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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부 하나님처럼 선교사 가정 환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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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김형익 /  작성일 2021-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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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Israa Hilles on Unsplash

아낌없는 환대는 은혜를 필요로 하며, 이런 환대는 복음이 자라서 맺는 열매이고 은혜의 결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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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 선교사 가정의 방문이 유독 많았다. 예정된 방문 일정을 앞두고 선교사 가정들에게 ‘아낌없는 환대’를 베풀자는 나의 제안에 교우들은 풍성한 연보로 호응하여 주었다. 그리고 방문하는 선교사 가정들에게 2박 3일의 짧지만 즐거운 가족 휴가를 제공하며 아낌없이 환대한 일은 선교사 가정들 뿐 아니라 교회에게도 큰 기쁨이 되었다.


팀 켈러는 그의 책 『탕부 하나님』(The Prodigal God)을 통하여, 탕자를 가리키는 영어 ‘prodigal son’의 ‘prodigal’(방탕하다는 뜻)이 하나님을 수식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 단어가 하나님께 쓰일 때, ‘prodigal’은 ‘방탕하게 낭비해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아낌없이 베푸는, 낭비하듯이 베푸는’이란 뜻이다. 이런 환대가 선교사들에게만 국한될 일은 아니지만, 나는 선교사와 그 가정들을 향한 아낌없는 환대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아낌없는 환대’는 죄인의 자연스러운 행동은 아니다. 언제나 자기 쓸 것도 모자란다고 느낄 뿐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뿌리 깊은 죄성을 가진 것이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아낌없는 환대는 은혜를 필요로 하며, 이런 환대는 복음이 자라서 맺는 열매이고 은혜의 결실이다. 또한 환대를 받는 입장에서도 유연함이 요구된다. 내가 말하는 유연함은 받을 때 받아 누리고 또 베풀 때 아낌없이 베푸는 여유이다. 사실 이 유연함도 은혜의 작용이다. 나는 환대와 관련하여 두 입장을 말할텐데, 먼저 환대를 받는 선교사와 가정의 입장이다.


선교사와 가정—환대를 받는 사람들


선교사로 15년을 살아온 내 경험을 돌아보건대, 나는 정말 누릴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30년 전의 일이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서 사역하던 우리는 자카르타에 일이 있을 때마다, 친근하게 지내는 교민의 집에 묵는 은혜를 누렸다. 여느 호텔 못지않게 편하고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나 좋은 음악이 거실에서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그랬더니, 그 안주인 권사님이 CD를 꺼내서 주신다. 나도 모르게, “그림에 떡이네요”라는 말이 튀오나오고 말았다. 그 말에 당황한 권사님은 우리가 떠날 때, 500불을 쥐어주며 말했다. “좋은 CD 플레이어를 구입하시라고 드리는 선물입니다.” 당시 그 댁에서 보았던 ‘그것’을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나는 수마트라로 돌아와 당연하게도(?) 그 돈을 종족 사역을 위해 사용했다.


자랑하려고 한 말이 아니다. 사실 이것은 잘잘못의 가치 판단의 문제도 아니다. 당시 전시체제의 생활방식(Wartime lifestyle)이나 검소한 생활방식(Simple lifestyle)을 많이 말하던 나는 때때로 주어지는 환대를 누릴 수 있을만한 자유를 잘 알지 못했다. 


또 하나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선교단체의 대표로 있을 때의 일이다. 신학생들을 인솔하여 2주간의 단기선교(field trip)를 떠났다. 고된 일정 중의 한 밤은 도시의 저렴하지만 괜찮은 호텔에서 묵도록 일정을 계획했다. 호텔에 묵는 것이 거의 생소하던 시절, 그것도 선교 훈련의 일종이었다! 그때 신학생 중 용감한 한 자매가 모두를 대변하여 말했다. 단기선교 중에 이런 호텔에 묵는 게 마음이 불편하다고. 바로 이런 마음이 그전에 나를 지배하던 그 마음이었다.


바울 사도는 선교사들과 같이 교회들의 후원을 받던 선교사였다. 물론 자신의 삶을 위해서는 텐트메이커로 일을 했지만 말이다. 그는 자신이 설립했고 또한 자신의 사역을 따뜻하게 후원했던 빌립보 교회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바울 사도는 비천에 처하기만 한 게 아니라, 풍부에도 처할 줄 안다고 말했다! 그는 배고픔과 궁핍에만 일체의 비결을 배운 게 아니라, 배부름과 풍부에도 처할 줄 아는 비결을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물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그리스도 안에서” 말이다(빌 4:13).


