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세균이 아니다: 인간 존엄성을 위한 변론
by R.C. Sproul2022-01-18

만약 죽음 이후의 삶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윤리적 결정은 완전히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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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한 어머니가 찾아왔다. 그녀에게는 대학생 아들이 있었는데, 이 어머니는 부들거리는 손을 부여잡고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 아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계속 아들을 위해서 기도했어요. 그런데 그 아이는 완전히 타락해 버렸어요. 마약에 취해 있고, 온갖 미친 짓을 하고 다닙니다. 그리고 도무지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혹시 목사님이 그 아이와 만나서 말씀을 좀 해주실 수 없을까요?”


나는 그녀에게 아들을 강제로 데려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권면했다. 왜냐하면 강제로 데려올 경우 이미 그는 마음을 닫고 대화를 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내게 간청하였고, 마지못해 나는 그녀의 요청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을 내게로 데리고 왔다. 그 아이는 들어올 때부터 잔뜩 화가 나 있었고, 내게 굉장히 퉁명스럽게 응답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물어 보았다. “지금 너는 누구한테 화가 나 있는 거니?” 그러자 그는 “우리 엄마요”라고 대답하였다. “왜 엄마에게 화가 나있지?” 그러자 “엄마는 틈만 나면 내게 이 종교를 쑤셔 넣으려고 해요”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나는 “너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구나?”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예. 저는 기독교를 믿지 않아요”라고 답하였다. “좋아, 그럼, 너는 무엇을 믿니?” 그러자 그는 “저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어요”라고 답하였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좋아. 그렇다면 너는 도대체 왜 엄마에게 화가 나 있는 것이지?” 그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목사님,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나는 다시 설명하였다. “아마도 엄마는 지금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너는 화가 날 이유가 없잖아. 엄마는 사람들에게 이 종교를 쑤셔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조금 전에 너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했어. 그런데 네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면 너는 거부하고 있지? 그러면서 반대로 너는 다른 사람에게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강요하고 있는 것 같아, 그렇지?”


“나는 기독교의 윤리 기준을 따라서 살아가기 때문에 만약 네가 나에게 기독교의 윤리에 입각하여서 문제를 얘기했다면 나는 너를 도와주었을 거야. 만약 그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네 엄마가 너를 분노하게 만들고, 한 인간으로서 너를 비인격적으로 대우하였다면, 나는 어쩌면 네 편에 서 있을지도 몰라. 아마도 네 엄마에 맞서서 너를 보호해 주었을 거야” 그 아이는 나와 이 대화를 나눈 후부터 기독교 신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 젊은 청년은 자신이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는 이 세상에는 윤리의 궁극적인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그 아이도 그런 세상에서는 도무지 살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바로 이 문제가 임마누엘 칸트 같은 비그리스도인 철학자도 가졌던 고민, 곧 하나님이 없이는, 정의 없이는, 죽음 이후의 삶이 없이는, 우리 삶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고민이었다.


핵심은 이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없다면, 만약 죽음 이후의 삶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윤리적 결정은 완전히 무의미하다. 이것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진리다. 만약 우리 생각에서 하나님을 지워 버린다면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다. 절대자를 기준으로 하는 윤리를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저 모두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상대적 윤리이다. 인간은 인격적 창조주가 없이는 절대적 윤리 기준을 가질 수 없다.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은 우리가 아무런 의미가 없이 우연히 태어나지 않았다는 고백이다. 우리는 어딘가 분명히 아주 중요한 곳으로부터 와서, 또한 아주 중요한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기계적 결정론자들이나 초진화론자들(hyperevolutionists)은 인간이라는 동물은 원시 세균 덩어리가 발달한 최고 단계라고 주장한다. 세균이 고도로 발달한 단계인 인간은 우주의 힘에 의하여 발생한 우연의 산물이며, 인간의 운명은 이런 비인격적이고 무의미한 우주의 힘에 달려 있다. 이 관점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 존재의 목적에 대해서 철저하게 절망하게 만들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아니다. 세균에서 시작된 인간 존재는 때가 되면 유기물로 해체되고 분해될 뿐이다.


이런 기계적 관점은 삶의 의미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해 주지 못한다. 지금까지 기계적 의미의 윤리를 발전시켜 보려는 수많은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모든 노력은 실패하였다. 왜 세균들이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가? 만약 내가 우연의 산물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갈 이유가 무엇인가? 삶이 죽음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삶이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인간이 저 바위보다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런데 현대 세속 인본주의는 인간 기원에 대한 이런 기계적 관점이나 진화론의 설명을 수용한다. 그러나 이것이 가져다주는 피할 수 없는 모순에 대해서는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사실 인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인간 존엄성을 중시한다. 그러나 인간 존엄성의 영구적 토대가 될 수 있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그것은 존재할 수 없다.


