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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도 보수도 아닌 그리스도 고백적 복음주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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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Steve Bryan /  작성일 2021-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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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적 복음주의의 진정한 영향력은 사람과 당파가 아니라, 말씀에 근거해서 참되고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밝히는 선지자의 사명을 수행하는가 하는 여부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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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캘리포니아 연설에서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전 대통령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과 뒤를 돌아보는 사람 사이에는 늘 밀고 당기는 긴장이 있기 마련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뒤를 돌아보는 사람의 특징은 분열과 두려움이지만,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희망을 바탕으로 하는 통합의 정치를 수용한다고 덧붙였다. 오바마의 이런 말은 마치 미국 정치가 언제나 희망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진보주의자와 과거만 집착하는 분열적이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보수주의자로 나눠진 공화국과 같다는 이분법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현실 자체를 양극화로 인식할 때, 양극화를 비난하는 사람들 때문에라도, 우리는 양극단으로부터 눈을 돌려 또 다른 지혜의 원천을 찾아야 한다. 


비록 양극단에 빠진, 자칭 복음주의자가 우리 주변에 많다 하더라도, 고백적 복음주의(confessional evangelicalism)는 여전히 정치에 관해서 할 말을 해야 한다. 


언제나 개혁하는


최근 미국 정치 속에 등장한, 투표권을 가졌으며 대부분 백인으로 구성되었고 또한 가벼운 마음으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the lightly churched)과는 대조적으로, 고백적 복음주의는 개신교 종교 개혁의 역사적 고백에 뿌리를 둔 다민족 글로벌 운동이다. 서서히 그 교리를 발전시킨 “단번에 받은 믿음”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성경적 규범에서 차차 벗어나고 있다는 인식에 따른 반응으로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셈퍼 리포르만다(semper Reformanda), 즉 교회는 “항상 개혁해야” 하거나 더 좋은 방향인 “항상 개혁되고 있는” 상태여야 한다는 원칙을 따랐다. 역사적 기독교의 이런 깊은 뿌리야말로 고백적 복음주의자를 2016년 선거 이후 스스로 “복음주의적”이라고 부르는 정치적 반대자와 분명하게 구분하도록 만든다. 


“개혁”을 추구하는 것이 진보주의 의제의 중심이기는 하지만, 과거 개신교 개혁가는 아주 다른 것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들이 추구한 개혁은 변화하는 사회 관습에 교회를 맞추는 식의 변화도 아니었고, 역사의 상향식 발전에 따라 진보하는 식의 변화도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당시의 지배적인 사고체계와 상반되는 방향으로 개혁을 추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교회가 언제나 정교한 성경의 가르침 아래에서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왜냐하면 오래된 찬송 가사처럼 우리 인간은 본성상 “방황하는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 영역에서 볼 때 고백적 복음주의자가 가진 끊임없는 개혁의 열망은 때때로 그들을 “진보적” 성향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러나 말씀에 신실하게 뿌리박고 있다면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진보와 공유점을 가지게 된다. 최소한 그들은 스스로 추구해 온 개혁의 성취를 결코 한때 유행하다 사라지는 식의 “진보”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한 개인이 자기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고, 그 의미를 세상 속에서 구현하는 식의 급진적 자유로 대변되는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는 식의 진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이 추구하는 개혁은 신실함으로의 회귀, 잃어버린 중요한 무언가의 회복 그리고 굳건하게 진리를 붙들지 못한 것에 대한 회개이다. 


셈퍼 리포르만다를 추구하는 것 때문에 일각에서는 고백적 복음주의자를 정치적 보수주의자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보수주의자와 마찬가지로 고백적 복음주의자도 과거로부터 보존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다. 그들도 사회학자 및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전문가”의 최신 “발견” 또는 문화 엘리트의 현재 감수성보다 선과 진리에 있어서 지혜를 훨씬 더 신뢰할 수 있는 안내자로 받아들인다. 


이런 특징(commitments) 때문에 많은 고백적 복음주의자가 스스로 정치적 보수주의자로 규정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특히 영국과 같은 곳에서는 거의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셈퍼 리포르만다의 추구는 우리가 받은 것을 최종적으로 보존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받은 것을 보존하려는 노력이다. 예를 들어 고백적 복음주의자는 1950년대의 사회적 규범을 굳이 보존하려고 하지 않는다. 개혁자는 자고로 전통이란 무조건 그 자체로 보존되어야 한다는 개념을 거부해왔다. 그건 그들이 전통의 가치를 보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실제로는 전통을 존중했다. 단 전통이 성경 속 권위 있는 규범을 보존하는데 한해서만 그런 존중이 가능했다. 물려받은 전통이 말씀을 통해 받은 계시와 반대되는 경우, 관행적 전통을 유지하는 것은 무용지물보다 오히려 더 나쁜 것이다.


