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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상실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라
by David P. Barshinger2021-08-14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멀어지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마음을 현세적인 것에서 돌이켜서 오로지 그분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길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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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는 죽을 거야.”


할머니와 함께 식사를 하는 중에 사촌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 자리에는 열 살 된 대니 형도 있었다. 그를 변호하고 싶은 강한 절박함에 나는 여덟 살짜리 아이가 쥐어짤 수 있는 모든 힘을 모아서 “아니에요! 대니는 안 죽어요.”라고 말했다. 


당시 대니는 뇌종양을 앓고 있었다. 한때 그는 내 누나와 레고 만들기, 태그 놀이, 촌극 꾸미기 등을 즐기던 활기찬 소년이었다. 그러나 그의 피부는 뼈에 달라붙은 것처럼 말라버렸고, 몸은 서서히 쇠약해졌다. 


철없는 사촌들의 행동은 단지 부모들이 하는 말을 듣고 따라한 것에 불과했다. 그랬기에 그 말이 나와 우리 형제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알 리 만무했다. 그러나 결국 대니 형에 관한 내 생각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이모와 삼촌의 말은 사실이 되었다. 대니 형은 그 날로부터 채 일 년을 더 살지 못했다.


죽음, 그리고 삶


인간에게 죽음은 실로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부활의 생명과 천국에 있는 사랑하는 그리스도인과의 재회에 대한 소망을 안고 살아가는 신자들에게도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죽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내며 경험하는 죽음은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기 충분하다.


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극단적인 상실의 형태는 죽음이지만, 오늘날 COVID가 고통스럽게 상기시키고 있듯이 우리는 때때로 다른 종류의 상실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COVID가 지금 강요하는 상실은 정상적인 사회적, 전례적, 그리고 직업적 리듬에 관한 것이다. COVID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인간 번영에 꼭 필요한 갈망을 가져다주는 연결성마저 상실하고 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지금과 같이 단절된 세상에서 삶을 직면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굳이 앞으로 더 나아가려고 하지 않기도 한다. 이런 현실은 여전히 상실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가 처한 어려움을 더욱 부각시킨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친구와 함께 할 수 없을 때, 교회에서 함께 예배할 수 없을 때, 무슨 힘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나 자신을 절단하기


지속되는 상실과 관련한 이미지 중 하나가 미국의 남북 전쟁 참전 용사이다. 남북 전쟁 동안 의사들이 집도한 절단 수술은 약 60,000건이다. 사실상, 전쟁에서 하는 수술의 4분의 3이 절단 수술이다. 그중 약 45,000명의 수술에서 살아남았고, 그리고 그들은 신체적이고도 개인적인 상실을 시각적으로 상기시키는 세대를 대표한다. [‘의학 및 통합 과학 역사 저널(Journal of the History of Medicine and Allied Sciences)’에 실린 ‘내전의 절단: 물리적 및 사회적 차원(Amputation in the Civil War: Physical and Social Dimensions)을 참조하라]


이들은 일상생활에서 신체 일부가 없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더 이상 걷거나 글을 쓸 수도 없었고, 생계를 유지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만질 수도 없었다. 이러한 상실은 정상적인 삶을 방해하고, 이런 삶을 계속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상실의 삶은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삶을 거스를 뿐 아니라 우리의 기도까지 좌절시킨다.


크리스토퍼 애쉬(Christopher Ash)는 욥기 주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마도 살다 보면 인생에서 모든 것이 잘못되는 때를 만나거나 또는 만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고통과 실패, 심지어 재난과 비참한 시간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시간은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시어 우리가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만들기 위한 도구일 수도 있습니다.”


팔다리를 잃은 것, 직업을 잃은 것, 그리고 형제를 잃은 것과 같은 상실 속에서조차 하나님이 선하실 수도 있다고 믿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청교도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멀어지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마음을 현세적인 것에서 돌이켜서 오로지 그분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길 원하신다. 따라서 상실은 어떤 의미에서 반직관적이지만, 유익을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때때로 그 혜택을 다른 방법으로도 찾을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 그러나 상실이 주는 유익을 거둬들일 때조차, 우리는 종종 상실 이전으로 돌아가길 갈망한다. 지금의 내가 아닌, 이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종종 대니 형을 생각할 때, 그가 아직도 살아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대니 형이 지금 내 아이들과 함께 논다면 어떤 모습일지, 우리는 지금 어떤 삶을 공유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상실을 지워버리고 싶다. 그러나 나는 상실을 지우는 게 적어도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또 다른 상실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쉽게 간과한다.


