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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설교에서 피해야 할 여섯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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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Steve Mathewson /  작성일 202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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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들이 수년 동안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성탄 이야기를 설교하다 보니 참신한 통찰에 굶주려 있다. 그래서 오래된 오해들 만큼이나 성탄 이야기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는 새로운 해석들을 덥석 받아들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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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들에게는 대림절이나 성탄절이 가장 멋진 시간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선포하는 것은 굉장한 특권이지만, 활용할 만한 설교 본문은 부족하기만 하다.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탄 기사가 아예 없다. 더구나 마태가 기록한 성탄 기사들 가운데 적어도 두 개는 독자들에게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하나는 따분하게만 느껴지고(마 1:1-17), 다른 하나는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마 2:16-18). 


그런데 또 다른 난관이 설교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성탄 이야기를 전하는 복음서 기사들이 수세기에 걸친 잘못된 주해들과 전설이 가미된 설명들로 덧씌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R. T. 프랑스(R. T. France)는 이렇게 풍자한다.


많은 사람들이 성탄 연극을 통해서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인지하게 된다. 수건을 둘둘 말아 쓰고 있는 마가복음의 목자들과 마태복음의 동방박사들(왕으로 신분 상승)이 어깨를 맞댄 채 나란히 서 있고, 무뚝뚝한 여관 주인 부부와 반짝이 후광을 붙인 아기 천사들이 한자리에 있다. 이런 등장인물 칵테일에 한겨울 눈 덮인 풍경과 발갛게 빛나는 마구간과 미소 짓고 있는 황소와 당나귀를 그려 넣은 크리스마스카드까지 보태면, 우리의 감성을 촉촉이 적혀 주는 현대 크리스마스의 주재료는 다 모이게 된다. 그리고 나도 누구 못지않게 이걸 즐긴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설교하는 누군가가 작은 디테일 하나라도 과장하거나, 아니면 그걸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기만 하면 투덜대는 심술쟁이가 아니다. 하지만, R. T. 프랑스가 그랬듯이, 내가 보기에도 복음서의 탄생 이야기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위태롭기만 하다. 그런 작은 오해들이 쌓이면서 복음서 기자들이 진짜 강조하는 것들이 왜곡된다. 


정반대의 문제도 있다. 설교자들이 수년 동안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성탄 이야기를 설교하다 보니 참신한 통찰에 굶주려 있다. 그래서 오래된 오해들 만큼이나 성탄 이야기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는 새로운 해석들을 덥석 받아들이고 만다. 


피해야 할 실수 여섯 가지


이러한 우려의 마음을 담아,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설교할 때 피해야 할 여섯 가지 실수를 제시하고자 한다. 모쪼록 이 글이 탄생 이야기를 선포할 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청중의 (그리고 당신의) 사랑과 애정이 드높아지기를 바란다. 


1. 마태복음 1장의 계보를 건너뛰는 실수 


우리가 예수님의 계보를 건너뛰다시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헨델이 ‘메시아’에서 이 계보를 담아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는, 이 계보를 잠깐 훑어보기만 해도 파악된다. 이름들이 생명 없는 해골처럼 거기 놓여 있지만, 예수님의 계보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몇몇 이름이 지면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다. 르호보암, 아비야, 요람, 아하스, 므낫세,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이 그렇다. 


이 인물들이 말하는 진실은 이것이다. 예수님의 가계도에는 역기능 가정이 적지 않다. 이런 가계에서 예수님이 나셨다.  


그래서 천사가 요셉에게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고 말할 때, 이 메시지는 명백히 예수님의 계보를 되돌아보게 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여성 넷(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포함하면 다섯)이 예수님의 계보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유대 족보에 여성이 등재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더구나 이 여성들은 뜻밖의 인물들이다. 사라나 리브가도 아니고, 다말과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라니? 우선 넷 다 성적 부도덕과 관련된 과거가 있다. 다말은 시아버지를 유혹했고, 라합은 창녀였다. 룻은 모압 여자인데, 이 모압 족속은 근친상간에서 기원한다(창 19장). 우리아의 아내는 다윗 왕과 불륜을 저질러 아이까지 낳은 여자였다. 네 여성 모두 이방인과 연결되어 있었다. 다말과 라합은 가나안 사람이었다. 룻은 모압 사람이었다. “우리아의 아내”의 남편 곧 “우리아”는 헷 사람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마태복음을 관통하는 주제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마 1:21)의 확장이다. 곧 경건한 유대인의 남은 자들(마 3:9, 8:11, 28:19)에 이방인들이 포함된다는 주제다. 


