국가권력을 등에 업기 시작하면서 복음과 성경의 메시지를 비트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승리주의 성경오독은 이후 1500년이 넘도록 서구 기독교를 지배해 왔다. 승리주의 정신은 교회와 국가권력의 유대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기독교가 한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는 과정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한국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197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 발전과 함께 교회가 폭발적 성장을 경험하면서, 한국 교회는 승리주의의 망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복음이 가지는 역설의 힘은 점차 쇠퇴하였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는 공허한 낭만적 표현에 불과한 낡은 유물이 되고 말았다. 이에 발맞추어 등장한 현상이 기복신앙과 번영신학의 번성이다. 이것이 한국 교회에서만 일어난 독특한 현상은 아니지만,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이나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들 못지않게, 번영을 추구하는 이 나라의 소위 “기독교인”에게 십자가의 복음이 거리끼고 미련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 교회 안에서 승리주의 성경오독과 복음오해가 만연하게 되었다. 


승리주의 성경오독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의 하나가 고린도후서 2:14이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이 말씀은 로마의 대도시에서 볼 수 있었던 개선행진을 염두에 둔 설명이다. 맨 앞에는 전장에서 승리를 거둔 장군이 백마가 끄는 화려한 마차를 타고 행진한다. 그 뒤를 함께 전쟁을 치른 영웅적 군사들이 따른다. 그리고 행렬의 끝에는 전쟁에서 패해 사로잡힌 포로들과 전리품이 뒤따른다. 그 때 대로변에는 피워 놓은 향들이 거리를 진동했다. 바울 사도가 향기 진동하는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들어와 있다고 말했던 그것이다. 


문제는 바울이 어떤 자격으로 이 개선 행렬에 참여하는가이다. 승리주의 성경오독은 바울이 승리한 장수인 그리스도의 선두 마차에 나란히 서서 승리의 행진을 한다고 읽는다. 하지만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은 승리한 군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정복당한 포로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개선 행렬의 맨 끝에서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행렬을 따르는 패장과 포로들은 개선 행진이 마치면 원형경기장에 들어가 죽임을 당할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에게 정복당한 포로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승리하는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를 알리고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한다는 말이다. 


이어지는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는 포로들의 체취가 아니라 포로의 존재 때문에 빛나는 그리스도의 승리와 그 개선 행진을 경축하는 향기다. 신자는 힘과 권력, 승리와 성공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정복당한 포로로서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그리스도의 향기가 된다. 이것은 “나는 그리스도의 포로다. 그리스도가 나를 정복하셨다. 나는 그리스도께 항복했다. 그에게 붙잡혔다. 나를 정복하고 나를 굴복시킨 저 위대한 장수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는 고백이다. 내 인생은 그리스도께 붙잡혔고 그분께 정복당했으며 내 인생과 목숨과 모든 것이 그분께 달려 있다는 선언이다. 


이것은 세상과 육신의 방식을 거스른다. 성공과 부와 학식과 명예와 업적을 추구하고 그것을 성취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향기가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아는 향기가 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외적으로 성공한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듣는 많은 간증이 소위 성공한 사람들의 간증이다. 기도와 주의 도우심으로 성공했다는 그들의 진심을 의심할 필요는 없지만, 이것은 교회가 승리주의의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것은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의 복음의 영광을 가리고, 자신도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허영으로 형제들을 유혹한다. 여기에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계실 곳이 없다.   


약함의 역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의 결론부에서 진짜 간증을 들려준다. 그런데 간증은 기도응답의 간증이 아니다. 기도거절의 간증이다. 육체의 가시—바울을 괴롭혔던 사람들이거나 지병이었을 것이다—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 기도했지만 거절된 이야기다. 그의 간증에서 핵심은 간구를 거절하신 하나님의 설명이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사도는 이 설명의 의미를 알아들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절을 도리어 기뻐했고 자신의 약함육체의 가시를 포함하여을 자랑할 마음이 일어났다. 그 약함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문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고후 12:9-10). 여기에 복음이 보여 주는 약함의 역설이 있다. 


이 역설을 아는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할 수 있다. 신자는 자신이 약할 그때에 진정으로 강해지는 것을 안다(고후 12:10). 이 복음의 역설은 우리를 모든 열등감에서 자유하게 하고 모든 우월감에서 우리를 지켜 준다.


복음은 힘과 권력, 승리와 성공을 쫓는 사람들에게 거리끼고 미련해 보일 수밖에 없다.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섬기고 그를 따르며, 승리와 강함이 아니라 패배와 약함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고린도 사람들에게 다시 들려주는 복음은 약함을 자랑하게 하는 복음이었다. 이 복음 안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에게 머물고 그 능력이 역사한다는 사실을 체험으로 배웠다. 그래서 약함을 기뻐하고 심지어 자랑할 수 있었다. 


복음은 자기 잘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전하는 일이다. 인간의 잘남과 못남은 큰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약함을 인정하고 기뻐하고 자랑할 때, 거기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문다. 그리스도도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에(고후 13:4), 그렇게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 되셨기에, 이 복음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약함을 기뻐하고 그 약함을 자랑할 수 있다. 신자는 자신의 약함을 통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복음의 역설을 온전하게 드러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복음은 힘과 권력, 승리와 성공을 쫓는 사람들에게 거리끼고 미련해 보일 수밖에 없다.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섬기고 그를 따르며, 승리와 강함이 아니라 패배와 약함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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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형익

김형익 목사는 건국대에서 역사와 철학을, 총신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인도네시아 선교사, GP(Global Partners)선교회 한국 대표 등을 거쳐 지금은 광주의 벧샬롬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 ‘율법과 복음’, ‘참신앙과 거짓신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