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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요소수의 절실함, 그리고 기쁨
by 김돈영2021-12-08

귀한 요소수를 얻은 기쁨, 그러면 구원의 기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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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링, 띠링, 띠링∼ 부릉”

시동 거는 소리가 시원하다 못해 묵직하고 든든하기까지 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편하고 긴장된 마음으로 운전을 했는데 말이다. 요즘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있다. 바로 요소수다. 경유 차에 넣어서 배기가스를 분해하는 역할을 한다. 보통은 요소수의 존재 자체도 몰랐으나 소위 ‘요소수 대란’을 통하여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다. 품귀 현상으로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요소수를 좀 전에 가득 넣었다. 차량 계기판에 요소수 부족을 알리는 불이 들어와서 긴장하고 있었는데, 가득 채우고 나니 뭐라 말할 수 없는 평안함마저 든다. 아니 날아갈 것 같다. 정말 기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이 든다.


가는 곳마다 품절이라 구하기 어려운 요소수를 얻은 기쁨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느끼지 못할 것이다. 시동 걸 때마다 알람이 들어오고, 계기판에 있는 경고등을 보면서 언제 멈출지 모르는 차를 운전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 절박함이 없이는 절대로 맛볼 수 없는 기쁨이라는 것이다. 


씁쓸한 첫 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귀한 요소수를 얻은 기쁨, 그러면 구원의 기쁨은?”이라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구원의 기쁨’, 물론 누구도 구원의 기쁨이 없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을 듣는다면 멈칫할 것이다. 그 기쁨을 삶에서 누리고 있는가? 지금도 느끼고 있는가? 그만큼 구원의 기쁨은 현실과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안개와 같이 뿌옇고 추상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왜 구원의 기쁨이 없는가? 왜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가? 아니다. 이 질문이 더 와닿을 것 같다. 요소수에서는 왜 기쁨을 느끼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차가 멈출 수 있었는데 큰 문제가 해결되었다.’ 혹은 ‘구할 수 없는 귀한 것을 구했다.’ 앞에 던진 질문에도 답은 비슷할 것이다. 사실 이러한 대답은 결국 절박함, 절실함이라는 말로 귀결된다. 절실하게 원하는 것을 얻었기에 기쁜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우리는 절실함이 없다는 말이 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영원한 생명을 주신 구원의 은혜는 세상 무엇보다 귀한 것이다’라는 사실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그게 귀하고 중요한 것인지 모르기에 절실하지 않은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현실적인 질문을 해 보자. “당신에게 구원은 없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어떤 마음이 드는가? 물론 사람은 누구도 그런 말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그게 사실일 리도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선언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가정을 해 보자. 그 말이 사실이라고 말이다. 어떤 마음이 드는가?


큰일이라는 생각이 드는가? 마치 계기판에 요소수 경고등이 들어온 것처럼 불안한 마음이 드는가? 아니면 당장 변하는 것이 없기에, 지금과 별다를 것 없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는가?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피부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와닿지 않기 때문에 절실함이 덜한 것이다. 


결국은 구원이 현재 나의 삶에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말일 것이다. 구원이 삶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한 성경을 믿지 않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라고 말씀하신 약속과 그것을 어긴 첫 사람의 죄를 믿지 않는 것이다. 죄로 인해 영원한 죽음에 놓인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에 긴장감이 없는 것이다. 경고등을 보는 듯한 떨림이 없는 것이다. 마음에 긴장과 떨림이 없기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라는 말씀에 기쁨이 없는 것이다. 죄를 모르고, 죽을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데 구원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이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여전히 같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사는 것이다. 죽으면 하나님 나라에 갈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만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배와 찬양을 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지만, 그것이 삶에 투영되지 않는 것이다. 믿는 것이라 착각하며 사는 것이다. 야고보는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라고 말씀한다. ‘이만하면 잘 믿고 있어’라고 자신을 속이며 살기에 구원이 삶에 별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이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마 9:20).


마태복음에는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짐으로 그의 병이 나은 이야기다. 같은 내용을 다루는 마가복음에서는 이 여인의 상황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막 5:26) 12년이나 병을 앓고 있는 여인은 치료를 위해 많은 애를 썼다. 실력 좋다는 의사를 찾아다닌 것은 물론이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을 것이다. 때문에 재산은 모두 소진되었다. 성경은 모두 허비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병으로 인해 그는 고립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는 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몸에 유출병이 있으면 그 유출병으로 말미암아 부정한 자라”(레 15:2), 레위기는 유출병 곧 혈루증 환자는 부정한 사람이라고 말씀한다. 그가 누웠던 자리는 물론이고 앉았던 자리나 옷, 그릇, 만진 물건 등 혈루증 환자가 접촉한 모든 것은 부정한 것이 되었다.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은 사람이 지나간 모든 곳을 소독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섞여서 일반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사람이 없는 외곽에 살며, 가족과도 떨어져 혼자서 지낼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 있는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다. 소문을 들었다고 인파를 헤집고 예수님 앞에 가는 일은 ‘그냥 한번’ 해 볼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 앞에 서는 일 자체가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사람들과 접촉하며 인파를 뚫고 지나간다는 것은 더 큰 용기와 결단,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인 것이다. 만일 출근 시간에 코로나19 확진자가 지하철을 이용하겠다고 인파를 뚫고 지나간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마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신약시대 사람들이나 현재 우리나 별로 다를 게 없다.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예상되는 현실적인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결단해야 한다. 생각한 대로 일이 진행되어 병이 낫는다면 정말 좋은 결말,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야말로 대혼란이 일어난다. 요즘처럼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면 “오늘 예수님이 지나는 경로에 있었던 사람들은 혈루증 여인과 접촉이 의심되니 지금 즉시 몸을 씻고 저녁까지 격리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문자가 전송될지도 모른다. 그것으로만 끝날지 아니면 무언가 더 있을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병을 고칠 수 있다는데 한번 가 볼까? 나으면 좋은데, 안 나아도 어쩔 수 없지 뭐!” 하는 생각으로 가볍게 움직일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반드시 낫는다’는 확신이 없으면 이런 여러 가지 문제를 제쳐 두고 움직일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께 올인’하지 않는다면 안 되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답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다른 길이 없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혈루증 여인은 다른 모든 문제를 ‘나중에’라는 곳, 차순위로 보냈다. 눈에 보이는 우선순위를 향해 나아간 것이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높은 벽을 넘게 했고,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의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뚫을 수 있게 했다. 실패할 경우 돌아올 모든 결과를 뛰어넘어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한마디로 ‘절실함’으로 행동했다는 것이다. 절실함, 다르게 말하면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이다. 그 믿음이 그를 이끈 것이고, 앞만 보고 가게 한 것이다. 기쁨을 가져다준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이다.