기독교와 인본주의 둘 다 소외된 인간관계를 치유하고자 하며, 인간 존엄성을 존중한다. 그러나 그 존엄성의 토대는 근본부터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수평적 인간관계를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수평적 인간관계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영원한 인간 존엄성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인간 존엄성을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인본주의자들은 자의적이고 비이성적인 방법을 끌어올 수밖에 없다. 만약 인간이 우연히 생겨난 존재라면 어떻게 인간 존엄성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인본주의자들도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를 제거한 채로 기독교의 가치와 윤리를 가지고 와서 적용하려고 한다. 사실 인간은 누군가 아무런 이유도 설명하지 않은 채 “무엇인가를 하라”고 요구하면 분노한다. 그런데 인본주의자들은 인간 존엄성과 우연히 “주어진” 인간의 삶에 대한 어떠한 이유도 제공하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인간이 측량할 수 없이 가치 있고 존엄한 존재라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그저 세균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외침은 공허해질 뿐이다.


기독교는 인간 존엄성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기인한다고 가르친다. 인간은 하나님의 존엄성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창 1:27). 무한한 가치와 존엄을 지니신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그 가치와 존엄성을 부여하셨다. 그래서 인간 존엄성은 하나님의 가치와 존엄성의 파생물이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인간 존엄성의 초월적이고 근본적인 이유를 상실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인간을 개나 돌고래, 심지어 잡초와 다르게 대할 이유가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위대한 두 계명을 이해할 수 있다(마 22:34-40).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도 사랑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한한 존엄성을 가진 하나님을 사랑하면,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그 하나님의 존엄성을 드러내는 인간을 사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엄성에 대한 개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존엄성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인간에게만 존엄성을 말할 수 있다. 다른 동물이나 피조물에게는 그러한 존엄성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존 스미스라는 사람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에게 “존 스미스 박사” “존 스미스 의원” “존 스미스 회장”이라는 호칭을 붙일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존 스미스 세균”이라고 부른다면 이는 그를 모욕하는 것이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세균을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지 않고, 파리가 죽는다고 슬퍼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어떤 개념의 문제나 역사의 문제가 아니다. 인본주의자들과 창조를 믿는 사람들이 각자 생각하는 인간 존엄성에는 근본부터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동등한 시민권을 외치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친 대상은 동료 흑인 세균들이 아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지치지 않고 낙태를 반대하는 것은 뱃속에 있는 세균을 지키기 위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직감적으로 인간 존엄성을 알고 있지만, 창조를 떠난 인간 존엄성은 무의미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세속 인본주의자들의 화려한 말을 알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덕스럽게 살아야 하며, 인간 존엄성과 자유와 사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철학적 인본주의자들의 주장보다 모순된 주장은 없다. 그들은 인간이 진화된 세균으로서 우연의 산물이며, 그렇기에 인간은 궁극적으로 소멸(annihilation), 없음의 깊은 심연(the abyss of das Nichts)을 향해 가는 운명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인간은 굉장히 존엄하고 중요한 존재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모순인가. 이는 환상과 희망사항이며, 맹목적 믿음과 어리석음이다. 진화된 세균의 존엄성을 말하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나는 세속 인본주의자들에게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게 와서 인간 존엄성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 나는 백인 세균이나 흑인 세균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진화된 세균들이 핵폭발의 대재앙 속에 죽어나가더라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게 인간 존엄성에 대해서 말하려 한다면, 내게 그 이유를 가져다주길 바란다.”


만약 내게 인간을 위한 희생적, 이타적 행동을 요구한다면, 더욱 분명한 이유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그저 우리도 인간이기 때문에 다른 인간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이유보다는 더 큰 이유여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않으면 다른 모든 이유는 감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감정은 쉽게 변한다. 인권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근본적인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한다. 우리가 인권을 존중해야 하는 근본 이유는 인간 존엄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진리에 있다. 이 진리가 우리 문화 속에서 받아들여진다면 우리는 우리 사회 속에서 진정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원제: We Are Not Germs: The Case for Human Dignity

출처: www.ligonier.org

번역: 박광영

인권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근본적인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한다. 우리가 인권을 존중해야 하는 근본 이유는 인간 존엄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진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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