매건 웨일런 터너(Megan Whalen Turner)가 쓴 소설 ‘도둑의 귀환(The Return of the Thief)에는 현명한 마법사와 유게니디스(스포일 주의: 그녀의 이전 책에서 손을 잃은 인물) 사이의 대화가 나온다. 유게니데스에게 잃어버린 손을 여전히 원하는지 마법사가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당연히 그립지요. 누구나 다 더 춤을 잘 추고 싶고, 더 노래도 잘하고 싶고 또 더 강해지고 키도 커지고 싶어할 겁니다. 그러니까 누구나 다 자신을 바꾸고 싶어하지요…. 하지만 손을 잃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손이 다시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건 결국 지금의 내가 어떤 낯선 사람으로 바뀌기를 바라는 것과 같아요. 그것은 결국 지금의 내 자신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인데, 누가 그걸 원할까요? 

불신자의 경우 상실이 그 사람을 더 낫게 만든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믿는 자라면,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구원과 거룩함을 위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그렇기에 나의 상실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은 나 자신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은혜를 통해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지금 나 자신의 모습을 지우려는 것이다. 


내면의 변화(character arc)


이런 주제는 사실상 오래된 질문의 되풀이이다. 에덴 동산에서 처음 세워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재건된 하나님의 왕국을 드러내는 선함과 생명에 대해 명백하게 모순되는 나쁜 일이 생길 때, 나는 그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물론 우리는 타락이 이 세상에 가져다 준 영향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지금 말하는 상실은 죄에 빠진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타락한 세상에서 더 많은 진실을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자 동시에 구속주이시다. 그의 일하시는 방식은 선하게 창조된 질서 속에 인간이 도입한 악에서조차 선함을 가져오는 것이며, 또한 상실을 통해서도 우리의 부서진 몸과 영혼 속에 생명의 씨앗을 심는 것이다. 그는 이 세상 너머에 있는 더 큰 무언가를 위해 우리를 지금도 빚어가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상실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려고 애쓸 때, 우리는 하나님이 상실을 통해 주시려고 준비한 선한 무언가를 ‘상실’하는 것이다. 


이런 희망은 손상과 고통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에게 붙잡을 수 있는 무언가를 준다. 욥의 이야기는 헤아릴 수 없는 상실 이후의 회복의 그림이고, 예수님의 부활은 그 회복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임할 것이라는 약속이다. 그렇기에 계시록의 마지막이 단지 새 하늘과 새 땅의 건설 및 더 이상 애통과 고통 그리고 죽음이 없다는 보장(계 21:1, 4)만이 아니라, “만국의 치료”까지 덧붙여서 끝나는 이유이다(계 22:2). 어떻게든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상실을 연결하고 있으며,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존재로, 상실이 없이는 결코 될 수 없는 존재로 우리를 만드신다. 


나는 대니 형이 아직 살아 있기를 진심으로 원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암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나의 결함을 드러낸다. 나는 하나님이 대니 형의 삶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보지 못한다. 하나님은 대니 형을 육체적 고통과 죽음을 통해 죄와 질병, 그리고 죽음의 사슬에서 벗어난 더 나은 상태로 인도하셨다. 왜냐하면 대니 형은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또한 대니 형의 죽음을 사용하여 나를 빚으셨다. 하나님은 그 죽음을 사용하여 나를 구속하고 또 거룩하게 하신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내 안에서 성취하신 일이 지워지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신비하게도 나의 상실을 지우는 것은 나의 유익을 지우는 것이다. 그래서 상실에 직면했을 때 나는 울면서 발버둥치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그분의 백성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는 하나남의 방법을 받아들여 소망에 매달리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절뚝거리고 걸으며 비틀거리더라도 말이다. 




원제: Learning to Live with Los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신비하게도 나의 상실을 지우는 것은 나의 유익을 지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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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David P. Barshinger

데이비드 바싱거(PhD,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는 크로스웨이 출판사의 편집인이다. 지은 책으로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시편(Jonathan Edwards and the Psalms ,Oxford University Press, 2014), 공동 편집한 책으로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성경(Jonathan Edwards and Scripture Oxford University Press, 2018)’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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