우리는 어떤가? 정말로 구원이 없으면 안 되는가? 그런 절실함이 있는가? 요소수가 떨어지면 차를 움직일 수 없다는 절실함, 예수님만이 오랜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절실함 말이다. 그 절실함으로 인해 눈에 보이는 장애물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것을 찾았을 때 진정한 기쁨을 느끼며 평안을 누리는 그 절실함이 있는가 말이다. 우리에게 진짜 믿음이 있다면 우리의 삶도 그러해야 한다. 우선과 차선의 구분이 명확해야 한다는 말이다. 급하게 생각되는 그 무엇도 절실함보다 앞설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절실한 것을 가장 먼저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한 가지 더 씁쓸한 것은 많은 사람이 요소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경유차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도 요소수가 무엇인지 궁금해 한다. 평소에 신경도 쓰지 않았던 요소수를 알게 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요소수로 인해 난리가 났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요소수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이 요소수를 찾기 위해 헤집고 다녔기 때문이다. 절실한 사람들의 행동으로 인해 관심도 없던 사람들마저도 궁금해 하고 관심을 쏟게 된 것이다.


우리는 전도를 위해 많은 힘을 쓴다. 금전적인 비용은 물론이고, 시간과 인력 등 동원할 수 있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활동에 절실함은 얼마나 들어 있는가? 노방전도를 하거나 집을 방문하며 전도하는 일, 교회로 초청하는 일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전도를 한다. 그 안에 얼마나 절실함이 있는가 말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많은 전도 활동을 해 왔지만, 교회 밖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음은 소위 ‘그들만의 리그’와 같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얼마나 중요한지 별로 관심이 없다. 그냥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어떤 활동 중 하나로 혹은 사람들을 귀찮게 하는 행동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요소수를 찾는 사람들의 행동은 다른 이들에게 보이기 위한 어떤 ‘행동’이 아니다. 그것이 없으면 정말로 차가 멈출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절실함이고 ‘진심’이다. 진심으로 했던 행동, 그 진심이 사람들에게 전해진 것이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뭔가 중요한 일이고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보고 느낀 것이다. 그래서 관심을 보이고 함께 안타까워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그러한 절실함, 복음을 대하는 진심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내게 있는 것을 진심으로 귀하게 여기지 않기에, 전하는 것을 보는 사람도 그렇게 귀하게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닌지, 구원의 소식을 스스로 기뻐하지 않기에 그것을 전달받는 사람 역시 크게 기쁜 일로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닌지, 복음이 없는 이들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지 않기에 그들도 그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질문해 봐야 할 문제다. 


절실함, 진심, 믿음, 이 말들이 서로 다르게 들리지 않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두 한 의미로 여기며 행동할 때 참다운 삶이 될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스스로 속이는 사람이 아니라 온전한 믿음으로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 말이다. 


우리는 해마다 성탄의 기쁨을 나눈다. 우리에게 죄와 죽음과 구원이라는 지식과 믿음이 있다면 앞으로 맞이하게 될 성탄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많은 이가 즐거워하는 날, 왠지 들뜨고 설레는 날, 선물이 오가는 기분 좋은 날이 아니라 떨어져 가는 요소수로 인해 마음 졸이던 것이 해결된 기쁨,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의 시간이 될 것이다. 무엇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것을 얻은 기쁨으로 가득할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을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시간이 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느낄 때 비로소 절실한 마음, 진심이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전해질 것이다. 성탄의 소식이 지금 나에게 가장 절실한 것임을 느끼는 시간,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시간이 되어야겠다. 거창하게 누구를 위해서 나누는 시간이 아니라 그저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기뻐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기쁨이 흘러넘치기를 바란다. 

우리는 어떤가? 정말로 구원이 없으면 안 되는가? 그런 절실함이 있는가? 요소수가 떨어지면 차를 움직일 수 없다는 절실함, 예수님만이 오랜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절실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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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돈영

김돈영 목사는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CTS라디오조이 ‘찬양의자리’ 진행자와 BASE성경교육원 공동대표로 섬기고 있다. ‘직장선교아카데미’와 ‘군세움프로젝트’를 통해 성경을 강의하며, 다양한 집필 활동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