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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성탄절이 누군가의 고통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by David Mathis2021-12-24

성경의 첫 성탄절을 살펴보면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 성탄절도 모든 게 즐겁고 밝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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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니다. 지금 이 시점이 일 년 중 가장 즐거운 사람도 있겠지만, 세상이 그렇게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건 우리 모두 너무 잘 알고 있다. 특별히 더 힘들게 느껴지는 성탄절도 있는 법이다. 


성격 자체가 워낙 활기차서 아무리 힘들어도 기운 내서 밝은 성탄절을 보내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성탄절의 기쁨과 즐거움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더 큰 슬픔, 더 깊은 아픔을 실감하게 할 수도 있다. 평범한 삶, 그것 자체로도 이미 충분히 힘들다. 그런 이들에게 온 세상이 노래하고, 종을 울리고, 갑자기 세상이 기쁨으로 가득 찬 것처럼 쇼를 하는 모습을 보는 건 고문과 다르지 않다. 성탄절의 기쁨을 느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기쁨을 느끼는 게 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성탄절은 우리의 고통을 무시하지 않는다. 성경의 첫 성탄절을 살펴보면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 성탄절도 모든 게 즐겁고 밝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불행과 무질서를 배경으로 서서히 떠오르는 즐거움의 새로운 모습이 드러난 날이었다. 그 첫 번째 빛줄기는 깊은 어둠의 땅에서 찬란하게 빛났다.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그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렸고, 무려 400년 동안 침묵하시기만 한 것 같았던 하나님은 어느 날 갓난아기가 되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울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성탄절의 고통과 불행과 두려움을 깊이 생각해 보라.


마리아와 요셉


먼저 마리아를 생각해 보자. 천사의 발표와 함께 혼란과 오해, 흥분과 기대가 뒤따랐을 것이다. 조만간 그녀의 배가 불러올 것이다. 약혼은 했지만 정작 결혼식은 올리지 않은 상태였다. 머지않아 그녀의 고향 나사렛에서 그녀는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정죄의 대상이 될 것이다. 무려 삼십 년이 지난 후에도 예수님의 적들은 곤란할 때마다 그 카드를 사용했다.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요 8:41). 예수님조차 그런 소문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다면, 그 어머니 마리아는 어떠했겠는가? 


이제 요셉을 생각해 보자. 약혼녀는 결혼 전에 이미 임신한 것으로 드러났다(마 1:18). 그에게 이런 사실은 어떤 치욕을 의미했을까? 그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그녀는 요셉의 눈에 너무나 훌륭하고 순결하며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런 꿈이 그만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것과 꿈에서 천사를 만난 사이의 시간 동안 요셉이 겪었을 혼란은 얼마나 컸을까?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20).

천사의 말을 믿고 마음에 위로가 되었겠지만, 순간 아닐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멈출 방법은 없었다. 


그가 오셔서 지신 죄


그러나 요셉이나 마리아가 겪은 고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지신 고통과 죄, 고난과 파멸이다. 천사는 요셉에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라고 선언했다. 모든 유대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로마의 점령과 지배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적어도 그들이 이교도 이방인에 의해 정치적 예속 상태에 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러나 천사가 요셉에게 전한 소식에는 로마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하나님의 첫 언약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로마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죄로부터, 그들 안에 있는 흑암과 부패로부터 구원이었다. 


열방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백성이 궁핍하지 않았다면, 굳이 성탄절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역사 속에서 쇼를 벌이거나 카메오 역할을 하려고 굳이 오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은 자를 살리고 멸망하는 자를 구원하며, 병든 자를 고치며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다. 수세기 동안 불행과 어둠의 세력이 점점 더 강해졌다. 이 세상의 타락과 훼손의 정도가 크면 클수록, 그의 오심은 참된 즐거움과 밝음에 대한 희망의 신호가 될 것이다. 


초라한 마을 베들레헴


아이가 태어날 때에 베들레헴이 준 것이라고는 놀라울 정도로 초라한 환영이었다. 천사가 말한 것은 다름 아닌 메시아의 탄생이었다.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왕이었다. 그러나 베들레헴은 왕에게 적합한 환영을 하지 않았다. 궁전도 없고, 예루살렘도 아니었다. 왕이 태어난 곳은 대도시에서 6마일 떨어진 곳, 천 년 전 이 나라의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이 태어났던 비천한 고향으로 알려진 작은 마을이었다. 베들레헴은 마을 자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토록 위대한 왕의 놀라울 정도로 겸손한 출생지였기 때문에 알려져 있었다. 


예수가 태어난 곳이 우리가 생각하는 “여관”이든 개인 주택의 “객실”(그리스어 카탈뤼마(kataluma)로, 마가복음 14:14누가복음 22:11에도 나타난다)이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게 결코 그들을 위한 장소는 아니었다는 점이다(눅 2:7). 그런데 정말로 이 분이 그리스도인데도, 그가 태어나실 장소조차 없었다고? 결국 마리아는 맏아들을 구유에 뉘었다. 최악의 시나리오이건 아니건, 그런 상황은 누가 봐도 이상적이진 않다. 