이런 특징은 많은 복음주의자가 G. K. 체스터턴(G. K. Chesterton)에 동조하도록 만들었다. 체스터턴은 진보주의자의 임무는 “계속해서 실수하는 것”이고, 그에 반해 보수주의자의 임무는 “실수를 바로잡는 일 자체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씁쓸하게 말했다. 이러한 선택에 직면했을 때, 고백적 복음주의자는 온건하고 고결하며 욕먹을 일 없는 정치적 중립에 자리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고백적 복음주의자는 기껏해야 조금 더 짠 맛을 낼 뿐이다. 복음주의 운동은 결코 정치 운동이 아니다. 그 영향력이 특정 정당 내에서 머무는 한 빠르게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고백적 복음주의의 진정한 영향력은 사람과 당파가 아니라, 말씀에 근거해서 참되고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밝히는 선지자의 사명을 수행하는가 하는 여부에 달려있다. 선지자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함으로 정치 지도 전체에 걸쳐 혼란스러움을 가져올 뿐 아니라, 그 지도에서 벗어나게도 하시는 하나님의 사상을 변함없이 지지할 것이다. 


타협할 수 없는 확신


선지자의 증거는 양극단이나 중립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그 증거는 오로지 광야에서 나오는 것이다. 비록 주변부(margins)처럼 보이고, 심지어 그렇게 느껴지더라도 광야는 결코 주변부가 아니다. 광야는 선지자가 권력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서 주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듣고 굳은 확신으로 담대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곳을 의미한다. 당 내부에서 오는 영향력을 거부함으로, 그들의 말은 오히려 위로부터 오는 진실의 능력에 덧입혀 권력의 중심에까지 더 확실하게 울려 퍼질 수 있게 한다.


이러한 태도를 보인다고 해도 현재 정치적 양극에서 발생하는 위협이 최소화되는 것은 아니다. 양극단이 주는 위험에서 자유로운 사회는 이 세상에 없다. 우리는 복음과 기독교 신앙에 가장 심각한 위협이 명백하게 복음을 반대하는 적대자들에게서만 온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믿음에 우호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진리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권력에만 관심 있는 자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한다. 약한 자를 짓밟는 자, 그들은 얼마든지 화려한 종교 쇼를 할 수 있으나 실상은 진정한 믿음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다(딤후 3:5a).


주어진 순간의 긴급한 상황이 우리를 특정 그룹으로 이끌 수도 있겠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한 극단이 초래하는 위협이 아무리 커 보일지라도, 당파를 따라 양극단을 옮겨 다닌다면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특정한 당을 대신하여 말하는 존재로 전락할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정치적인 적이 아무리 진실과 선을 말한다 해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더 큰 선”을 위해 가입했다는 당이 아무리 선을 위협하는 악을 말한다 해도 침묵하기만 할 것이다. 


우리의 증언은 근본적으로 영적일 수 있지만, 그 증언이 신실하다면 모든 계층의 정치 지도자에게 놀랍고 불편한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한 부유한 “관리(ruler)”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8:18)라는 영적인 질문으로 예수님께 다가온 적이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이웃 중심의 십계명을 강조하는 동시에 권위 있는 토라의 말씀을 그 관리에게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님은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 마음과 관련된 계명(“네 이웃의 것은 탐내지 말라”)을 생략하셨다. 그 계명에는 그 관리에게 없는 “한 가지”가 들어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막 10:21) 이것은 변화된 마음에서 나오는 행위이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않는 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의 소유에 대한 욕심까지도 버리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은 그 어떤 제한도 두지 않고 이웃 사랑과 무한하신 하나님이 주시는 선을 갈망한다. 


오늘날 “정치인”과 관련하여 고백적 복음주의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지 정치적 지지가 아니다. 우리의 분명한 고백과 홀로 선하신 하나님 사랑을 증거하는 것 그리고 이웃의 공익을 위한 우리의 헌신이다. 




원제: Neither Progressive nor Conservative: The Politics of a Confessing Evangelical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선지자의 증거는 양극단이나 중립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그 증거는 오로지 광야에서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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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Steve Bryan

스티브 브라이언(PhD, Cambridge University)은 미국 일리노이주 디어필드에 있는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의 신약학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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