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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건강한 자아상은 자신을 망각하는 것이다
by 고상섭2021-11-27

성경은 자기사랑을 주장하지 않는다. 성경은 자기부인을 말한다. 진정으로 자신을 찾으려면 자기사랑을 힘써야 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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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는 ‘센터처치’(두란노 역간)에서 복음의 능력이 두 가지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첫째 ‘나는 내가 감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한 죄인이고 허물 많은 존재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둘째 ‘나는 내가 감히 바랐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용납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99쪽). 이것은 인간은 ‘구원받은 죄인’ 또는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오래전 아우구스티누스나 루터가 했던 이야기의 현대적 표현이며 적용이다. 


복음의 이러한 내용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복음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2-4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바울은 복음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세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먼저, 건강한 정체성의 특징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판단하는 것을 매우 작은 일로 여기는 것이라 말한다(2절).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인정에 목말라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정체성을 다른 사람의 인정에 두기 때문이다. 인정받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거나 비위를 맞추게 되고, 열심히 노력한 만큼 보상이 돌아오지 않을 때 실망하거나 좌절하게 된다. 내 삶의 뿌리를 다른 사람의 인정에 두기 때문에 늘 불안한 마음의 상태를 가질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이 내게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지 말아라.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이다. 자신에게 떳떳하면 된다.” 일반 상담가들이나 자기개발서는 이런 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교만을 통해 열등감의 문제를 해결하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자기 자신의 감정에게 솔직하게 물어 보라. 진정 자신에게 떳떳할 수 있는가? 나도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좌절하고 실망한다. 내가 원하는 삶을 내가 살 수 없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존 스토트에 따르면, 인간에게 죄가 침투하면서 세 가지 관계가 단절된다. 첫째, 하나님과 단절되었다. 둘째, 이웃과 갈등이 생겼다. 그리고 세 번째로, 또 하나의 관계가 무너졌는데, 바로 자기 자신과의 관계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속박된 존재로 살고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룰 수 없는 상태이고, 또 내가 원하는 대로 산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노예로 살게 한다. 나의 원함 자체가 기울어져 있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평가와 판단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울은 이제 더 나아가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2절)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이 자신을 판단하는 것을 멈춘다는 것이다. 나를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기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시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열등감의 문제, 자아상의 문제의 핵심은 언제나 자기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그래서 많은 자기개발서들이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라고 권고한다. ‘자존감 수업’같은 책에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고 권면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외롭고 힘든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자기사랑을 주장하지 않는다. 성경은 자기부인을 말한다. 진정으로 자신을 찾으려면 자기사랑을 힘써야 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25). 

존 스토트는 ‘모퉁잇돌 그리스도’(복있는사람 역간)에서 단순한 자기사랑과 자기위로는 성경적 단어가 아닌 심리학적 단어일 뿐이라 말하고, 하나님이 심어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여전히 죄인 된 우리를 향해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기심 없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될 때 비로소 자신을 찾게 된다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궁극적 역설에 도달하게 된다(막 8:35). 진정한 자기 부인이 진정한 자기발견을 낳는다”(91쪽). 


팀 켈러의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복있는사람 역간)의 원제목은 ‘The Freedom of self-forgetfulness’ 즉 ‘자기망각의 자유’다. 자기를 덜 생각하는 것이 건강한 자아상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게리 토마스도 ‘거룩의 영성’(도서출판CUP 역간)에서 겸손이란 ‘자신을 덜 생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왜 자신을 덜 생각하는 것이 건강한 자아상일까? 


건강한 자아는 자신의 자아를 네 번째 발가락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네 번째 발가락이 있다는 의식을 하지 않고 걸어가고 살아간다. 그런데 네 번째 발가락을 계속 의식하고 산다면 분명 그곳에 상처가 났거나 신발에 무엇이 들어가서 불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아를 계속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아에 상처가 났기 때문이다. 건강한 자아는 자신을 더 생각한다. 자신은 부패한 죄인일 뿐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존귀한 자가 되었다는 하나님 사랑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삶의 방향이 바뀌게 된다. 여전히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다면 상처 난 결핍을 붙잡고 있는 것이고, 자신의 노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교만이 끊임없이 자신을 이끌기 때문이다. 