탄생의 겸손함은 그 자리에 오거나 오지 않은 사람으로 인해 더 확실해졌다. 그 지역 또는 국가의 고위 인사는 방문하지 않았다. 고작해야 온 사람이라고는 외국 점성술사들인데, 그 사실은 당시에 오히려 혼란을 주는 사실일 뿐이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목자들의 방문과 그들이 드러낸 경외심, 그리고 놀라운 천사의 발표는 요셉 부부에게 엄청난 힘이 되었을 것이다. 마리아는 그런 모든 사실을 마음에 큰 기쁨으로 깊이 간직했다(눅 2:19). 그러나 블루칼라 목자들의 방문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에게 주어진, 그의 오랜 영광에 이르는 길이 얼마나 멀고 비천하고 고통스러울지를 더 선명하게 드러낼 뿐이다.  


영혼을 찌르는 칼


마리아는 출산 직후에 성전으로 갓난아기를 데리고 갔을 때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시므온이라는 노인은 이 아이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리고 마리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녀에게 냉정하고 예언적인 말을 했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눅 2:34-35).

내 자식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논쟁, 적, 큰 고통에 대한 면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마리아는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의 대상이다. 어떤 큰 비극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외에 여기에 다른 무슨 의미가 가능한가? 아들의 이른 죽음 외에 그녀의 영혼을 찌르는 칼이 무엇이 또 있을까? 


헤롯과 학살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끔찍하게도, 첫 번째 성탄절과 관련해 성경 전체에서 가장 큰 비극 중 하나가 발생했다. 두 살까지 수십 명의 남자아이들이 부모의 팔에서 떨어져서 불안하고 사악한 폭군에게 살해당했다.


“헤롯이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마 2:16). 이것은 우리가 성경 전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볼 수 있는 죄인 학살이 아니라, 갓 태어난 히브리 아들들을 나일강에 던진 바로와 같은, 무고한 이들을 향한 학살이다. 아이들의 엄마를 생각해 보라. 첫 번째 크리스마스 이후에 얼마나 큰 고통이 왔을까? 


다시 한 번 하나님은 천사에게 명령을 내리셔서 그의 아들을 이 끔찍한 살육에서 구해 내셨다. 그리고 나중에 있을 더 무서운 십자가를 위해서 그를 보호하셨다.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는 아들을 데리고 사악한 왕에게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이집트로 피신하는 고통과 불편을 겪었을 것이다. 어떤 부모라도 아들을 잃지 않는다면 기꺼이 치렀을 대가였다. 그러나 예언대로 마리아의 때가 곧 올 것이다. 


슬픔보다 깊은 기쁨


첫 성탄절을 맞아 이 세상에 온 예수님의 삶은 이처럼 결코 쉽지 않았다. 태어날 때도, 유아기에도, 또 성인이 되어서도 쉽지 않았다. 사실상 요한복음의 시작 부분은 예수의 생애 전체에 적용되는 특별한 고통을 포착한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10-11).

이사야는 그리스도가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했고, 그것은 사실이 되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으셨다. 그는 정말로 그랬다(사 53:3). 그러나 고통스럽고 도전적인 삶이었지만, 동시에 그 삶은 질고의 사람을 지탱했던 깊고도 차원 높은 기쁨으로 채워진 것이었다. 


기쁨은 올 것이다


첫 번째 성탄절에 천사들이 발표한 큰 기쁨은 우리도 지탱해 줄 수 있다. 성탄절은 우리의 많은 고통을 무시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에게 그 고통에 빠지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성탄절은 그 어떤 세속적인 축하 행사보다 더 심각하게 고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을 보시고 도움을 청하는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출 2:23-25; 3:7-9; 6:5).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


이 시대의 성탄절은 기쁨과 밝음을 보장하지 않는다. 아직은 그렇다. 그러나 기쁨과 밝음이 조금씩 스며들 것이라고 약속한다. 최고의 성탄절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타협 없는 기쁨을 엿볼 수 있게 해주며, 멀리서 볼 때조차도 미리 그 맛을 볼 수 있게 한다. 사도 바울과 슬픔의 사람이었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근심하되 항상 기뻐해야”(고후 6:10) 한다. 성탄절을 맞아서조차도 몹시 슬퍼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영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의 근원이 되신다.




원제: Christmas Doesn’t Ignore Your Pain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무제

이 시대의 성탄절은 기쁨과 밝음을 보장하지 않는다. 아직은 그렇다. 그러나 기쁨과 밝음이 조금씩 스며들 것이라고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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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David Mathis

데이비드 마티스는 desiringGod.org의 주필이며,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Cities Church의 목사이다. '은혜받는 습관'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