따라서 마태복음에서 탄생 이야기를 주제로 시리즈 설교를 한다면, 마태복음 1:1-17을 포함해야 한다. 어떻게 은혜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어 다말(과 유다), 라합, 룻, 밧세바(와 다윗), 그리고 마리아 이야기를 시리즈로 설교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2. 여관에 빈 방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나셨다고 단언하는 실수


무엇보다도,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머물면서 겪은 문제는 묵을 ‘여관’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은 헬라어 카탈뤼마(Katalyma)를 [현대적 의미의 숙박업소를 연상케 하는] “여관”(눅 2:7)으로 번역하지만, 신약성경에서 모두 세 번 등장하는 이 단어가 쓰인 나머지 두 곳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월절 식사를 했던 가정집 객실(막 14:14, 눅 22:11)을 가리킨다. 케네스 베일리(Kenneth Bailey)는 이렇게 올바른 질문을 던진다. “누가복음의 끝 부분에서 카탈뤼마라는 단어가 개인 집에 딸린 손님방을 의미한다면(22:11), 같은 복음서의 초반부에서 같은 의미로 쓰이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요셉이 베들레헴에서 지인의 집에 묵을 생각이었는데, 마침 그 방을 다른 손님이 먼저 차지하고 있었다면, 요셉에게는 어떤 대안이 있었을까? 아기를 구유에 뉘었다고 보고하는 것으로 봐서, 예수님은 요셉이 묵으려고 찾아갔던 가정집에 딸린 마구간이나, 아니면 심지어 지하실에서 태어나셨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대안도 있었다. 손님이 묵을 방이 이미 찼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족 방에 머물렀을 가능성도 있다. 겨울에 가축을 집 안에 두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렇게 하면 가축이 온기를 제공해 주기도 했고, 또 가축을 도둑맞을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하실이든 마구간이든, 가축도 함께 있는 그런 가족 방이든, 어떤 시나리오든 예수님이 태어나신 누추한 환경을 반영하기는 마찬가지이니, 예수님이 정확히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따지는 것이 괜한 헛소동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부 사실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되면, 성탄 이야기의 초점이 사실이 아닌 엉뚱한 이야기―거절당한 이야기, 가혹한 여관주인 이야기, 여관방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생각하지 못한 무능한 남편 이야기―로 흘러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성탄 이야기는 예수님의 출생의 “정상성”으로도 충분히 놀랍다. 만왕의 왕께서 누추한 환경에서 평범하게 태어나셨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이야기다. 


3. 목자들에게 과도한 성격을 부여하는 실수


예수님의 탄생을 처음 목격한 사람들이 목자들(눅 2:8-20)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법적 소송에서 증언할 자격이 허용되지 않을 정도로 사회의 멸시와 경멸을 받았다고 목자들을 그리는 것은 정확한 묘사일까? 좋은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들이 목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죄인들이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까?


대럴 보크(Darrell Bock)는 이러한 이해에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한다. 첫째, 이러한 증인 자격에 대한 랍비 규정은 후대에, 더 정확히는 5세기에 생겼다. 둘째, 성경에 나오는 목자 모티프는 대부분 긍정적이다(시 23; 눅 15:4; 막 6:34; 마 18:12; 요 10; 엡 4:11; 히 13:20; 벧전 2:25).


물론 목자들은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하층 경제 계급을 대표한다. 따라서 그들을 하나님의 구원 메시지에 반응하는 낮고 겸손한 사람들을 묘사한다고 말하는 것이 안전하다.


설교자들은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유월절에 도살될 어린 양들을 지키고 있던 목자들에게 처음으로 전해진 아이러니를 강조하기도 한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궁극적인 유월절 어린양이기 때문에, 이 사실은 정말 놀라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누가는 이러한 연결을 애써 강조하려고 무리하지 않는다. 어찌됐든,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다른 목자들도 모두 유월절 희생제물로 바쳐지게 될 어린 양을 돌보고 있었을 터였다. 


티모시 라니악(Timothy Laniak)은 더 유망한 강조점을 몇 가지 지적한다. 첫째, 목자들을 선택한 것은 미가 5장에 예언된 ‘목자 통치자’로 태어난 갓난아이의 정체성을 세심하게 반영한 것일 수 있다. 둘째, “목자들이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눅 2:8)라는 누가의 표현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속의 ‘새벽’을 상징적으로 기다리는”(눅 1:68, 2:38; 사 63:4) 모습을 묘사하는 것일 수 있다. 