주님은 사역에 지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막 6:31).” 일할 때와 쉴 때를 잘 구분할 수 있다면, 두 가지 모두를 잘 감당하고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선교사들의 교회 방문은 그들에게 사역으로서의 보고만큼이나, 그 가정에게 쉼의 시간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번 여름, 교회의 아낌없는 환대를 경험한 선교사들은 “이런 환대는 처음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특히 즐거움이 뚝뚝 떨어지던 어린 자녀들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온 만 9살의 루지는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빠, 우리 여기에 더 있다가 가자고 목사님에게 말씀드리면 안 돼?” 다른 이유로 비록 그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들은 모두 이런 환대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교회—선교사를 환대하는 사람들


선교사에게 환대를 베푸는 교회의 입장을 생각해보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교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관점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사역하다가 잠시 한국에 들어와 모교회이자 후원교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 가정과 사역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주던 교회이다. 어머니의 친구분들이기도 하셨던 권사님들은 나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이고, 김 선교사 얼굴이 두 배가 되었네.” 살이 쪘다는 말이다. 그 말의 뉘앙스는 알아서 생각하시라! 나는 정말 그때 살이 쪘었는지 모르겠다. 놀라운 것은 권사님들의 반응이 내 어머니의 반응과 너무나 달랐다는 사실이다. 어머니는 나를 보았을 때, “아이고, 너 얼굴이 반쪽이 되었구나!”라고 하셨으니까. 여기서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관점이다. 내 아들로 볼 것인가, 우리가 돈을 보내서 선교의 일을 시킨 일꾼—선교사로 볼 것인가?


한 선교단체의 책임을 맡고 있던 시절, 나는 기회가 되는대로 교회들을 방문하여 “선교사들을 여러분의 아들, 딸, 형제와 자매로 여겨 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하곤 했다. 인도네시아 우리 집을 잠깐 방문하셨던 나의 아버지는, 365일 이렇게 더운 나라에서 어찌 에어컨도 없이 사느냐고 나무라시고는, 직접 나가서 에어컨을 사오셨다. 한국의 가정집에서 에어컨을 사용하는 것이 사치로 여겨지던 시절의 일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관점이다.


선교사를 자기 자식이나 친형제로 여기는 관점은 그들을 대하는 교회의 방식을 결정한다. “우리도 휴가 못 가요. 우리도 별로 가보지 못하는 호텔에, 우리도 먹지 못하는 값비싼 음식을 꼭 대접해야 하나요? 차라리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지요!” 이 말,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 아닌가?


선교사들, 그리고 그 자녀들은 낯선 나라, 낯선 문화, 우리와 다른 피부의 사람들 속에서 살아간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물리적 환경이 열악한 곳이 대부분이다. 그들이 어떤 환경에 있든 간에, 그들은 이방 민족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감당하려고 자신들의 생명, 그리고 가정을 주님께 드린 우리의 형제들이다. 우리가 물질과 기도로 선교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선교사와 가정들이 고국 교회를 방문하여 아낌없는 환대를 경험할 때, 주님은 그 환대를 통해 그들의 마음을 치유하시고 넉넉하게 하시고 웃게 하신다. 즐거이 사명을 감당할 마음을 회복하게 하신다. 


메시지 성경이 완간 되었을 때, 그 성경으로 시편을 읽었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익숙한 시편 23편을 읽을 때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하나님의 선하신 환대를 느끼며 전율했던 기억이 새롭다. “You serve me a six-course dinner!” 주님께서 나에게 성대한 코스 요리를 차려 주신다고? 개역개정역이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라고 번역한 부분이다.


마지막 날, 그리고 영원토록 하나님께서는 원수가 보는 앞에서 성대한 코스 요리로 우리를 환대해 주실 것을 나는 믿는다. 그러나 때때로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도,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사람들을 통해 선교사와 그 가정들에게 ‘성대한 코스 요리’를 차려 환대하신다. 물론 주님이 직접 차려 주시는 상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충분하고 넘치도록(More than enough)


당신과 당신의 교회는 우리를 환대하시는 탕부 하나님처럼, 선교사와 그 가정들을 아낌 없이환대하는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될 의향이 있는가? 하나님은 언제나 충분한 것보다 더 많이(more than enough) 우리에게 베풀어주는 분이시다. 탕부 하나님(Prodigal God)처럼, 아낌없이 환대를 베푸는 프라디걸(prodigal) 교회들이 되면 좋겠다.

때때로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도,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사람들을 통해 선교사와 그 가정들에게 ‘성대한 코스 요리’를 차려 환대하신다. 물론 주님이 직접 차려 주시는 상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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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형익

김형익 목사는 건국대에서 역사와 철학을, 총신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인도네시아 선교사, GP(Global Partners)선교회 한국 대표 등을 거쳐 지금은 광주의 벧샬롬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 ‘율법과 복음’, ‘참신앙과 거짓신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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