건강한 자아상의 시작은 사도 바울처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로부터 시작된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영적 침체’(복있는사람 역간)에서 자신이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 모든 영적 침체의 원인이 된다고 말하며, 시편 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을 해설하면서, 자기망각을 원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런 영적 침체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시편기자처럼 자신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맥없이 감정이 가는 대로 드러누워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데 만족하지 않았습니다(33쪽). 

많은 사람들이 낙담하고 실망하는 이유는 자신이 자신을 생각했을 때 마음에 들지 않고 자신에게 실망했기 때문이다. 이 말을 다르게 설명하면, 자신은 이것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이라는 기준이 있기 때문에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해서 실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감정이 가는 대로, 자신이 자신에게 떠오르는 생각대로 자신을 맡기며 점점 침체 가운데로 들어간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제 영적 침체에 빠지지 않는, 또는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는 대안을 설명한다.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데 만족하지 말고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데, 바로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입니다. 자아가 우리에게 말을 걸게 하지 말고 우리가 자아에게 말을 걸어야 합니다. 영적침체의 주된 문제점은 우리가 자아에게 말하는 대신 자아가 우리에게 말하는 데 있습니다. 인생의 대부분의 불행은 우리가 자아에게 말하는 대신 오히려 자아의 말을 듣는 데 있음을 모르시겠습니까?(33쪽). 

시편 기자는 다른 사람의 조롱에 낙심했다. 그리고 바뀌지 않는 현실의 문제에 좌절했다. 그러나 자신의 자아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선포하고 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불안해 하는가.” “나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지 않는가!” 그는 자신의 자아에게 말을 걸고 있다.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라는 바울의 말을 적용한 것이다.  


우리의 생각 속에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세 존재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둘째는 마귀가 우리에게 말한다. 셋째는 자신의 자아가 말한다. 자신의 자아가 말한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 가지를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마귀의 말과 자신의 생각이 모두 1인칭 시점으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상섭아, …을 하거라”라고 말씀하거나, 마귀는 쇳소리를 내면서 “상섭아, …하지 말아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모두 내 생각인 것처럼 1인칭 시점으로 “…을 하고 싶다” “…하고 싶지 않다”라고 떠오른다. 상한 음식을 먹었을 때 상했다고 판단되면 뱉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막을 수 없고 누가 내게 생각을 불어넣어 주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 생각이 성경이 원하지 않는 생각이라면 버려야 한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잘못한 일을 계속 곱씹으면서 생각하게 되면 분노는 더욱 커지게 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면 그 생각을 버려야 한다. 


결국 건강한 자아상은 복음의 기초를 받아들일 때만 가능하다. 복음 안에서 나는 죄인이지만 여전히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아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자기가 자기를 판단하는 판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신은 좀 더 괜찮은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으면서 누군가가 자신을 무시할 때 폭발하는 이유도 여기도 있다. 자기 자신이 자신을 생각하는 것으로 자기 자아상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자기를 부인하게 한다. 그래서 진정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한다. 복음의 정체성은 내가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나를 판단하시는 그 판단을 진리로 받아들일 뿐이다. 나는 죄인이기에 나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거나 개선될 것이 없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로 인해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것은 내가 이룬 행위와 성취가 아니기 때문에 전적으로 감사해야 할 은혜이다. 팀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종교적인 사람은 비난받을 때 격노하거나 감정적으로 좌절한다. 왜냐하면 좋은 사람으로서의 자아상은 자신에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미지에 위협이 되는 것은 어떤 비용이 들더라도 없애야 한다. 반면 복음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비난을 당할 때 씨름한다. 그러나 내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은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있기 때문이다(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 48쪽).

복음의 자아상은 나를 덜 생각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이웃을 더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가 자신을 판단하기를 멈추고 하나님 앞에 내가 누구인지에 더 집중하는 삶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한계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게 된다. 죄인인 나의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못남에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못난 나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감사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우리를 덜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진정한 자유를 우리에게 선물해 준다. 

복음의 자아상은 나를 덜 생각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이웃을 더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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