4. 동방박사들을 현자로 표현하는 실수


여기서 문제는 동방박사들은 현자라는 의미에서 “현명한”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왕도 아니었다. 또 꼭 세 명이었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다. 예물이 세 가지였기 때문에 세 사람이었으리라 가정이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우리가 부르는 크리스마스캐럴 목록에서 “동방박사 세 사람”(We Three Kings)을 뺄 이유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동방박사들이 꿈, 점성술, 마술, 미래 예언에 관심을 둔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지적하게 되면 우리가 동방박사들의 예루살렘 방문이 갖고 있는 아이러니와 경이로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마태복음의 독자들은 동방박사들을 부정적으로 보았을 수도 있다.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예수님을 찾을 것이라는 의미로 “현자들은 여전히 그분을 찾습니다” 같은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언어유희는 자제하는 것이 좋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현자(지혜 학도)가 아니었다. 그들의 지혜가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한 것이 아니었다. 마태복음에 들어 있는 두 부류의 아이러니를 조명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마태는 제한된 지식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경배하고자 했던 동방박사들의 열심과, 아이러니하게도 메시아의 탄생에 대한 정보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무관심이나 적대감으로 일관한 유대 지도자 집단 및 헤롯 왕궁을 대조하고 있다.


5. 마태복음 2:16-18이 보고하는 무고한 아이들의 학살 이야기를 회피하는 실수


많은 목회자들이 그렇게 하듯이 나도 수년 동안 이 이야기를 설교하지 않고 건너뛰었다. 그러다가 17년 전에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설교했다. 그때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을 생각하게 되는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2012년 12월 16일 코네티컷 뉴타운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 이틀 뒤에 나는 또 이 설교를 했다. 


그렇다, 나는 구주의 영광스러운 탄생으로 인해 베들레헴에서 남자 아기들이 잔인하게 도륙되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는다. (기록으로 보면, 당시 베들레헴의 인구를 고려할 때 사상자는 20명 남짓이었을 것이다.)


마태는 예레미야 31:15을 인용하면서 베들레헴의 이 유아 살해는 라마에서 여인들이 슬퍼하며 통곡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성취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로써 그는 이 사건을 끔찍한 일로만 대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강조한다. 이것은 훌륭한 전략으로 판명된다. 마태는 예레미야 31:15을 인용함으로써 우리에게 예레미야 31:16-17로 나아가서 나머지 이야기를 듣게 한다. 하나님께서 무시무시한 상황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해 내시고 회복해 주실 것이라는 이야기다. 마태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자녀를 위하여 울부짖은 어머니들에게 약속해 주신 희망은 곧 자녀를 잃은 베들레헴의 어머니들과 끔찍한 악과 불의에 직면한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해 주신 희망임을 우리가 이해하길 바라고 있다. 


6. 마가복음의 서문은 ‘크리스마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실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성탄 이야기를 설교한 다음에 요한복음의 장엄한 서문으로 눈을 돌리는 목사들이 있다. 그렇다. 요한복음 1:1-18은 예수님의 성육신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마가복음도 그러하다. 요한복음의 서문은 성육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계시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마가복음의 서문은 이사야가 예언한 “새 출애굽”을 수행하는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오심을 강조한다. 마가복음은 이사야 40:3을 중심으로 시작하는데, 이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앗시리아에서 건져내시도록 대로를 준비하라고 촉구한다. 이 본문에 앞서 이사야 11:15-16은 이러한 대로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실 때 마련해 주셨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이사야의 새로운 출애굽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이 사명의 연속선상에서 사명을 맡으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비추어, 마가복음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외침으로 서문을 마친다. 곧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속박에서 건져내시고 영광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셨다(막 1:14-15)는 결론이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서문에는 성탄과 함께해야 할 모든 의미가 담겨 있다. 


설교자의 목표 


이 여섯 가지 실수를 피하자는 것은 지적 허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실수를 바로잡을 때 사람들은 그들이 듣는 그리스도 탄생 이야기에서 복음서가 전하는 이 이야기의 경이로움에 더욱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중심에 있는 복음의 영광을 다시금 드러내는 복음서의 본문을 정확하고 분명하며 설득력 있게 주해하여 설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러한 설교는 우리의 설교를 듣는 회중의 애정을 드높이고 그들이 왕이신 예수님을 향한 더 깊은 사랑으로 나아가도록 박차를 가할 것이다. 찬송작가 엘리자베스 프렌티스(Elizabeth Prentiss, 1818-1878)는 간결하게 이렇게 썼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우리가 예수님이 나신 이야기를 선포할 때 우리는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크리스마스는 우리에게 가장 멋진 시간이 될 것이다. 



원제: 6 Ways Not to Preach the Birth of Jesu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서은성 




우리의 목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중심에 있는 복음의 영광을 다시금 드러내는 본문을 정확하고 분명하며 설득력 있게 주해하여 설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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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Steve Mathewson

스티브 메튜슨은 일리노이스주 리버티빌에 위치한 CrossLife Evangelical Free Church의 담임목사이다. 오레곤주 포틀랜드에 위치한 Western Seminary의 목회학 박사과정 디렉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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